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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줌마 May 10. 2024

나는 '사회불안' 환자입니다.

상담사도 정신과 환자일 때가 있다 - 3

  '사회불안'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내게 알려준 진단명이다. 정신과 진료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스스로 느끼는 불안 -교감신경계가 항진되면서 불안이 엄습하는 느낌- 이 심하다고 느꼈고, 평소의 나와 달리 버럭 화가 나고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것이 우울한 양상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이 나의 주요 증상이라고 추측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내 예상과 조금 다르게 '사회불안'을 말씀하셨다. 우울도 조금 있다는 것을 덧붙이면서..


  의사 선생님은 약물치료를 말씀하시며, 2-3개월이면 좋아졌다고 느낄 것이고, 1년 정도 약물치료를 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권하셨는데, 시간 관계상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끝나고 돌아오면, 둘째 하교 시간을 맞추기 힘들 것 같았다.)


  정신과 진료를 결심할 때, 약물치료를 예상했다. 그래서 약물 복용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진단명이 조금 의아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유난히 신경 쓰고 걱정하는 모습을 짚어주었고, 그게 사회불안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평소에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은 있다. 20대 때 다소 강박적으로 스테이플러 자국을 싫어했다(참고: 강박은 불안장애의 한 종류이다.). 또 평소 걱정이 많기도 하다. 불안이 높다는 건 알았는데, '사회불안'이란 진단명이 쉽게 와닿지는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혹시 저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하면 어쩌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야?'와 같은 생각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마세요."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꽤나 의식하면서 살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추가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나와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아이의 친구들(선생님)이 내 아이를 어떻게 여길까?', '다른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를 어떻게 생각할까?'처럼 아이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가지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에 예민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만나는 사람들까지 예민한 상황이니 나의 불안은 점점 커졌던 것이다.




  나는 나의 병 -사회불안- 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을 꾸준히 먹으며 불필요한 걱정과 생각을 중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막을 수 없지만, 중단시킬 수는 있다. 걱정이 떠오를 때면, '잠깐만. 이건 불필요한 것이야.', '그만, 이건 나중에 고민해도 충분해.'라며 무한 증식하는 생각을 중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와 아이를 심리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했다. 아이가 감정적으로 동요될 때 하는 공감표현도 조금 바꾸었다. 예전에는 "속상했지."라고 했다면 이제는 "네가 속상했어."라고 주어를 넣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을 짚어주었다. 이것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다른 부모가 그러하듯이 나도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두루뭉술하게 '아이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갖는 것,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과 같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성장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미래의 불확실성이 아이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0년대생인 나는 수능을 보고 대학교에 갔다. 20대에는 명문대에 가는 것,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성공한 삶인 줄 알았다. 30대가 되니 아이들 육아에 정신이 없었고, 명문대와 대기업이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삶이 더 이상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삶이 성공일까?',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어떤 모습이지?'와 생각을 하며 불안을 키워 왔던 것이다.


  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는 아니지만, 해당 학년에 배우는 내용은 숙지해야 한다고 여겼고, 운동을 잘하지는 않더라도 친구들과 어울릴 때 밀리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우리 아이들에게 '밝다, 착하다.'며 긍정적인 코멘트를 해 줘도 칭찬으로 듣지 못했다. '아이들이 마냥 밝고 착하다.'는 생각에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미래를 걱정하곤 했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나는 아이들의 장점과 강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칭찬하고 격려해주지 못했다. 내가 가진 불안이 더 컸기 때문에 아이들을 충분히 칭찬하고 격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 원래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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