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영화 <8마일>의 마지막 랩 배틀에서 에미넴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뜬금없이 셀프디스를 시작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분 30초. 그중에서 거의 1분을 내리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데 할애한다. 그리곤 상대방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얼타고 있을 때, 남은 30초를 살뜰하게 아껴서 압축 디스를 상대방의 명치에 꽂아 넣는다. 기가 질린 상대는 디스는커녕 해명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정세랑의 책을 얘기하려는데 에미넴에서부터 운을 떼다니 얼마나 장황한 얘기가 되려나 걱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별 얘기 아니다. 나는 요즘 <시선으로부터,>를 소개하는데 에미넴의 전략을 빌려 쓰고 있다.
그 전략의 이름은 "까도 내가 까". 여러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피드백을 받아본 결과 몇몇의 비판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남들이 까기 전에 내가 먼저 까겠다는 전략하에 소개하자면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1. 깊이가 얕다.
여성 서사, 퀴어, 환경, 온라인 상의 성범죄 등 최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슈들이 두루 담겨있다. 그렇게 몽땅 집어넣다 보니 당연히 어느 하나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생색만 내고 불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판매 부수를 올리기 위한 비즈니스적인 전략이었다는 급진적인 의견도 있었다.
2. 작가의 의견이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도드라진다. 좋은 소설은 한 문장을 설득하기 위해 서사와 인물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소설이다. 그렇게 쌓은 세계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설 속 이야기가 자기 일인 것처럼 몰입시킨다. 몰입의 순간, 독자의 마음의 안쪽에서는 공명이 일어난다. 그러고 나면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을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허나, 작가의 의견이 서사와 인물을 뚫고 나오면 몰입이 깨지고 이야기는 생명력을 잃는다. 작품과 마음이 내부에서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전 소설에서 전지적 작가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작품은 후져진다. 노회한 독자는 작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면 흥미를 잃고 만다.
3. 엔딩이 성의가 없다.
웃기기 위해서는 먼저 웃지 않아야 하고, 울리기 위해서는 먼저 울지 않아야 한다. 유능한 코미디언은 듣는 사람들이 웃겨 죽으려고 하더라도 세상 뚱한 표정으로 극을 이끈다. 가장 슬픈 영화는 슬픔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순간에도 신파로 빠지지 않고 관객들을 모두 울린 후 가장 나중에 운다. 희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이 희망을 이야기하려거든 서둘러서는 안 되는데, 중요한 제사 장면에서 후루룩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하고 무성의하게 끝나버려서 아쉽다. <피프티 피플>에서도 그랬는데 고질병인 것 같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진부한 말이 있다. 감성 뽐내기 무대였던 싸이월드에서는 이 말이 '사랑은 모든 단점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는 낭만적인 문구로 쓰였다. 그러나 싸이월드가 없어진 2020년. 청장년인 우리는 같은 문장을 보더라도 느끼함을 덜어내고 좀 더 담백하게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단점과 역경들을 무색하게 하는 결정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에 '불구'할 수 있다. 사랑의 가치체계에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를테면 귀여움 같은 것. 못 생겼는데 귀여워. 우유부단한데 그게 귀여워. 앞의 조건들을 반대로 써도 똑같이 말이 된다. 예쁜데 귀여워. 똑부러진데 귀여워. 그러니 사실 생김새가 어떻건 성격이 어떻건 그냥 귀여운 건 귀여운 거란 소리다. 쭈욱 늘어선 곱셈 사이에 0을 하나 끼워 넣으면 다른 숫자들이 무엇이든 결과는 0이 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귀엽다. 문제의식의 깊이가 얕든, 작가의 사견이 도드라지든, 엔딩이 작위적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여운데 어쩔.
단점이라고 지적한 것들을 하나씩 반박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따져 무엇할까? 어차피 곱하면 0인데. 그렇다고 어째서 이 소설이 귀여운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귀여움의 이유를 따지는 일은 귀엽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1도 없는 1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 귀여움이 어떤 것들을 가능하게 하냐는 것이다. 귀여움은 좋은 소설이 추구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
이 문장에서 이야기를 귀여움으로 대체해도 말이 된다. 귀여움은 논리를 넘어선 설득을 가능케 한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누구나 자의식 과잉이다.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남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충분한 사랑과 지지와 학습을 받아야만 겨우 타인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자의식 과잉이 디폴트 상태이다. 그런 경우에도 귀여움은 효과가 있다. 귀여움은 지 밖에 모르는 마음이 타인으로 나아갈 수 있게도 한다. 겪지 못했던 타인의 입장을 더 이해하게 하고, 윤리적으로 선한 선택을 하게 한다. 귀여움은 평범한 인간을 고결하게 하기도 한다.
<시선으로부터,>는 그 귀여움으로 희망을 그려낸다. 소설은 두 가지 시점(時點)에서 기술된다. 심시선씨가 견뎌낸 20세기 말과 그녀로부터 비롯된 가족들이 그녀를 추모하는 21세기의 지금.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선이 하나 이어진다. 그 선은 우상향 중이다. 내가 살아내는 하루하루는 엉망이고 사람들은 답도 없는 것 같지만, 20세기와 비교해보면 그래도 인류는 큰 틀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예 제도는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트로피 헌팅은 야만적인 행위가 되었다.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는 범위는 계속해서 넓어지는 중이다. 젠더, 인종, 장애인, 탄소배출, 환경오염 등등 아직도 막막한 문제들이 많지만 이것들이 문제조차 되지 않았던 20세기와 비교하면 명백히 나아졌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 희망을 충전하고 다시 가까운 현실을 본다. 혐오가 꽤나 팽배해 있다. 남들보다 먼저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대다수의 완고함에 맞선다. 일부 따뜻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지지한다. 그렇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지지에서 지지로 뜻이 번지다 보면 예민한 몇몇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가 된다. 가장 예민하게 투쟁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 그들을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어야겠다고 비겁한 다짐을 한다.
두 점을 이으면 방향이 된다. 20세기에서 뻗어 나온 우상향의 직선이 21세기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직은 모른다. 우리가 평범하게 저지르는 일상이 22세기에 봤을 때 얼마나 야만적일지도 알 수 없다. 훗날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마티어스 마우어일 수도 있을 노릇이다. 남부끄럽지 않은 21세기 지구인이 되려거든 공동선이 어떻게 진보해 갈 것인지 기억해야 한다. 윤리의 이정표는 타자를 이해하는 범위가 넓어져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이전 세대의 평범한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지금의 잣대로 욕하기보다 그 시절을 견뎌낸 인간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작가가 심시선씨의 10주기 제사에 바치는 소중한 조각이다. 첫 장에 그려진 가계도를 보면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뻗어져 나왔다고. 지금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풍요로운 것은 예민하고 단단했던 당신의 덕분이라고. 그렇게 지은 제목 시선으로부터에는 방점이 아니라 반점을 찍는다. 반점에서는 단순히 20세기의 여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치지 않고, 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역시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