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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Jun 19. 2021

흔한 사가(佐賀), 야나가와(柳川) 여행기 [完]

시간을 잘 확인합시다

저는 평소에 술을 잘 즐기지 않습니다. 한두 잔 마시면 새빨개지는 몸뚱이를 물려받은지라 과음을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일본에만 오면 제 기준으로는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게 됩니다. 유우다이 군과의 새벽 대작(對酌) 탓에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체크아웃을 하러 가니 아직 퇴근하지 않은 유우다이 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SNS를 교환합니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섭니다.


마지막 점심 식사는 아무래도 사가 현의 향토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구글 맵스와 타베로그를 뒤져보겠습니다만 어제 생긴 친구가 등 뒤에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입구에서 한두 발짝 디뎠을까요? 이내 뒤로 돌아 게스트하우스로 재입장합니다. 뭐 놓고 간 게 있냐는 유우다이 군의 질문, 다른 건 아니고 식사할 만한 곳을 찾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유우다이 군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음식을 추천합니다. 시시리안 라이스(シシリアンライス). 라이스가 밥인 건 알겠습니다. 앞에 시시리안은 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습니다. 처음 들어본다고 말해주니 유우다이 군이 설명을 해 줍니다. 얇게 썰은 소고기에 날계란 혹은 온센다마고가 들어가고 각종 야채와 마요네즈를 곁들인답니다. 묘사해준 대로라면 아무래도 건강한 규동 같은 음식인가 봅니다. 맛있겠다고 답하니 잘 됐다며 유우다이 군이 근처에 시시리안 라이스를 파는 가게도 몇 군데 집어줍니다. 이제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갈 길 갑니다.


유우다이 군이 알려준 곳들 중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택해서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여기가 맞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카페였거든요. 일본 카페는 커피뿐 아니라 파스타나 카레 등 간단하게 식사 메뉴를 파는 곳도 흔합니다. 우리나라의 카페와는 다른 점이지요. 작은 차이지만 재미있습니다. 저는 시시리안 라이스와 커피가 함께 나오는 세트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일본이니 셑토(セット) 메뉴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시시리안 라이스(シシリアンライス)


서툰 생존 일본어로 주문을 하다 보니 사장님께서 저의 출신지가 궁금한 모양입니다. 영어로 제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봅니다. 사가 현이 아무래도 후쿠오카나 도쿄, 오사카 같은 대도시는 아니어서 그럴까요? 이방인의 등장이 신기한가 봅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자 다음 질문이 재밌습니다.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보통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면 다음으로 이어질 대화 전개는 대충 정해져 있습니다. 


1. 서울 출신인지 부산 출신인지 물어봅니다.

2. 자기는 서울 혹은 부산에 갔다 왔다고 사진을 보여줍니다.

3. 자신이 들어본 K-pop이나 시청했던 드라마 목록을 불러줍니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는지 묻는 건 굉장히 신선합니다. 2015년 12월에 병장 만기 전역을 했다고 알려줍니다. 한국 군대에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봅니다. 복무기간은? 21개월 있었습니다. 복무지는? 강원도 고성이었습니다. 복무지는 선택할 수도 있나요? 아니요, 못합니다. 구글 지도를 켜서 고성의 위치를 알려주니 여기는 북한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한국에서도 잘 알아주지 않던 제 군복무지의 위험성을 여기서 알아줄 줄은 몰랐습니다. 은근히 밀려오는 감동! 여기로 고르길 잘했습니다.


말도 좀 텄겠다, 시시리안 라이스에 대해 궁금했던 걸 좀 물어보기로 합니다. 우선 시시리안의 뜻부터 물어봅니다. 시시리안은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Sicilia)의 일본식 발음이라고 합니다. 직역하자면 시칠리아의 밥이라는 뜻이고요. 이 메뉴를 왜 시시리안 라이스라고 부르는지도 물어봤지만 그 유래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정작 시칠리아에서는 시시리안 라이스라는 음식이 없다고 합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일본에는 사파(?) 음식이 참 많습니다. 어딘가의 지명을 따서 만든 음식이지만 정작 해당 지역에는 없는 음식, 아마도 오키나와의 타코 라이스나 일본 전역에서 판매하고 있는 나폴리탄 같은 건가 봅니다. 세계 각지의 음식에 일본풍의 무언가를 가미하여 만든 메뉴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힘이라면 힘이겠습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


적당히 쌉싸름하고 부드러운, 제가 생각하는 전형적 일본식 드립 커피가 나왔습니다. 평소엔 즐겨먹지 않는 스타일의 커피지만 식후의 입가심으로는 제격입니다. 홀짝이고 있으니 사장님이 다시 말을 건넵니다. 사가에는 언제 왔고 언제 떠날 예정이냐고요. 이제야 약간 평범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3일 전에 왔고 오늘이 떠나는 날이라 답하자 무척 아쉬워합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자기네 집에서 재워주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약간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던 건지 사장님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 어제 재워준 중국인이 해주었다는 음식을 보여줍니다. 에어비앤비에 등록한 것이냐 물어보니 아니랍니다. 저 같은 손님에게 권한다고 하네요. 여행자가 해주는 로컬 푸드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숙박비를 대신한다네요. 아무래도 음식 파는 카페 사장님이다 보니 각 나라의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최근에 불고기가 궁금하셨다고 하니 제가 떠나는 게 아쉬울 법도 합니다. 제가 요리를 좀 한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아신 건지. 또 딸아이가 한국 대중가요를 좋아한다면서 어떤 보이그룹 포스터를 방 안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여줍니다. 내가 남자이다 보니 보이그룹은 전혀 모른다고 알려주니 웃으며 당연한 걸 물었다고 미안하답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커피를 다 마셨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사가를 들려달라며 배웅을 해 주었습니다.


첫날 마셨던 나마자케를 구매하러 갑니다. 명함과 함께 찾아간 곳엔 다양한 사케들과 양주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노맘바! 맥주도 있을까 찾아봤지만 병이나 캔으로는 잘 팔지 않는 모양입니다. 돈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 됐습니다. 예정대로 텐잔(天山)의 나마자케(生酒)와 산토리(SUNTORY)에서 나온 살구주 한 병을 사서 나옵니다.


더 이상 할 것도 없겠다, 비행기 시간도 다가오겠다, 슬슬 공항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언제부터 체크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E티켓을 확인하는데 아뿔싸, 15시 출발이 아니라 5시 출발입니다. 시간을 대충 본 저의 잘못입니다만 저가 티켓을 구매한지라 오후 5시 출발 같은 좋은 시간대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말 급하게 여행을 왔더니 조사한 것도 딱히 없고, 길 뻗은 대로 발 닿는 대로 산책을 하기로 합니다.


날씨가 화창하였습니다


대충 구글 맵에 삼십 분 조금 넘는 거리의 빵집을 찍어두고 노래를 들으며 걸었습니다. 동네 산책하는 기분입니다. 과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땐 머리 식힐 겸 안양천을 걷곤 했습니다.


왜가리


왜가리까지 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안양천 맞는 거 같습니다. 확실히 BGM은 사람의 인식에 큰 영향을 줍니다. 같은 등굣길이라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뭐였는지에 따라서 달라 보이듯이, 매일 틀어놓던 한국 노래를 들으며 사가를 걸으니 처음 와 보는 길이라도 익숙한 길 같습니다. 일상을 뮤직비디오처럼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춤". 리듬에 맞춰 머릿속으로 콘티를 구상합니다. M/V의 좋은 점은 시나리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일단 가사에 맞추면 기본은 하거든요. 이 부분은 발과 다리를 클로즈업해서 찍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노래가 끝나 버립니다. 핸드폰을 꺼내 이전 곡 재생 버튼을 누르려다 이내 포기합니다. 저작권 때문에 돈이 될 것 같진 않거든요.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재밌어 보이면 일단 노력을 쏟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손익을 따집니다. 아마도 <대학내일>에 칼럼을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아본 것이 시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순서가 잘못된 거지요. 일단 뭘 보여줘야 보상이 오는데, 보상을 보장받은 상태에서만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정작 실력은 없는데 말이지요. 우매함의 봉우리 위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합니다.



노래 중간중간 뚫고 나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걷습니다. 10월 말의 날씨는 산책하기엔 최고입니다.



미술 시간이었나, 소실점에 대해 처음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원근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 원리보다는 소실점의 예시를 들기 위해 보여준 사진과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소실점이 있는 구도의 사진을 좋아했습니다. 중간에 가로막힌 것 없이 쭉 뻗은 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시시리안 라이스를 먹은 지 2시간이 좀 넘었는데, 그동안 계속 걸었더니 배도 다시 뻥 뚫린 기분입니다. 이제 좀 쉴까?라는 생각이 들 즈음 네비에 찍어둔 빵집에 도착합니다.

 

1954 kusukusu


1954년에 개업해서 1954인지는 모르겠지만 빵집 스케일이 좀 큽니다. 생각했던 빵집은 야나가와에서 들렸던 구멍가게 정도의 사이즈였는데, 여긴 빵 공장급입니다. 진동하는 버터 냄새, 참을 수 없습니다. 바로 입장합니다. 


웅장

내부는 정말 본격적인 빵 직판장입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빵이 한 장소에 모여있는 건 처음 봤습니다. 흡사 노량진 수산시장을 연상케 합니다. 시간이 뜬 게 오히려 행운입니다. 이런 구경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빵들

제과류부터 제빵류까지 다양합니다.


자투리 빵도 알뜰하게 팔고 있습니다


빵을 재단하고 남은 부스러기 반죽도 구워서 팔고 있습니다. 하나에 1.9엔 ~ 2.1엔. 어차피 버려야 할 부산물들을 상품화한 모습이 재밌습니다. 한 조각에 20원이라는 것은 충격적이고요.


돌화덕


평범한 오븐 대신 화덕에서 빵을 굽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빵이 많아도 금세 다 팔리는지 오후 2시가 넘어서도 계속 반죽하고 굽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구경하고 있으면 샘플 빵을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이마트 시식 코너보다 더합니다. 밥 안 먹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반죽


빵뿐만이 아니라 베이컨도 팔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모든 부재료들도 직접 생산하는 걸까요? 몇몇 빵을 구매하여 야외 자리에서 먹고 가기로 합니다.


크루아상과 응애 크루아상(좌), 내상(우)

크루아상의 핵심은 벌집 같은 내상입니다만 썩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가운데가 약간 떡진 것처럼 보이네요. 가격 생각해보면 디스 할 수는 없고요. 작은 크루아상은 무척 귀엽습니다. 그래도 버터 들어간 빵은 일단 맛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바닐라 밀크셰이크


그냥 먹기엔 목이 막혀 바닐라 밀크셰이크도 주문했습니다. 꾸덕하니 감자튀김 생각이 절로 납니다. 


멜론빵


멜론빵입니다. 포슬포슬한 소보루 부분과 쫄깃한 내부의 밸런스가 좋았습니다. 


공원 뷰


매장 앞에 마련된 나무 벤치에 앉아서 먹었습니다. 앞의 공원은 빵 맛을 더욱 돋워줍니다. 선선한 바람과 따듯한 햇살. 늦여름을 한껏 맛봅니다.

무슨 치즈빵


정확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빵. 안에 치즈 들어있는 줄 모르고 샀습니다. 저는 치즈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레빵

베스트를 꼽으라면 이 카레빵입니다. 고로케 안에 카레를 넣었습니다.


건더기 튼실


고기가 큼직큼직 들어가 있어 씹는 맛이 있습니다. 푹 끓였는지 당근과 감자는 녹습니다. 진한 일본식 카레와 기름기 있는 고로케는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훌륭한 빵입니다.


취급하는 빵이 다양한 만큼 메뉴 하나하나에 품을 들이기엔 어려웠던 걸까요? 퀄리티는 평범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습니다. 가게의 콘셉트나 규모에 비해서는 아쉬웠지만 '아 거기 맛없어, 가지 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는 길이 좋아서 산책의 반환 지점으로 삼기 딱 좋습니다.


벤치에서 공원 구경하며 노래를 들었습니다. 빵을 다 먹고 구경만 하던 공원 산책도 했습니다. 이제는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오다 찍었다


다른 산책로를 선택해 사가 역으로 갑니다. 같은 길은 재미없으니까요. 이름 모를 건물을 지납니다. 3시쯤 사가 역에 도착합니다. 공항에 가는 버스를 탑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는 출발 30분 전에도 느긋하지만 국제선, 특히 귀국 비행기를 탈 때에는 출발 2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시간이 넉넉하니까요. 비행기 이착륙 구경도 재미있습니다.


비행기


시간은 이제 5시, 비행기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귀국


3일 전, 사가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노을이 지는 시간대였습니다. 그때의 노을은 어두운 분위기였는데, 지금의 노을은 다릅니다. 분명 같은 노을일 텐데, 따듯했던 사가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듯 밝게 타오르는 태양입니다. 비행기가 뜹니다.


구름을 지납니다
노을


집에 도착합니다. 내일이면 다시 학교와 과제의 늪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달갑진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할 건 하고 살아야지요. 답답하면 사 온 술 마시면 되겠죠. 여행이나 술이나 자주 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데, 여행 가서 산 술 마시면 기운 좀 안 나겠습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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