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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세시공작소 Mar 11. 2022

사이드 프로젝트 지옥

개발자 D의 보리차

<보리차 주식회사> 매거진은 수다와 일 얘기를 넘나드는 IT업계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일상 속에서 개발자와 기획자의 시선으로 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호기롭게 시작한 '보리차 주식회사'는 새해가 되고, 여러 일과 개인사를 겪으며 조용히 묻혔다. 그 새 누군가는 이직을 했고, 누군가는 결혼을 준비하며, 누군가는 그냥 몹시 바쁘다.

공유 노트에 쌓여있는 완결 짓지 못한 글들을 보면서 '그래, 비슷한 애들끼리 노는 거지' 싶었다. 회사가 아니라도 뭘 해야만 하는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직장인의 3대 허언증

'유튜브 할 거야', '퇴사할 거야',
'퇴사하고 유튜브 할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MZ세대인 우리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야 취업도  수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일을 하려면 일해본 경험이 있어야 하다니.

2010년대부터는 전산학과나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거의 없다. 대학들은 인구 절벽에 부딪혔고 교육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학 정원을 줄여왔다. 그렇게 대학들은 학생들의 취업률로 줄 세워졌고, 수많은 대학들은 살아남기 위해 취업이 잘 되는 과를 쪼개고 취업이 안 되는 과를 합쳐서 세부 전공을 만들다. 그 과도기에 있던 90년 대생들 중 대다수는 정보보호학과, 인터넷 미디어 공학과, 콘텐츠 디자인학과, 게임공학과 같 세부전공의 타이틀을 갖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고작 4년을 공부해서 얼마나 대단한 전문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과 이름이 있으니 취업을 하려면 최소한 내가 그쪽 분야를 '들어는 봤다' 할 정도의 실력인지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당연히 특화된 전공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야만 취업도 잘할 수 있었다. 공대가 그래서 취업에 유리했고.

스마트폰이 막 보급화되던 시절 대학생활을 함께한 우리는 졸업 프로젝트 겸, 취업준비 겸, 재미로 우리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을 플레이스토어에 출시했었다.('새벽세시공작소'도 그때 만든 개발자 계정이다) 지금 보면 완성도도 떨어지고 많이 부족하지만, 최소한 그때 우리는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것을 즐겼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고인물이 되어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직장을 10년 가까이 다녔다.

어릴 때 동경하던 직함과 직급 막상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그저 흔하디 흔호칭일 뿐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내가 하는 일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회사생활은 재미가 없어졌다. 언젠가 회사 선배가 말했다.

"여기는 회사지, 연구소가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나는 개발자지만 실제로 회사에서 개발에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켜서 하는 일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내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개발에만 몰두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물론 내 노동의 가치와 회사에서 주는 월급은 소중하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가(Self-motivation)도 매우 중요하다. (애자일 방법론에도 나온다) 회사를 20년씩 다닌 선배들처럼 내가 정년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적고 소중한 월급으로 하는 재테크는 이익도 적고 귀여웠다. 집값은 감당이 어려울 만큼 올라가버린 지 오래다.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현생을 버티려면 뭔가 취미와는 다른,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이 필요했다.


워라밸 칼퇴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IT업계에 있는 대부분의 직군이 그렇듯 개발자도 시간을 투자해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트렌드를 놓치기 시작하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능력과 지식은 분야별로 매우 복합적이다. 하지만 많은 회사들은 실무자가  그가 속한 팀의 임원을 전문가로 인정한다. (사실 그 임원도 다른 임원을 설득하는 데 많이 애를 먹는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회사에서 요구하는 알고리즘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오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이런 것이었다. 예를 들어 AI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한다면, 각 도메인의 전문가가 AI의 큰 그림을 빨리 훑고 자기 분야의 문제에 맞게 파고들어서 협업해야 하는 것이지, 수능 공부처럼 획일적으로 AI 교과서를 마스터하고 나서야 단계별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실질적인 성과가 아닌 시험과 자격을 원했다.

래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만 계속 공부하면 오히려 개발자로서의 문제 해결 능력이 뒤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더 중요한 일들이 이렇게 쌓여있는데, 왜 내가 올림피아드 같은 시험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써야 할까? 기본 지식은 이미 입사할 때 치른 기술면접과 학위로 증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일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렸다. 요즘 사람들이 개인적이라서 키워놓으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바꿀 수 없어서 직원이 떠나는 것이다. 회사에서 성장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회사생활마저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무엇으로 회사를 버틸 수 있을까? 어떤 일은 퇴근시간으로만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을 재단할 수가 없다.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 성취 든 간에,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이상 하기 싫은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 좀 더 많아야 버틸 수 있다. 자아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열정이 그리웠다.


답은 회사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

큰 회사의 장점이자 단점은 기존에 성공한 방식에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시도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서장과의 면담에서 이런 말도 들었다.

"D님은 아직 젊으니 좀 더 준비해서 구글을 가세요"

그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이직을 해서 좀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회사로 간다면 나아질까? 나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직을 준비하고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간다. 더 이상 뭔가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도 지겹다. 이미 20대의 대부분을 뭔가를 준비하는데만 썼다. 사이드 프로젝트도 그래서 시작했다. 쉬는 날에도 개발을 하다 보면 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은 포기하지만 않기로 했다.

개발자들의 토이 프로젝트였던 '내 트리를 꾸며줘!'.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250만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며 화제가 됐다. (출처: 한국일보)

어쩌면 운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불타오를 때는 열심히 하지만, 나중엔 헬스장에 기부를 하게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워라도 꾸준히 하러 오는 사람들은 어찌어찌 근육량이라도 유지한다. 그 과정에서 실력이 느는 것이 보이면 더 뿌듯하고, 이렇게 키워진 체력으로 본업도 더 잘할 수 있다. 그래서 보리차 주식회사는 느리더라도 계속할 것이다. 이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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