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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가시의 정체

조예은 <초대> 독후감

by 클로이


한국 소설을 웬만하면 잘 읽지 않는데, 우연한 계기에 직장에서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라는 힙한 제목의 책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


2020년 소설이니, 출판된 지 꽤 되었다.


단편집에 나오는 몇 개의 소설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소설에 나오는 키워드 자체는 '좀비', '스토커', '살인', '뱀' 등으로 좀 기괴하고 판타지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건, 겉포장지이고 속 내용은 여성들이 겪는 내면의 문제라든가, 가족에 대한 애증이라든가 너무나 공감이 가는 소재여서 그 간극과 괴리감이 너무 매력이 있었다.


조금 결은 다르지만 카프카의 단편과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든다. 개인의 트라우마를 그로테스크한 소재로 짧고 긴장감 있게, 극적으로 풀어내는 점이 닮아있고 초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칵테일, 러브, 좀비] 안에서 특히 재미있었던 이야기 <칵테일, 러브, 좀비>와 <초대>였다. <칵테일, 러브, 좀비>는 전형적인 경상도 k-가정의 호러 버전을 보는듯해서 드라마 보듯 재밌게 읽었고, <초대>는 읽으면서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시'의 감각을 감각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13살 때 어른들이 주는 '회'를 '억지로' 받아먹다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다. 그러나 그 생선가시는 유형의 가시가 아니다. 왜냐하면 병원에 가서 카메라로 목을 샅샅이 들여다봐도 가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른들이나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주인공의 목에 박힌 가시는 단순한 가시가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받고 감정을 인정받지 못하는 답답함과 무력감이라고 여겨졌다.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내 목에 박힌 가시도 꿈틀거리는 듯했다.


<살던 동네와 가까운 대도시의 대학에 들어갔다. 전공은 조소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손에 쥘 수 있는 날카로운 도구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 도구들의 뾰족한 끝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한 치의 흠집도 없이 높인 푸딩이나, 고운 두부를 마구 뭉개고 싶어지는 충동과 닮았다. 가끔은 그것으로 내 턱 끝에서 쇄골까지를 주욱 갈라 버리고 싶기도 했다. 갈라져 벌어진 양 살을 당기면 그 안에서, 날 7년 동안 괴롭힌 가시가 툭 떨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뾰족한 도구로 자신의 턱을 가르고 싶다는 다소 과격한 구절도 징그럽기보다는 자기혐오와 해방을 원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가시'는 누가 넣은 것일까?


가시가 목에 걸린 주인공은 대학에 가서 '정현'이라는 남자를 사귄다. 말이 남자친구지, 조금 찝찝한 남자다. 주인공의 옷차림이나 몸매를 교묘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다. 여자친구를 좋아한다기보다, 마치 음식을 입맛에 맞게 양념을 쳐서 먹듯이, 여자를 도구로 보는 남자다.


그의 교묘하고 못된 심성을 점점 느끼던 주인공 채원은 그에게서 점점 정을 뗀다. 그러던 중, '태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와 썸을 타는 듯한 정황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태주'라는 여사친이 본인과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원은 술을 먹고 찾아온 남자친구 '정현'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를 밀쳐내고 도망가던 와중 얼굴이 없는 여자의 환각을 보고 쓰러진다.


남자친구 '정현'이 등장하면서, 내 목에 박힌 가시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이 되었다.


20대 중반 사귀었던 남자는 꼭 정현처럼 내 몸에 대해 지적했다. 내 팔을 보면서, 살을 조금만 더 빼면 뭐를 사주겠다는 등, 어디든 괜찮은데 어디는 빼야 한다는 등, 옷이 이상하다는 등, 가끔씩 내뱉는 말과 눈빛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사실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은 오장육부로 알고 있었다.


여자를 때린다던가 돈을 빼앗는 류의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말이 무의식적으로 툭툭-나오는 것이다. 그때까지 짧은 연애만을 했다더니, 예상대로 나와도 짧게 연애하고 헤어졌다. 마치 음식을 입맛에 맞게 양념을 치고 다 뱉은 생선 뼈를 그릇에 버리듯이, 그는 떠나갔다. 상대방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고 본인의 입맛대로 행동하면 사랑해 주고, 아니면 나를 평가하는 남자. 자기 자신의 감정과 남한테 얻어 낼 것만 생각하는 인간. 인간 같지 않은 인간.


채원이 날 생선에 비위가 상해 입에 대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비위가 상했다. 그때부터 목에 가시가 걸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채원처럼 그전부터 목에 가시가 걸려있었다.


싫어하는 회를 억지로 먹인 '어른들'에서 어릴 때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났다.


가시는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채원은 전 남자 친구의 썸녀로 추정되는 '이태주'라는 여자가 운영하는 듯한 리조트로 발걸음을 향한다. 사실, 정현과는 진작에 정이 떨어져 헤어졌고 굳이 이태주에 대해 파헤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채원은 뭐에 홀린 듯이 그 미스터리 한 여자가 남긴 증거를 쫓아 그녀의 초대를 받아들인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초대였다. 이 방문은 허락받은 것이다. 나는 큰 보폭으로 리조트를 향해 뛰었다. 로비는 어두웠고,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달렸다.


여기서부터 소설의 긴장감이 클라이맥스로 치솟았다. 이태주의 정체는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연쇄 살인마이다. 인간 같지 않은 전 남자 친구 '정현'은 마치 채원이 어릴 때 보던 횟감처럼 결박된 채 채원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한다.


여기서 보통은 어떻게 했을까? 전남자친구를 그래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죽을죄를 지은건 아니니깐 말이다. 그리고 갑자기 연쇄살인마가 채원의 입을 벌리고 가시를 꺼낸다. 처음부터 가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주가 그녀의 가시를 꺼낸 순간, 둘은 공범이 되었다. 아니, 공범이 아니라 함께 큰일을 치른 전우이자 동지가 되었다.


채원은 정현을 단숨에 죽여버린다. 마치, 그녀의 의무인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시 내 차 안에 있었다. 얼굴은 꼭 누가 닦아 준 것처럼 깨끗했고, 기분은 상쾌했다. 주차장에 내 것 이외의 차는 없었다. 고개를 들자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보았다. 검고 검은 구멍과 붉은 내부. 이물감은 없었다. 그 큰 가시가 빠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소설의 결말이 단숨에 읽어버린 뒤, 나는 마치 내 목의 가시가 빠진 것처럼 온몸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책을 다 읽은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정현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죽을죄는 아니니깐,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채원이 리조트를 향해 뛰어갈 때부터, 나는 그녀의 편이었다. 정현이 결박되어 몸부림치는 장면에서도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때부터 채원이 정현을 죽일 것을 직감했다.


정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오랜 트라우마와의 결별이다.


스스로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한 것.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방어하지 못한 것.

그런 자기 자신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자기혐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스스로 벗어났을 때의 짜릿한 쾌감.


짧은 소설을 통해 트라우마를 벗어난 내 모습을 잠시 체험한 것 같았다. 비록 '살인'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었을지라도 문학의 힘을 오랜만에 느꼈다.


가시는 아직 내 안에 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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