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처럼 말복(末伏)이 중복(中伏) 이후 20일에 오는 걸 월복(越伏)이라고 하는데요. 중복 지나 10일 뒤에 오는 매복(每伏)이 대부분인 여느 해보다 여름이 길고 무더운 해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올여름은 날마다 최고 기온을 갈아치울 만큼 밤낮으로 찜통더위군요.
기상학 용어로 열대야는 한밤중 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을 가리키지요. 30도를 넘으니, 매스컴에서는 초열대야라고 부르나 봐요. 초열대야 다음에는 어떤 용어를 쓸지 모르겠어요. 초초열대야, 초초초열대야?
오늘 낮의 길이는 13시간 48분이에요. 밤낮의 길이가 12시간으로 같아지는 추분까지 약 50일 동안 낮 시간이 1시간 48분이 줄어지겠죠? 하루에 2분 남짓씩 해가 짧아진다는 뜻입니다.
봄에 피는 꽃과 가을 무렵에 피는 꽃은 바로 낮길이의 변화에 따른 반응에서 비롯됩니다. 장일(長日)식물, 즉 낮의 길이가 길어지면서부터 피는 꽃이 봄꽃이고요. 국화 같은 단일(短日)식물은 낮이 짧아지는 가을에 꽃을 피웁니다. 장(長)과 단(短)이 있으면 중(中)도 있겠죠? 당연합니다. 개쑥갓처럼 4시 3 철 피는 중일(中日)식물도 있어요. 빛보다는 온도가 맞으면 꽃이 피는 종류입니다.
한여름은 그러니까 여름꽃은 물론, 봄꽃과 가을꽃이 뒤엉켜 피는 시절입니다. 그래서 꽃이 다양하고 많을 것 같죠? 의외로 적습니다. 봄꽃은 끝물이고 가을꽃은 필락 말락 첫물이라 양쪽 다 그 수가 적거든요. 꽃이 궁한 때라고 해서 '꽃궁기'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아요.
밤에 피는달맞이꽃은 구름이 끼거나 비오는 날에는 낮에도 볼 수 있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여기 한낮과는 상관이 없고 한밤중이 매우 중요한 꽃이 있습니다. 해질 무렵 피기 시작해 밤에 만개했다가 아침부터 쪼그라들기 시작하는 달맞이꽃. 낮엔 시들어 축 쳐져 있기 일쑤이니, 이름만 유명하지 정작 만개한 꽃을 보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도 부지런하거나 눈썰미가 남다른 분들은 새벽녘, 구름이 잔뜩 낀 날, 비 오는 날에 이 꽃을 볼 수 있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큰달맞이꽃’입니다. 접두어에 '큰'이 붙었으니, 이보다 작은 친구도 있다는 뜻? 네, '달맞이꽃'이 있습니다.
큰달맞이꽃은 말 그대로 키도 꽃도 커요. 우리 키를 넘나듭니다. 대개 2m 이상. 별명이 '왕달맞이꽃'일 정도지요. 달맞이꽃은 50~90cm로 작고, 꽃도 마찬가지로 작아요.
우리 동네에는 큰달맞이꽃으로 추정되는 군락이 한 군데 있습니다. '추정되는'이라고 한 까닭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생태적인 설명 시작합니다.
바늘꽃과의 두해살이풀. 북아메리카가 원산. 그냥 달맞이꽃은 남아메리카 칠레가 원산지.
이 땅의 달맞이꽃은 모두 귀화식물(歸化植物)입니다. 귀화식물로는 코스모스가 유명하지요. 코스모스는 이름 자체가 이국적이라 먼 데서 왔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 달맞이꽃은 이름만으로는 토종 중 토종으로 오해할 만큼 소박하고 친숙하고 정겨워요. 해방 무렵 널리 퍼졌다 해서 '해방초'라고 불렀답니다. 처음 이 땅에 온 지는 1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늦둥이입니다.
지금부터는 큰달맞이꽃과 달맞이꽃의 공통점.
물가, 길가, 빈터 등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 흔하디 흔합니다. 6월부터 9월까지 노란 꽃이 저녁 무렵부터 피었다가 아침에 붉은빛이 돌면서 시들어요. 각각의 꽃은 단 하룻밤만 피었다 지는 하루살이꽃.
꽃이 피면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던 꽃받침 4개가 짝을 이뤄 젖혀진다. 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일까?
꽃받침은 4개인데, 꽃이 피면 2개씩 합쳐져 뒤로 젖혀져요. 꽃잎은 4개. 끝이 움푹 파여 있습니다. 수술 8개, 암술 1개. 암술머리는 4개로 갈라집니다.
큰달맞이꽃은 암술이 수술보다 길지만, 달맞이꽃은 그 길이가 같다는데요. 이게 꼭 그러한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앞서 큰달맞이꽃 군락으로 '추정되는'이라고 한 게 이 때문입니다. 키도 꽃도 큰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둘 다 작은 꼬마들도 있거든요. 정작 큰 아이들의 암술과 수술의 길이가 같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아이들 꽃 중에 암술이 더 긴 게 있어요. 두 종이 섞여 있으면서 교잡이 이뤄진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 보는 정도로 넘어가고 있답니다.
왜 하필 밤에 꽃을 피우는 걸까요? 이에 대해서는 <골목길 야생화> 46회 '박주가리'편에서 소개했습니다. 요약하면, 수분매개 곤충이 적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쟁자가 적은 밤에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에 성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밤에는 벌과 나비가 거의 활동하지 않아요. 야행성 나방인 박각시류가 이들을 대신합니다. 야행성 곤충이 야행성 꽃들의 중매쟁이인 거죠. 박각시는 전 세계적으로 1,450여 종, 우리나라에도 50종 이상이 있답니다. 하늘타리, 분꽃, 박꽃, 호박꽃이 밤에 피는 꽃들입니다.
그런데 인시류(鱗翅類)에 속하는 이 박각시는 날개가 생선 비늘처럼 빽빽이 겹쳐진 데다 뺀질뺀질해요. 웬만한 꽃가루는 붙기 어려운 구조.
이를 돌파하기 위해 연대 전략을 구사하는데요. 8개의 수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가느다란 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게다가 끈끈합니다. 이를 점사(粘絲)라고 해요. 어느 한쪽이라도 박각시의 몸체나 날개에 붙기만 하면 줄줄이 한꺼번에 딸려갑니다. 이렇게 꽃가루를 붙여간 박각시 덕분에 이웃한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는 수백 개의 꽃가루가 내려앉을 수 있는 겁니다.
8개의 수술에서 나온 끈끈한 꽃가루들이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쪽이라도 박각시의 몸체나 날개에 붙기만 하면 줄줄이 딸려간다.
밤에도 잘 보이는 노란 꽃. 끈끈한 실. 박각시들을 유혹하기 위해 포도주향을 풍기기까지 해요.
열매는 2~3cm 크기 곤봉 모양의 삭과. 겉에 털이 있으며 익으면 4 가닥으로 갈라집니다. 열매 하나에 200개 정도의 작은 씨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열매가 한 포기에 수백 개씩 달리므로 씨앗의 수는 수십만 개에 이릅니다. 단 한 개의 열매에 씨앗 200개! 그 비밀은 끈끈이실로 연결된 꽃가루 덕분이죠.
가을철 땅에 떨어진 수많은 씨앗 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싹을 틔워 자라기 시작해요. 잎이 땅에 바짝 붙어 둥근 방석 모양으로 퍼진 채 겨울을 납니다. 이런 식물을 '로제트(rosette)식물'이라고 하지요. 민들레, 애기똥풀, 냉이, 꽃다지, 봄맞이 등 두해살이풀들은 이렇게 겨울을 납니다.
달맞이꽃은 알록달록한 방석 모양으로 겨울을 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2년생 풀들을 로제트(장미모양)식물이라고 부른다.
달맞이꽃은 유용한 식물입니다. 어린순과 뿌리를 나물로 먹을 수 있고요. 어린잎은 소가 좋아한답니다. 꽃은 튀겨서 먹기도 하고, 효소를 담그기도 한다네요. 꽃잎을 말려 차로 우려내어 마신답니다.
원산지인 남미와 북미의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달맞이꽃을 약으로 사용했답니다.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의사가 바로 인디언 의술로 무장해 복수극을 펼치죠.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달맞이꽃이 각광을 받고 있는 건 씨앗에 불포화 지방산인 리놀산(linoleic acid)과 리노렌산(linolenic acid)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각종 성인병과 여성의 생리통 및 갱년기 증상을 예방하고 완화해 준답니다.
달맞이꽃 씨는 참깨나 들깨처럼 기름으로 짜는데요. 이를 달맞이꽃 종자유, 또는 월견초유(月見草油)라고 해서 시중에 참기름 값의 10배에 이르는 비싼 값으로 팔려요.
콜레스테롤 수치와 혈압을 떨어뜨리고 비만증, 당뇨병에도 좋답니다. 또, 항염증(抗炎症), 소염(消炎) 성분이 들어 있어 피부염이나 종기에 발라 치료한답니다.
한방에서는 ‘월견초(月見草)’, ‘야래향(夜來香)’, ‘월견자(月見子)’라는 이름으로 뿌리와 종자를 약재로 씁니다.
달맞이꽃 학명은 Oenothera biennis. '두해살이 낮잠 식물' 큰달맞이꽃은 Oenothera erythrosepala. '꽃받침이 붉은 낮잠 식물'
달맞이꽃 열매. 하나하나에 씨앗이 200개 정도 들어 있다. 수백 송이 꽃이 피니, 한 포기에 수십만개의 씨앗이 있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 너무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조금 쉬었다 가지요.
이해인 수녀님의 시와 해설.
달맞이꽃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당신의 밝은 빛 남김없이 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렇게 얇은 옷을 입었습니다
해질녘에야 조심스레 문을 여는 나의 길고 긴 침묵은 그대로 나의 노래인 것을
달님
맑고 온유한
당신의 그 빛을 마시고 싶어
당신의 빛깔로 입었습니다
끝없이 차고 기우는 당신의 모습 따라
졌다가 다시 피는 나의 기다림을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솨아 솨아ᆢᆢ
소리 내며 달맞이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송광사 불일암의 달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꽃잎이 얇아 달빛이 잘 스며들듯이 내 마음도 두꺼운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으로 얇은 웃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름다운 순간이었지요. 꽃받침대가 꽃을 받쳐 주기 위해 재빨리 내려앉는 그 모습은 눈물겹도록 신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