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삶의 부조리는 항상 우리 곁에 있으나 그것을 알아채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첫 번째로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이 있어야하며, 두 번째로는 알아낸 사실들을 종합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이 모든 것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인생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무대의 티켓을 일단 손에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안진진'은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보기 드문 행운아이다. 지성과 통찰을 겸비했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연극의 맨 앞자리를 미리 예약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연극의 주인공은 바로 안진진의 어머니와 그 쌍둥이 여동생인 이모이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치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처럼 꼭 닮아있지만, 180도 다른 인생을 사는 어머니와 이모의 인생에 대해 안진진은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거두어 버렸다(19)"며 냉소하고 결국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19)"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린다. 그랬던 그녀가 왜 갑자기 25살의 어느 아침에, 어제와 똑같은 그런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만 해. 꼭 그래야만 해!"(17)라고 부르짖어야 했을까.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오래 소식 전해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비망록』)
그 이유는 이렇다. '깨어나 보니' 스물네 살이었고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 시의 화자처럼 안진진 역시 어머니와 이모의 '너무도 다른 삶'을 통찰하는 것에 몰입해버린 나머지 정작 자신의 삶은 방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스물다섯의 어느 아침에 문득 깨어나 '쓰다만 편지'를 다시 쓰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20)"라는 절절한 대사로 시작하는 편지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먼저 아직 끝나지 않은 무대 위의 관객으로서 어머니와 이모의 삶을 끝까지 지켜보아야한다. 쌍둥이로 태어난 어머니의 삶은 그녀에게 더없는 환멸을 가져다주었으나 동시에 그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머니와 이모의 삶만을 관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충실히 관찰하기로 다짐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숙명이다.
여느 일란성 쌍둥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처음에는 너무나도 똑같았다. "얼굴도 같았고, 성격도 같았고, 하다못해 학교 성적까지도 무엇이든 두 사람은 똑같았다. […] 두 사람은 마치 둘로 나누어진 한 사람인양 보였다고 했다."(17) 이토록 비슷했던 두 사람이 달라진 것은 순전히 결혼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이모는 결혼과 동시에 비로소 두 사람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으로 나뉘자마자 이들의 삶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나머지 한 사람은 대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소유하는 것으로 신에게 약속이나 받았던 듯이 그렇게 달라졌다. (18)
그래서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태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원래부터 두 사람의 갈 길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안진진의 이모는 비단 잠옷을 입는'우아한 사모님'으로 어머니는 빗물 새는 단칸방에 사는 '억척스런 아줌마'로 변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진진의 이모는 '행복'이 되었고 어머니는 '불행'이 되었다. 그래서 '불행'의 딸로 태어난 안진진이 종종 이모를 보며 "어머니가 무대 뒤로 뛰어가 금방 비단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행복한 또 다른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일인이역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18)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처음부터 '행복'의 딸로 태어난 사촌 주리는 "쌍둥이 이모에 대해서 한 번도 혼란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18)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불행할 때는 행복을 갈구하지만 행복할 때는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안진진은 주리와 달리 항상 불행의 편에 서서 행복의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녀가 삶에 지쳐 우악스러움이 날로만 더해가는 어머니 대신 예쁘고 부드러운 이모를 더 좋아하는 것도, 어린 시절 양말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부끄러워 대신 세련된 이모를 불러야만 했던 것 역시 삶의 남루함과 지리멸렬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하는 나름의 절박한 몸짓이었다. '어머니는 불행하고 이모는 행복하다'라는 이 단순한 명제는 아직 어린 그녀가 받아들여야 했던 최초의 진리이자 공식이었고 "안타깝게도 불행을 짊어진 쪽에 편입된"(18) 그녀의 삶 역시 꽤 초라하고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대개는 삶이 가난하고 팍팍할수록 불행하고 화려할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혹은 가정의 평화가 개인의 행불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은 인생의 암묵적인 룰이 아니던가. 그러나 안진진이 관찰한 어머니와 이모의 삶은 절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단순하다면 애초부터 그녀가 자신의 생을 걸어서까지 인생을 관찰해야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 더욱 은밀한 행복과 불행의 두 번째 공식이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말해, 안진진은 언제나 이모가 좋았다. 이모는 항상 상냥하고 부드러웠으며, 어머니처럼 삶의 고단함이 얼굴을 할퀼 틈이 없었으므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이모는 안진진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집안의 크고 작은 불행을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안진진의 어머니는 냉소 뒤에 숨겨진 안진진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볼 시간이 없었지만, 이모는 그런 마음을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와 이모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이었던 만우절 날, 안진진은 장미꽃을 들고 자신의 집이 아니라 이모의 집에 선뜻 찾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에 와 있고, 더더욱이 장미꽃을 들고 어머니에게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25),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25)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인 안진진이 이모내외와 도착한 장소는 당연히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 식당”(28)이었다. “예약석으로 자리를 안내하는 웨이터와 달착지근한 향수 냄새,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피아노음, 우아한 선남선녀”(28)들···. 외식이라고는 일 년에 한 두 번 가는 ‘돼지갈비집’이 전부였던 안진진에게 “이모네 외식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28)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화려한 것들을 부러워할 나이는 지나도 한참 지났고, 딱히 주눅이 든 것도 아닌데, 영 “이모와 이모부가 빚어내는 풍경”(29)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항상 가난에 찌들어 있었으면서 그날 하루쯤은 마음대로 세련된 분위기를 즐겨도 좋으련만, 우리의 주인공 안진진은 이 모든 것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루하게 계속되는 식사 도중 틈틈이 주변의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그 많은 테이블마다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평화만이 존재하는지 […] 나지막한 피아노음, 나지막한 피아노음, 나지막한 대화, 나지막한 음성으로 손님을 응대하는 웨이터들, 나는 잠시 잘 관리되고 있는 대형 수족관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에 씹고 있는 고기 맛을 잃을 정도였다.(31)
아이러니하다. 비단잠옷을 입고 사는 이모의 삶은 늘 화려해보이기만 했었는데, 안진진의 눈에 이모는 ‘행복’의 화신이어야만 하는데, 이모 역시 “와인잔 속에 입술을 숨기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는 것”(30)을 보니 전혀 행복해보이지가 않는다. 오직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등장해, 작년과 다름없는 보석을 준비하고, 대본이라도 미리 준비한 듯이 의례적인 매너를 뽐내는”(30-31) 이모부만이 이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안진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모의 행복은 잘 포장된 예쁜 ‘선물 상자’와도 같다는 것을. 선물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뚜껑을 열어보니, 사실 이모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에 안진진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쌍둥이 동생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한 접시 썰고 있을 때에, “양말을 팔고, 메리야스를 팔고, 나중에는 세수수건까지 다 팔았지만 […] 남편이 빼 가고, 아들이 빼 가고, 하다못해 야속한 세상까지도 돈을 빼앗아 가 버린”(39) 비운의 여자였다. 남편의 패악이 더욱 심해지면 질수록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쓴 울음을 삼켜야 했고, 이쪽은 “무소식이 희소식”(121)일 때, 여동생네는 “소식마다가 기쁜 소식”(121)이었으므로 목구멍에서 “너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내게 양보한 대신 알짜만 가득한 행복을 넘겨받은 것이라고”(120)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이 정도면 불행에 넌더리가 나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마치 끈질긴 잡초처럼 절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기나긴 고생의 끝에 동네에서도 가장 작은 집이긴 하지만 드디어 “결혼 생활 이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39) 집을 장만해내고, 이번에는 일본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일본어 첫 걸음』을 열심히 읽으며 ‘까짓것, 하면 하는 거지’라며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58). 안진진은 어머니의 이러한 알 수 없는 속성에 대해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58)
안진진의 어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것일까.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생에, 안진진의 말마따나 “전혀 그럴 말한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그럴 말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행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 온 생애를 걸었다.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오히려 불행이 그녀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행복하고자 하는 끈질긴 ‘생에의 집착’ 때문에 그녀의 삶은 지루할 틈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또 다른 불행이 와도 안진진의 어머니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불행이 와버리면 그것을 과장하는 것이 “불가사의한 활력”(58)과 함께 또 다른 특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불행의 과장법”(140).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139)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여동생이 ‘장미가 가득 핀 정원’에서 지루해하고 있을 때 그녀는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쉭쉭 나는 전쟁터”(31)에서 결코 지루한 법이 없었다고.
에밀리 디킨슨은 그녀의 시에서 “성공은 끝까지 성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장 달콤하게 여겨진다./ 가장 목마르게 열망하는 자가 넥타르의 의미를 아는 것.(에밀리 디킨슨)”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 위해 살지만 불행할수록 행복을 더욱 열망하기에 오히려 행복에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렇게 행복해 보였던 이모와 불행해 보였던 어머니의 위치는 한 순간에 뒤바뀌어 버리고 행복이 불행이 되며 불행이 행복이 된다.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같이 불행과 행복은 하나라는 것, 이분법적인 잣대로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 안진진이 풀어야 될 생의 두 번째 공식이었다.
이모는 행복하고 어머니는 불행한 줄만 알았었는데, 이모가 불행할 수도 어머니가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안진진이 어머니와 이모의 인생이라는 연극을 보며 내린 감상평이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안진진의 목표는 단순히 생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 역시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닌 "온 생애를 다 걸어서" 살아가기로 했던 그녀가 아닌가. 지금 그녀의 삶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두 남자가 있다. 언젠가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지만 "아직 누구를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으며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를 상대해서 사랑의 대활약을 펼칠 만큼 뻔뻔한 여자도 못되기"(60) 때문에 지금 그녀는 고민 중이다. "당분간은 관망"(60)이라는 전략으로 일단 두 남자를 천천히 알아나가기로 한다.
첫 번째 후보는 '나영규'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튀는 물고기처럼 싱싱한"(61) 남자로 번듯한 직장에 "세상살이에 시달린 흔적 없이 또렷하고 맑은"(65) 얼굴을 하고 있는 꽤 괜찮은 남자이다. 그의 데이트 계획은 "하염없이 세밀"(64)해서 안진진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거의 없고 안진진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그의 마음은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방통행"(65)으로서 매순간마다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확실한 남자, 그것이 나영규이다.
그런데 이 남자에겐 문제가 있었다. 바로 "치명적인 결함이 없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67) 그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고, 경치 좋은 곳을 드라이브 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안진진은 그와 있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매우 피곤해지곤 했다. 심지어 "앞으로 영화에 저녁식사까지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이 남자와 더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무 데서나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69)만큼 피곤했다.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여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70)
한 마디로 사랑마저도 '계산'처럼 해버리는 이 남자에겐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것이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분한 남의 집이 묵어가기에는 훨씬 편한 법"(70)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영규의 사랑은 깨끗하고 직선적이지만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임을 안진진은 직감한다.
이렇듯 나영규가 '직선'이라면 두 번째 남자, 김장우는 '희미한 선'이다. "전날에 이미 예매를 해두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진진을 극장 앞으로 데려가지 않는"(96) 나영규와는 달리 이 남자와 함께 하는 데이트는 "점심 먹고 헤매다 가까스로 영화 한 편에 합의 하고, 다시 한참을 헤매서 극장을 찾아내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매진 사례.(96)" 그래서 그들의 데이트는 "걷다 다리가 아프면 커피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만남. 커피를 마시고 나면 더 이상 함께 해야 할 일이 없어 허둥지둥해야 하는 만남"(97)이다. 그런데 나영규의 데이트보다 육체적으로 명백히 '피곤한'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이 어리숙한 남자와의 만남이 안진진은 영 싫지가 않다.
큰들별꽃을 찍느라고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다면서 김장우는 그 사진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나는 김장우의 마음을 눈치챘다.
"큰들별꽃 사진, 나 주세요."
"안진진한테도 이 꽃이 감동을 주었나?"
[…]
김장우는 사진을 봉투 속에 정성스럽게 담아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황망하게 돌렸다. (95)
그랬다. 확실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지만 도리어 꾸밈없고 소탈한 그대로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김장우라는 남자였다. 창창한 미래도, 안정적인 수입도, 그 흔한 데이트 계획도 못 세우는 한심한 남자지만 안진진을 향한 '희미한' 사랑만으로도 마음이 차고 넘치는 ….
보통 여자들이라면 결혼 상대로 누구를 선택했을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외모도, 성격도 꽤 괜찮은 나영규가 훨씬 더 좋은 남자이다. 거기다가 나를 사랑하기까지 한다는데. 반면에 김장우는 수입이 불안정한 사진작가에 솔직하지 못해 나를 사랑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애간장만 태울 뿐이다.
그런데 기억하는가, 앞서 얘기했던 안진진의 이모부,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등장해, 작년과 다름없는 보석을 준비하고, 대본이라도 미리 준비한 듯이 의례적인 매너를 뽐내는” 그 이모부는 나영규와 아주 흡사하다. 머릿속에 이미 십년치의 '인생 계획서'를 미리 넣어 다니고 사는 부류의 사람들. 그래서 너무나 지루한 사람들.
그래서 겉으로 행복해보였던 이모의 삶이 '계획속의 행복'이고, 그리하여 '지루한 불행'임을 알게 된 안진진이 보는 나영규는 이모부의 클론이나 마찬가지이다. "온 생애를 다 걸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했던 그녀였다.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기 때문에 나영규를 선택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앞이 뻔히 보이는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김장우인데, 김장우에 대해서는 조금 더 할 말이 많아질 것 같다.
김장우를 말하기 위해 먼저 안진진의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안진진의 아버지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어렵다. 다음의 노래가사가 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법자여, 이제 정신을 좀 차려요/오랜 시간 방황했잖아요/ 당신은 대하기 힘든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에요 […]지금 좋은 패들이 당신 앞에 깔려 있는 것 같지만 당신은 언제나 가질 수 없는 것만 원하네요
(이글스 -『Desprado』)
안진진의 아버지는 무법자이다, "누구는 술꾼이라 불렀고, 누구는 또 건달이라고 칭하였으며 혹자는 가끔 성격 파탄자로"(75)불릴 정도로 안진진의 가정에 고통만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그러나 안진진만은 "아버지는 타인에 의해 한 번도 정확히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74)였다고 아버지 속의 알 수 없는 '모순'을 이해하려 한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술과 도박으로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기 일쑤인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였지만, "누구나 다 똑같이 살 필요는 없는거야. 그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야. 알겠니?"(82)라고 거듭 묻는 아버지에게서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약하디 약한 '남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진진은 아버지를 미워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촌 주리가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깨닫게 된다. 정원 속에서 곱게 자라 안진진의 "온 생을 탐구"하는 고뇌 따위는 알 리 없는 '온실 속의 화초'인 주리는 약간의 말싸움 뒤에 결국 안진진에게 "넌, 너희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봐. 이해해. 니네 아버지가 결국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161)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때에 안진진이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분노'였다.
행복이니, 불행 같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따지는 주리의 생각, 아버지는 가족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악'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그 생각, 그 '오만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도도한' 생각은 안진진의 가슴을 콱 짓눌러버린다. 그런 주리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안진진.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 […]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이 한평생 살고도 못 가르쳐 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해줘야할 모든 의무를 다했어." (161)
"아버지는 내 인생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었어. 난 아버지를 사랑해" (162)
안진진은 단순히 아버지를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옹호함으로써, 불행만이 가득한 어머니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다른 아버지들이 한평생 살고도 못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모든 패악이었으나, 그것 덕분에 안진진의 삶은 '지루'하지 않았고 '풍요'로웠다. 불행스런 삶을 뒤집어보니 꽤 괜찮은 삶이었다는 것, 안진진은 지금 아버지를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다시 김장우로 돌아가보자. 이러니저러니 하는 사이에, 안진진은 어느새 나영규에게는 '없는' 김장우의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무언가'는 안진진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산 속에서 작은 꽃을 마주치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 사업으로 힘들어하는 형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줘버리는 사람, "인생은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라고 말할 정도로 인생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 나영규와 이모부가 꼭 닮아있었다면 그렇게 김장우는 아버지와 꼭 닮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진진이 김장우를 사랑하게 된 것은 '숙명'이라면 '숙명'이었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것처럼,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김장우를 사랑하는 것은 모순으로 점철된 그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고 그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서서히,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하기로, 그를 택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안진진의 고민도 이제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알 수 없었던 인생의 모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남은 것은 김장우와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안진진의 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린다. "한 달의 휴직을 마치고 복직한지 꼭 열흘 만에 그 일이 일어났다."(258) 오후 세 시의 나른한 오후, 이모가 보낸 소포, 안진진은 의심 없이 이모가 또 "어떤 아름다운 음모"(259) 꾸몄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모의 '유언장'이었다.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늦게도 내가 오지 마."(262)로 끝나는 그런 편지.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에서 평온하게 말고."(261)
이모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지루함' 때문이었다. 무덤 속의 평온함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불쌍한 이모, 언제나 상냥했던 고운 이모의 죽음을 안진진은 “이모 같은 사람이 뿌리 내리며 살기론 이 세상이 너무 얇았던 것”(265)라고 말하고 있다.
그 뒤로, 충격적인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세월은 흘렀고 살아있는 사람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 되었고"(268)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
한 몸과도 같은 동생의 죽음에 한없이 슬퍼했지만 또 다시 잡초같이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 어머니, 평생을 방황하다 반신불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무법자 아버지, 상처 입었으나 여전히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살아가는 이모부, 외국인 교수와 결혼한 주리….
하지만 안진진은 조금 변했다. 스물다섯 살의 어느 아침, 온 생애를 다 걸어 살아나가기로 한 지도 벌써 일 년, 안진진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와 결혼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모는 안진진에게 "무덤 속에서 평온하게"사는 나머지 죽음을 선택했고, 그 절절한 유언장을 받은 것은 바로 그녀였건만,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옮은 것"(272)이었다. 그런데 안진진은 반대의 선택을 해버린 것이다. 불행이 행복이고, 행복이 불행 같은 것을 알았고, 그것이 인생의 비밀이라 믿었지만 이모의 죽음 앞에서 다시 한 번 인생이라는 모순 속의 모순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273)을 위해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고 삶의 모순에 자신을 내던지기로 결심한다. 나영규와 결혼하면 '이모처럼'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짜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김장우를 선택하더라도 '어머니'처럼 살게 될 수도 있다.
'어머니처럼' 산다는 것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고 어머니 자신에게는 '불행속의 활기', 그러나 결국 어린 안진진의 눈에는 또 '불행'이기도 했었다.
진실은, 이런 공방은 끝이 없는 이야기이라는 것이다. 나영규를 선택하든, 김장우를 선택하든, 행복할지 불행할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모순을 잠깐 엿보긴 했으나, 이모의 갑작스런 죽음처럼 인생의 '가변성'앞에서는 그 누구도 알량한 통찰력으로 '오만'하거나 '도도'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진진은 나영규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모처럼 행복하면서 '불행'할지, 혹은 '불행'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행복'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그것을 알고 싶어서 이모가 가르쳐준 교훈을 뒤집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순 속에서도 이것 하나 만은 확실하다. 안진진은 일 년 만에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다. 비록 이모는 죽었고, 김장우와는 이별했지만 이제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직접 '선택'하며 살아나갈 것이다.
일 년 전의 그녀가 조숙한 '관찰자'였다면 이제는 성숙한 '탐구자'로서 자신의 인생을 "온 생애를 다 걸고" 살아나갈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선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가끔씩은 죽은 이모를 생각하며 눈물짓겠지만, 가끔씩은 또 웃기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