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과에 입학한 지 22년 되었네요.
대학 입학해서 졸업하고,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쭉 원예학만을 전공한 저는 지금은 미생물을 연구하는 마이크로바이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2년 동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원예학은 좋아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4년 동안 대학생활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던 분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예학을 전공하고 받은 농학학사는 부모님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학교와 학과는 제가 선택하진 않았거든요.
하지만 원예학을 전공하고 받은 농학석사는 오롯이 제 선택이었습니다.
석사 학위를 위한 대학원 진학은 제 선택이었고, 우리 생활에 유용한 식물자원을 산업화하기 위해서 대량생산 할 수 있는 조직배양 방법에 대한 연구도 오롯이 제 선택이었지요. (앗, 근데 다른 학교로 가겠다는 걸 교수님이 잘해주시겠다고 해서 출신대학의 대학원을 간 것이므로 완벽하게 제 선택만은 아니었네요)
석사학위를 전공하면서는 식물의 대량생산도 좋지만 식물이 가지고 있는 유용한 가치를 더 연구하고 싶고 보는 게 아니라 먹고 바를 때의 유용함을 연구하고 싶어 져서 추출물의 효능 평가 및 성분분석을 박사학위 연구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렇게 박사학위 취득 후, 저는 제 연구가 실험실 안에서, 실험탁자 위에서만 끝나는 걸 원치 않았고 상품화하여 실생활에 이용되는 걸 내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직장인의 생활을 선택했어요.
학위 취득 후 10년 동안은 신약개발과 건강기능식품 개발과 관련된 일들을 해왔습니다.
식물의 유용한 가치를 탐구하는 일과, 이걸 산업화하기 위해 연구하고 규제를 이해하고 적법한 상품을 개발하는 일은 조금 다른 일이라 여기저기 굴러다니면서 많이 공부하고 배웠다고 써야겠지만 솔직히 고생 진짜 많이 했었네요 헤헷.
참지 못하는 성미로 인해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여러 회사를 다녔고, 그 덕분에 여러 기회를 가져봤습니다.
지금은 일 년 넘게 마이크로바이옴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네요.
식물 연구에만 10년. 식물을 이용한 상품 개발에만 10년. 약 20년을 식물을 연구하며 살다가, 유산균/마이크로바이옴/박테리아 이런 연구를 하려니 종종 내가 뭐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고, 어떤 날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나 잘 알고 잘하는 걸 두고 여기서 왜 헤매고 있을까? 싶은 날이 많았어요.
근데 요즘에는 미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로 재미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90%가 미생물이라고 하죠. 인간의 피부와 소화기관에는 공생 미생물이 존재하고 최근에는 혈액 안에도 미생물이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짧게 말하자면, 우리 건강은 우리가 먹은 음식과 우리 몸의 공생 미생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미생물을 지니고 있는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가 이것이 우리의 기분과 신체활동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치더군요.
우리가 먹은 식물이 소화과정을 거쳐 흡수되면서 식물이 축적한 2차 대사산물(알칼로이드, 폴리페놀, 플라보노이드, 테르페노이드 등)이 염증 개선, 산화 방지, 돌연변이 세포 발생 억제, 콜라겐 생합성 촉진 등의 효과를 내면서 우리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미생물을 연구하다 보니 우리가 먹은 식물을 잘게 쪼개서 우리 몸에 필요한 요소로 변환하는 데에는 소화효소뿐 아니라 각자의 장내 미생물이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산균, 프로바이오틱스와 같은 유용 미생물을 섭취하면 건강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섭취한 미생물은 우리 몸에 영원히 정착하지는 않고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몸에 유용한 역할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유용 미생물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우리 몸에 정착해 있는 미생물 중 유용미생물을 키우는 것도 매우 중요해지는데요, 우리와 함께 사는 미생물의 균형을 조절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20년 동안은 어떤 식품/추출물을 먹는 것이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는가를 연구했고, 지난 2년 동안은 어떤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를 먹는 것이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이제 남은 20년은 어떤 식품/추출물/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를 먹으면 우리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향상되고 유익균과 유해균의 균형이 적절하게 바뀌어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는가를 연구하게 될 것 같아요. 물론 다가올 20년 동안 또 꾸준히 연구해서 그다음 20년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해야겠지요 (살아있다면요).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벌어먹기 바쁘고, 식물이 아닌 것으로 벌어먹다 보니(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크릴오일과 효소를 개발해서 먹고살았습니다. 하하) 글이 잘 안 써지더라고요. 중간에 심리적 방황을 길게 겪은 탓도 있긴 하지만요.
뭐라도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한데 관심사가 자주 바뀌다 보니 나란 녀석은 브런치랑 안 맞는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이런 게 나라면 있는 그대로 지내자 하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관심사를 다양하게 풀어내보려고 합니다.
정체성. 뭐 이건 제가 늘 고민하는데 여태 답을 못 얻은 분야예요.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고향이 어딜까? 나의 정체성은 뭐지 하면서 혼란스러웠었는데요, 이제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을 때에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저는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제천 10년, 청주 10년씩 번갈아가며 살았던 사람이라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충북 사람인건 확실한데, 제천 사람이라고 하기엔 제천을 모르고, 청주 사람이라고 하기엔 태어나진 않아서 애매했었습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이 다르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은 충북 단양이라 거기도 아니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곳은 없어서요.
근데 직장생활을 하고나서부터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가 신약 아니면 건강기능식품 개발하는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니까 그런 거 한다고 말하면 30대 이전에 저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네가 왜?? 이런 반응이었거든요. 가족과 친척들에게 영양제 얘기를 해줘도 네가 왜? 하면서 식물 키우는 법만 물어보고 그래서 혼란스러웠어요. 그러다가 마이크로바이옴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니 이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도 엥? 네가 왜? 이런 반응입니다. 뭐 살다 보니 그런 기회가 와서 기회를 잡았고 제가 생각보다 적응을 잘합디다 하고 넘어가고 있는데 저도 좀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인생은 길고 긴 것. 이제부터는 미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로 포지션을 잡고, 하던 일을 조금 더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해 봐야겠습니다. 결국 인간 생활에 유용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제 신념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박사 졸업시기쯤 외국의 학자들과 함께 양치식물에 대한 책을 펴내면서 "Functional activities of ferns for human health"이라는 짧은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평생 살면서 가장 가슴 벅찼던 일이 이 책을 내 손으로 받아봤을 때였는데요, 당시에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양치식물 연구는 끝이고 이제는 돈이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었는데 13년이 지나 돌아보니 결국 저 책을 시작으로 저는 계속 human health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네요.
언젠가는 Functional activites of microbiome for human health라는 글을 써볼 수 있도록 아니 그런 글을 쓰자는 제안을 받을 수 있도록! 또 즐겁게 살아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