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2
어릴 적 내 부모는 맞벌이를 하셨다. 기억에 아빠는 작은 식품공장의 배송직이었고, 엄마는 중형 병원 식당의 찬모였더랬다. 두 분 다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식품공장의 특성상 새벽 출근이 잦았다. 우리가 일어나는 시간엔 늘 아빠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을 한 뒤였다. 그나마 엄마는 출근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저녁밥까지 해주는 조건이라 늘 늦게 퇴근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작은 집엔 형과 나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노란색의 학원차에 실려갔지만, 우리 형제는 집안 형편상 학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돌아온 집에는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빈 냉장고를 열어 두리번거려봤자 텅텅 빈 곳에선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다 정 배가 고프면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밥을 지어다 먹었다. 반찬은 김치뿐이었다.
큰 형은 태어날 때부터 풀 따위는 입에도 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 밥상 위에 고기가 없으면 늘 깨작거리기 일수였고, 가끔 돌아오는 주말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 날이라도 있으면 형은 젓가락으로 큰 고기 두, 세 점씩 쓸어가기도 했더랬다. 엄마는 동생도 먹어야 하지 않느냐며 야단을 쳤지만 그때뿐이었다. 이런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형은 텅텅 빈 냉장고를 볼 때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어했다. 그나마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때엔 덜했지만, 방학이 시작되면 보릿고개는 우리 형제를 덮쳤다.
그렇다고 해서 내 부모가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늦게 출근하는 엄마는 방학을 맡은 우리에게 앞의 슈퍼에 이야기해놨으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외상을 달아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과자나 라면으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긴 어려웠고, 집안 형편을 알고 있던 우리는 물건을 만지작 거리다 이내 놓아버렸다.
그러던 어느 여름방학쯤에 형은 작심이라도 한 듯 나에게 말했다.
- 우리 엄마 찾아가자, 형이 가는 방법 알아. 가서 우리 엄마한테 치킨 사달라고 하자.
우는 아이들의 목에서 나오는 '엄마' 소리는 본능적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큰형과 나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엄마를 찾아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버스의 번호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었던 노선과 가끔 타시는 할머니들이 주는 사탕은 기억에 남아있다. 두 색이 섞인 일명 '눈깔사탕'은 크고 달았다. 입에 사탕을 물고 빨던 나는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형에게 물었다.
- 형, 진짜 길 아는 거지?
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가 근무하는 병원을 큰 형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점심이 조금 지나 도착한 병원은 우리가 하차한 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다. 병원은 5층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올라간 우리는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문 너머로 쭈뼛거렸다. 일단 도착만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큰 형과 나는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하는 다음이 없었다. 그렇게 병원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중에 카운터의 직원분이 물었고 큰 형이 대답했다.
- 엄마 만나러 왔는데요.
당황한 직원분은 안으로 안내해주셨다. 기억에 조리실은 병실 몇 개를 지나 꽤 긴 복도의 끝에 있던 걸로 기억한다. 복도 끝의 조리실에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을 열였을 때 그 달그락 거리는 사이에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를 보자 엄마는 깜짝 놀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다그쳤고 우리는 온 이유에 대해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온 몇 명의 직원들 사이에서 엄마는 얼굴을 붉혔다.
점심식사가 끝난 뒤 시간이 빈 엄마는 우리를 근처 치킨집에 데리고 갔다. 각자 건네받은 봉지 안에 치킨이 들어있었다. 큰 형은 후라이드였고 나는 양념이었는데, 그 치킨은 멀리서 왔다는 이야기와 사정을 들은 원장님이 사주신 것을 나중에 커서 들었다. 뜨겁던 치킨을 품에 안고 꾸벅 졸던 우리 형제 사이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치킨 냄새로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