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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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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Lee Apr 04. 2020

햇볕 복용

정병일기 3

정병이라도 볕을 보러 나갈 때가 있다. 간만에 마음이 동할 때, 오늘이 그랬다. 역시 선생님 말이 옳았다. 술을 마시고라도 약을 빼먹지 않고 먹는게 중요하다. 그저께는 사발면 사러 코앞에 편의점 가는것도 저주스러웠는데, 오늘은 집에 있을거 다 구비해놓고도 제법 나가보고도 싶은 것이다.


이런 때를 놓치지 않는게 중요하다. 이번주에는 정량만큼 햇볕을 쬐지 못했다. 정병이란건 자꾸 습기가 차는 축축한 속옷 빨래랑 비슷해서 자주 볕에 말려주지 않으면 금새 꺼뭇꺼뭇한 곰팡이가 피고 마는 것이다. 안그래도 매사에 뭐같이 약해져 있는 점막에 곰팡이 핀 속옷까지 입으면 상처나 염증이 도질 수밖에 없다. 일단은 신문에 전문가들도 햇볕을 보는게 중요하댔고 난 그걸 신봉한다. 행여 다시 드러눕고 싶어지기 전에 후다닥 옷을 꿰어입고 맨발에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일부러 그늘을 피해 딛으며 봄볕을 쬔다. 빨래를 말리듯이 마음을 말린다. 썬크림을 바르지 않은 팔을 걷어서 볕을 받는다. 10걸음 걷고 팔을 뒤집어 가며 골고루 굽는다. 물을 마시듯이 피부가 볕을 마시는 상상을 한다. 자외선은 노화를 촉진한다지만 일단 살아있어야 늙어도 늙을 것 아닌가. 동양인은 피부암에 강하다니까 급한건 우선 볕을 마시고 우울한 마음을 살균하는 걸 거다.



10분이나 걸었는데도 기분은 그저 그렇다. 어쩐지 마음이 쉽게 동한다 했다. 하여튼 뭐든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볕을 좀 쬔다고 해서 갑자기 기분이 환장하게 좋아질 리가 없다. 사람들이 왔다갔다해서 어지럽고 살이 따갑다. 방구들이나 짊어지고 있던게 더 평화로울 뻔 했다. 그래도 이럴때 소라게처럼 집구석에 허둥지둥 다시 기어들어가는게 최선은 아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생각보다 흥이 안나도 일단 기어나온 이상 왠만하면 정량만큼 충분한 볕을 복용하고 들어가는게 좋다. 다시 기어나오는데는 대부분 더 많은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하다.



오늘도 역시나 내키지 않았지만 편의점에서 작은 와인 병을 사서 동네 체육공원 벤치에 앉았다. 야외에서 술마시는게 불법이 아닌 나라여서 다행이야. 싸구려 뚜껑을 돌려서 따고 병에 입을 대고 와인을 마신다. 설탕이 든 달달한 맛이다. 병나발을 부는 동안 세발자전거를 타던 여자아이가 세번이나 내 앞을 지나쳐갔다. 윗몸일으키기 기구 쪽에서 태극권을 하는 아저씨는 안보는 척 하면서 나랑 술병이랑 몇번이나 쳐다본다. 이제 엉덩이도 좀 찹찹하고 바람이 점점 세게 불지만 맨발로도 뭐 또 춥지는 않다. 어쨌거나 또 봄인가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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