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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May 25. 2021

흔한 사가(佐賀), 야나가와(柳川) 여행기 [3]

나 혹시 돼지일지도

일찍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개운하지는 않은, 조금은 더 눈을 붙이고 싶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어제 저녁에 조식을 주문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충 맨투맨만 걸쳐 입고 1층으로 내려갑니다. 잘 잤는지, 밤새 춥진 않았는지 물어보는 유키 상. 저와는 금전으로 이어진 주인과 손님 관계이지만 어제 유키 상이 베풀어 준 친절 때문인지 괜히 더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눈을 비비고 있으니 곧 아침이 준비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창 밖을 보니 밤새 비가 내린 모양입니다. 따스한 아침햇살과 함께하는 낭만 있는 야외 식사의 꿈은 산산조각 났지만 괜찮습니다. 비 온 뒤의 차분한 풍경도 운치 있거든요.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찍으면 캔버스화 같은 느낌이 납니다


곧 아침 식사가 나왔습니다.


밥상


밥, 국, 반찬 순서대로 탁자에 올려집니다. 다 준비된 거면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식사를 시작하고 싶습니다만 부엌 쪽에서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합니다. "유키 상, 혹시 다 나온 건가요?" 유키 상이 고개를 들고 답합니다. "미안하다, 조식이 300円이라 이 정도가 전부다." 아무래도 제 질문의 의도가 약간 왜곡되어 전달된 것 같습니다. '애걔, 이게 전부야?'가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단지 내가 기록을 남기는 걸 좋아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300円의 가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걸 영어로 말하려는데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질 않습니다. 뇌가 탄수화물 주유를 안 해줘서 삐졌는지 아침이라 몽롱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5초 남짓의 침묵 끝에 오해를 풀기 위해 발음을 굴렸습니다. 결과는 좋게 끝났지만 왜 대화만 하면 사소한 오해가 하나둘 생기는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소박한 메뉴 구성이 아침 식사로는 제격입니다. 밥에는 김가루가 소복이 뿌려져 있습니다. 미소시루가 국으로 준비되었습니다. 한국도 주방의 권력자(주로 엄마)의 스타일대로 된장국이 다르듯이 일본도 각 가정마다 미소시루에 넣는 재료가 다릅니다. 한국 된장국과 가장 큰 차이점은 아부라아게(あぶらあげ, 유부)의 유무입니다. 반찬으로는 락교, 우메보시(梅干し, 매실 절임), 멸치가 나왔습니다. 우메보시만 빼놓으면 우리나라에서도 나올 법한 반찬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메보시가 있어서 일본식 아침밥상이 됐습니다. 비슷한 듯 다른 한국과 일본의 식생활입니다. 둘 다 입에 잘 맞는 건 공통점입니다. 젓가락으로 싹싹 비웠습니다. 물로 대충 헹궈도 설거지 끝나도록 했습니다.


음식의 형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빈 그릇을 보고 유키 상이 놀랐습니다. 혹시 모자랐던 거냐고 물어보지만 맛있어서 다 먹었다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웃으며 조금만 기다리면 차(茶)를 준비해주겠다고 합니다. 창 밖을 보며 오늘의 계획을 생각합니다.



잠시 뒤에 차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오챠(お茶, 녹차)이겠거니 하고 따랐는데 어째 색이 좀 다릅니다. 마셔보니 따스하니 으슬으슬한 아침 공기에 식은 몸을 데워줍니다. 엄청 친숙한 맛이 납니다. 뇌리에 불현듯 영상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모니카 주전자, 델몬트 유리병, 락앤락 물통.. 이건 분명 '보리차'입니다. 일본 와서 말차, 녹차, 우롱차, 호지차 등 차나무 잎으로 만든 건 다양하게 마셔봤는데 곡물차는 처음입니다. 헌데 마셔왔던 보리차와는 약간 다른 것이 굉장히 진합니다. 따듯하게 마셔서 그런 건지 혹은 아예 보리차가 아닌 건지 궁금해집니다. 유키 상에게 물어보니 '무기 차'라고 답합니다. 무기라, Weapon을 말하는 게 아닌 건 확실한데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무기가 뭔지 재차 질문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 말을 내뱉을 듯 말 듯 숨을 들이쉬다 결국 핸드폰을 켜고 사진을 보여줍니다. EastWest F&B가 떠오르는 것이 제가 아는 그 보리차가 확실합니다.


날은 아직 흐려 약간 손이 시렵습니다. 레쓰비는 아니더라도 데워진 찻잔을 붙들고 있으니 좀 낫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는 건지 유키 상이 혹시 춥냐고 물어봅니다. 몇 안되게 알고 있는 일본어 문장을 사용해보며 답했습니다. "조또 사무이데스네.(약간 춥네요)" 그러자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전통 옷 같은 걸 입어보라고 꺼내 줍니다. 입어보니 가벼운데 따듯합니다. 차를 다 마셔갈 무렵, 유키 상이 혹시 오늘의 계획이 뭔지 물어봅니다. 아직 정한 건 없습니다. 빌려 입은 옷이 간단히 걸치기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별 뜻 없이 마음속에 떠오른 대로 대답합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맘에 들어서 구경하려고 합니다."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유키 상, 이윽고 의외의 제안을 건넵니다. 바로 지쿠고(筑後) 투어! 어제 한 손님이 일본 전통 직물의 염색을 보고 신기해하셨는데 마침 저는 전통 옷을 구경하고 싶어 하니 자신이 아는 곳으로 유키 상이 데려다줄 수 있다는 겁니다. 뜻밖의 행운입니다. 몇 시 출발 예정인지를 물어봅니다. 11시, 이제 9시이니 여유가 있습니다. 씻고 체크아웃 겸 나갈 준비를 위해 짐을 다 싸고 나왔습니다. 밥을 먹었던 탁자에 앉아 에세이를 썼던 노트에 이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래도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새 비가 그쳤습니다. 산책하며 동네 구경을 하기로 합니다.


뱃놀이


맑게 개인 공기는 시원했습니다. 어제 비를 맞으며 봤던 수로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찍고 있는데 노래도 부르는  같습니다. 아직은 뭐라 하는지   들립니다. 배가 가까워져 옵니다. 이제 무슨 노래인지  들립니다.


나ㄴ 이ㅈ ㅈㅊㅇ요 해허~ 기ㄷ리ㄷ ㅈㅊ어요 때벌 호하서는 이아이 너ㅁ너ㅁ 추워요~


어라, 정확하게 무슨 가사인지는 모르겠는데 페이드 인으로 꽂히는 멜로디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더 귀를 기울여봅니다.


당신은 못 울리는 땡벌(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오-오-!!


땡벌이 왜 여기서 나와


사진을 찍고 있던 다리 밑으로 나룻배와 트로트 군단이 지나갔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단체관광 온 어르신들 같습니다. 어쩐지 형형색색의 등산복이다 했습니다. 역시 관광버스에까지 태진미디어 설치해두며 다져진 내공은 어디 안 갑니다. 음주가무의 민족을 말릴 수는 없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나룻배 드라이버 분도 같이 부르는 게 참.. K-pop의 미래는 트로트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재미있던 이벤트(?)가 끝났습니다. 다시 걷습니다. 어제 니시테쓰야나가와에서 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가 보기로 합니다.

맹그로브를 연상케 합니다


11시가 가까워져 와 동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밥 먹을 땐 몰랐는데 산책하고 돌아와 정신이 말똥해졌는지 카운터에 있는 장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도 할로윈


사이폰도 있는 걸 이제야 봤습니다. 알았더라면 커피 한 잔도 부탁했을 텐데요. 아쉽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어제 장어집으로 데려다줬던 그 차에 먼저 타 있으라고 유키 상이 말합니다. 오늘 같이 갈 손님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조수석 문을 열었습, 앗, 일본 차는 오른쪽이 운전석인 걸 깜빡했습니다. 다시 반대편으로 가 문을 열고 탔습니다. 이내 유키 상이 탑승합니다. 뒤이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뒷자리에 올라탑니다. 시동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합니다.


유키 상이 액셀을 밟으며 오늘 지쿠고(筑後) 투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아침에 빌려 입었던 옷은 한텐(半纏)이라는 전통 옷이며 지금 가는 곳은 지쿠고 옆의 도시 야매 시(八女市)에 있는 굉장히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생활용품점이라고 합니다. 전통 방식으로 염색한 직물로 만든 상품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한텐도요. 설명을 마치자 다른 손님과 저를 인사시켜 줍니다. 영어가 들려오는 걸 보니 영미권 사람일까요? 뒷자리를 돌아보니 역시나 서양에서 온 여자분이 계십니다. 고개를 숙이려다 악수로 변경합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딘가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이후로부터는 간단한 호구조사 시간입니다. 이름은? 직업은? 학생이라면 전공은? 인구주택 총조사를 마치니 몇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생물공학 전공이었다는 겁니다. 화학이 싫어 도망친 저에게는 상당히 멋져 보이던 그녀였습니다. 한국, 일본, 북유럽 어딘가의 삼국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외관


오래된 건물의 느낌이 나면서도 외관은 리모델링을 했는지 말끔합니다. 건물 이름은 뭐였는지 물어보니 구테라사키 저택(旧寺崎邸)이라고 합니다. 기왓장과 목조가 우리나와 비슷하면서도 일본의 색을 확실히 띠고 있습니다. 북유럽 그녀를 먼저 들여보내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커피 냄새가 풍겨옵니다. 동네 소문난 커피 덕후인 저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프루티한 뉘앙스가 코를 찌르는 걸 보니 분명 에티오피아 커피, 혹은 에티오피아 원두가 섞여있는 블랜드입니다. 아직 과일의 향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콩자반 같은 강배전은 아닙니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역시나 에티오피아 싱글 오리진 원두가 맞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마시고 싶지만 천을 취급하는 가게이므로 잠시 참기로 합니다.


먼저 들어가 있던 유키 상은 이 매장에 여러 번 방문했던 것인지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매장으로 들어서는 저를 발견하자 옆으로 와 여러 설명을 해 줍니다. 아침에 입었던 한텐은 야메의 전통 방식으로 직조한 구루메가스리(久留米絣)라는 면직물을 원단으로 사용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이는 다른 옷이나 손수건 같은 것도 전부 구루메가스리 원단이라고 합니다. 자연스러운 색감이 예쁘다고 말하니 천연 재료를 이용해 염색했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일본어라 메모를 해 둡니다.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한텐을 발견했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2만 円 가량. 깔끔하게 포기합니다. 모름지기 쇼핑 중의 쇼핑은 아이쇼핑이라 했습니다. 여행이 계획 짤 때 설레듯, 인터넷 쇼핑도 장바구니에 넣어만 둬도 재미있듯이 말이지요. 아무래도 커피나 마셔야겠습니다.


커피


컵 재질이 특이합니다. 컵 외부에 요철이 있어 내용물이 뜨거워도 홀더 없이 맨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컵 사이즈도 크지 않아 좋습니다. 이번 여행은 아무래도 근교 여행이다 보니 스페셜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 카페에 자주 들리지 않았지만, 후쿠오카 같은 번화한 도시를 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루에 3~4곳의 카페에 가는 건 예삿일도 아니지만 아무래도 카페인이 부담이 되거든요. 다양하게 마시고 싶은데 작게 팔아 주니 고맙습니다. 홀짝대다 보니 북유럽 그 친구도 구경이 끝났나 봅니다. 인사를 하고 매장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차에 탔습니다. 혹시 더 보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묻는 유키 상, 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뜻밖의 동행은 아직 성에 차지 않았을까요? 그녀 역시도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인지 작은 물건들을 파는 곳은 없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곳이 있으니 데려가 주겠다고 유키 상이 제안합니다. 저야 나쁠 것 없지요. 또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리 오랜 시간을 달리진 않았습니다. 20분 정도였을까요? 시장 같은 곳에 도착합니다.

레트로한 타이포


어딘지 모르게 예스러운 정취를 자랑하는 이 곳은 도바시이치바(土橋巿場, 도바시 시장)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였나, 아무튼 전후에 만들어졌을 때는 암시장이었다고 합니다. 암시장이라,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입니다. 소설 속에서나 읽어봤던 단어고 영화 속에서나 나오던 장소입니다. 그 시절엔 뭘 팔았을까요? 북한 개성공단처럼 초코파이 같은 과자를 거래했을까요? 아쿠자들이 시장을 관리했을까요? 평범해 보이는 과일 가게에 비밀 단어를 말하면 주인의 눈빛이 돌변했을까요? 뭐, 지금은 암시장이 아니라니 제 상상에만 맡겨둬야겠습니다. 유키 상은 아직도 쇼와 시대의 느낌이 남아있어 좋아하는 장소라고 합니다. 저야 일본 사람이 아니니 쇼와의 느낌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감은 옵니다. 한국으로 치면 구한말, 경성 이런 느낌이겠지요. 혼자였다면 이런 곳에 절대 와 보지 못했을 겁니다. 네이버 검색으로는 택도 없고, 구글로 한다 해도 한글 키워드 검색으로는 불가능이었겠지요. 만에 하나 왔더라도 암시장이라는 정보를 모르고 왔다면 지금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겁니다. 행운의 여신이 저에게 미소를 지어줍니다.


거리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구경했습니다. 도바시이치바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기 전의 X리단길 시리즈들이나 성수 같은 동네와 닮았습니다. 프랜차이즈들보단 영세한 개인 사업자들이 모여 만든 매장들이 많습니다. 외관은 쇼와 시대에 지어졌던 그대로를 지켜오고 있지만 안에 들어서면 같은 장소라곤 생각하기 힘들게 인테리어를 구성했습니다. 그 안에서 파는 물건들은 또 옛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복고와 모던의 원투펀치에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또 그걸 설명해주는 유키 상에게 집중하느라 카메라를 들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남겨뒀어야 하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고선생 서비스 컷


구경을 한참 하니 배꼽시계가 또 울립니다. 시간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1시, 인체만큼 정확한 건 없습니다. 때마침 유키 상도 빵을 사가야 한다며 빵집으로 안내합니다. 정말.. 정말 유키 상 없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신앙심마저 생길 지경입니다.


빵은 일본어로도 빵입니다


어제 갔었던 빵집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동네 빵집' 포지션이라면, 이곳은 프렌치를 표방하는 '파티세리'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둘을 표기법으로 구분합니다. 멜론빵, 소보루빵, 크림빵, 단팥빵 같이 ~빵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있는 빵이 많으면 동네 빵집입니다. 사워 도우, 크루아상, 뺑 오 쇼콜라, 퀸 아망 같은 외래어 이름을 그대로 쓰는 빵이 많으면 파티세리입니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데 구분을 어떻게 했냐구요? 가격 보면 됩니다. 빵 주제에 드릅게(?) 비싸네 생각 들면 보통 파티세리입니다. 물론 저는 둘 다 좋아합니다만은 오늘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버터 냄새가 좋은 크루아상과 시큼한 매력이 있는 사워 도우를 집어 들었습니다. 유키 상도 빵을 고르고 도바시이치바 구경을 마쳤습니다.


오늘의 투어는 여기서 끝이라는 유키 상, 아쉽지만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북유럽 그녀는 연박을 신청해두었기 때문에 함께 차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저는 사가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하자 유키 상이 가까운 역까지는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이 투어, 마무리도 완벽합니다.


가는 길에 빵 먹었습니다. 차빵 허락받았음.


JR 아라키 역(荒木駅)에서 내려주고 작별인사를 합니다. 이제 다시 혼자입니다.


기다리며 한 장


고쿠라(小倉) 행 가고시마(鹿兒島) 본선에 탑승해 JR 도스 역(鳥栖駅)에서 나가사키(長崎) 행 나가사키 선을 타고 사가 역까지 가는 루트입니다. 도스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저렴하지만 차멀미가 있는 탓에 두 번째로 저렴했던 이 방법을 택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숙소를 찾아봅니다. 첫날 묵었던 숙소가 괜찮았으니 다시 예약합니다. 잠시 뒤 기차를 타고, 내리고, 환승하고, 경치 구경하고, 사가 역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역을 나가려던 순간, 귀에 트럼펫 부는 소리가 들립니다. 돌아보니 아마도 동아리인 것 같은 학생들이 지휘에 맞추어 각자의 악기로 합주를 하고 있습니다. 계획 없습니다. 연주는 흥겹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혼자 여행의 특권인데 놓칠 수는 없습니다. 잠시 구경을 하고 가기로 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연주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어린 학생들 같지가 않습니다. 어쩐지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유난히 이런 공연을 보면 손 끝이 괜히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벅차고 심지어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입니다. 수준급의 연주나 공연에는 대단하다는 생각 정도밖에 들질 않는데 이런 아마추어들의 날것같은 공연은 전해져 오는 느낌이 다릅니다. 참 이상합니다. 남들은 오열했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도 울어본 적이 없는 저인데요. 여행 와서 괜히 주책 부리기 싫어 떠나려는데 지휘자의 입에서 제가 아는 단어가 나옵니다. 앙팡맨. 애니메이션 <날아라 호빵맨>을 일본에서 앙팡맨이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못 참습니다.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설정합니다.


용감한 어린이의 친구 우리 우리 호빵맨


세균맨 신나게 물리치는 합주를 듣고 숙소로 향합니다. 분명 푹 잤는데도 삼일 내리 열심히 걸었더니 피로가 축적되었나 봅니다.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쪽잠을 자야겠습니다. 지금이 네 시니까 두 시간 정도는 괜찮겠지요.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요.


한 시간 반쯤 잤을까, 잠에서 깼습니다. 해는 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은데도 배는 또 고파옵니다. 연비가 참 좋지 못한 몸뚱이입니다. 규동이나 먹을까 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밤인데 고급유로다가 주유하고 싶은 이 마음, 돈 좀 써야겠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직원에게 저녁을 추천해달라 하니 사가 지역의 소고기가 굉장히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품질이 좋아 사가규(佐賀牛)로 이름까지 붙었다며 일본 3대 와규라는 것도 말해주는데 이건 사람마다 말이 달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횡성 한우나 완도 김 같이 지역 이름을 붙인 브랜드는 일정 수준 이상을 보장하지요. 게스트하우스의 자전거를 빌려 사가규 식당으로 갑니다.


노을


귀에 이어폰을 꽂고 구글 맵스의 안내에 따라 야키니쿠 가게로 향합니다. 사가 역 부근을 벗어나고 주택가가 나오니 멋진 노을이 펼쳐집니다. 낮은 건물이 많아서 노을이 더욱 멋져 보입니다. 층고만 살짝 높아져도 공간의 개방감이 확 달라지듯이요. 아파트 지옥에서 벗어나 일몰을 감상하는 여유는 과분하리만치 좋았습니다만 속없게 배는 꼬르륵 소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페달을 더 밟아 소고기집에 도착했습니다.


마블링


고급유 좀 넣어줘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왔건만 소고기라 그런지 비싸긴 비쌉니다. 남은 돈 다 털고 가겠다는 결심은 바로 Shift + Delete입니다. 결국 맛만 보자는 마음으로 한 접시만 주문합니다.


구웠습니다


야키니쿠는 겉보기엔 한국 고깃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석쇠에 숯불이 있고 손님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게 생고기가 나옵니다. 차이점은 고기에 양념이 되어있느냐입니다. 야키니쿠는 기본적으로 간장 등으로 조미가 되어있습니다. 생고기 그대로 나오는 한국과는 다르죠. 또 밑반찬도 기본 제공이 아니라 따로 주문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건너온 식문화라 그런지 김치를 팔고 있습니다. 잘 익은 소고기에 김치 한 점 얹어먹는 그게 또 맛인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돈 내고 먹으려니 뭔가 아깝습니다. 공짜만 찾다가 대머리 된다는데 프로파시아 빨리 알아봐야겠습니다.


고기가 다 익어 한 입 먹어봅니다. 이 녀석, 비싼 값을 하긴 합니다. 입에서 녹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습니다. 흰 밥만 있으면 무한정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접시만 시킬 수밖에 없는 게 야속합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와야겠습니다. 아쉽지만 배가 하나도 부르지 않은 채로 나왔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인근에 사가규 스테이크 덮밥을 파는 곳이 있다니 그곳으로 갑니다. 참, 술 없이 식사로만 2차를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덮밥 가게에 다와 갈 즈음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게 생각납니다. 영업 종료 시간만 봤지 주문 마감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겁니다. 약간 간당간당하지만 속력을 높이면 시간에 맞춰 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섭니다. 좀 더 힘차게 페달을 밟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스테키동 사이즈 中으로 주문합니다.

스테키동


사가규 한 접시보다 가격은 1/3 가량 저렴한데 고기 양은 비슷하게 나옵니다. 근방에 사가 대학교가 있어 주 손님층이 학생들이라 이런 가격 아니면 장사하기 힘들겠지요. 대신 고기의 질이 아까 야키니쿠집보다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정도를 바라면 욕심쟁이겠지만요. 그래도 명색이 사가규라니 먹어봅니다. 우선 고기 한 점 먼저, 간은 약간 강하지만 밥이랑 먹으면 딱입니다. 물리지 않게 양배추도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교 앞에 이런 가게 있었으면 아마 매일 출석체크를 했을 겁니다. 그릇 바닥 비우고 나왔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바로 맞은편에 츠타야(TSUTAYA)가 보입니다. 어쩐지 익숙한 상호명, 아마 대학 마케팅 강의 중에 언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학기에 배웠던 것이라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재미있게 설명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밥만 먹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가자니 뭔가 아쉽기도 하구요. 안 가볼 이유가 없습니다.


매장에 들어서니 이제야 뭘 배웠었는지 생각이 납니다. 츠타야는 서점입니다. 서점이 그냥 책 파는 곳이지, 뭐 특별할 것 있겠냐 물어본다면, 네. 츠타야는 좀 다릅니다. 보통 츠타야 안에는 스타벅스가 있습니다. 서점에 커피숍 있는 게 뭐 그리 별일인가 싶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별일같이 들릴 겁니다. 츠타야 내의 스타벅스에서는 계산하지 않은 책도 가져가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서점에겐 굉장히 리스크가 큰 일입니다. 책에 커피를 쏟으면 어떡합니까? 손님이 입 싹 닫고 제자리에 두면 누가 알까요? 또, 스타벅스에서 보다가 책을 그냥 들고 나가버리면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 츠타야에겐 상품 보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고객의 매장 내 체류 시간을 늘리는 것은 곧 매출의 증대와도 연결이 됩니다. 저도 츠타야에게 속아 넘어가 주고 싶지만 일본어를 모르니 책은 사긴 그렇고, 스타벅스에서 뭐라도 한 잔 마시기로 합니다.


아이스 라떼를 마시고 싶지만 시간이 열 시라 카페인은 부담스럽습니다. 다행히 일본 스타벅스에는 차가운 메뉴도 숏 사이즈를 팔고 있습니다. 주문하려고 카운터에 가려는데 입간판에 그려진 특별 메뉴가 눈에 띕니다. 할로윈 미스터리 프라푸치노라는 메뉴, 옆에 설명은 읽을 수가 없지만 확실히 코히라는 글자는 없는 거 보니 카페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귀여운 유령 스티커


음료 베이스는 카라멜, 휘핑 베이스는 초코인 것 같습니다. 급격한 혈당 수치 증가에 눈이 번쩍 뜨이고 생기가 돕니다. 카페인 피하려다가 슈거 하이가 와 버렸습니다. 약빨(?)이 끝나기 전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여차하면 잠 못 잘 수도 있으니 호로요이도 한 캔 사서 갑니다.


돌아오니 아까 사가규를 추천해줬던 직원이 혼자 바에 있습니다. 일요일 밤이어서 그런지 첫날의 불금틱한 왁자지껄했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입니다. 사가규는 어땠냐는 직원의 물음에 짐 풀고 와서 말해주겠다고 한 후 가방을 침대에 놔두고 다시 내려와 호로요이를 깠습니다.


호로요이 레몬진져 맛


사가규는 굉장히 맛있었다고, 고맙다고 말해 줬습니다. 오세치를 먹을 때 있었던 그 직원이라 그런지 더 반갑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조용한 상태에서 보니 나이가 제 또래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정직원은 아닌 거 같고, 알바로 근무하는 것 같습니다. 물어보니 맞다고, 사가대학교에 다니는 중이랍니다. 사실 아까 전에 사가규는 맛있게 먹었다고 말은 했지만 너무 비싸서 한 접시만 먹고 나와서 사가규 스테키동을 또 먹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니 웃으며 자기도 자주 가는 집이랍니다. 생판 모르던 친구와 공통점이 하나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곧 바(bar) 마감 시간이라 아쉽다고 하니 괜찮답니다. 오늘 숙박 예약한 손님 한 명이 늦게 온다고 해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 보내게 말동무나 해 주겠다고 하니 고맙다고 술 한 잔을 사겠답니다. 사장한텐 비밀로 하라면서요. 이런 환대는 땡큐 땡큐 때댕큐죠. 기념으로 사진이나 하나 남기려고 하니 술잔 뒤에 사케도 나오게 세팅해 줍니다. 내가 이 사진을 인질로 잡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참 착한 친구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제가 얼마나 고마웠던 건지 아주 한가득 따라줬습니다. 사실 원래 넘치도록 따라주는 거라지만 해몽이라도 좋게 해 봤습니다. 한국에선 이렇게 찰랑찰랑 따르는 걸 '표면장력'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언젠가 써먹어야겠다면서 글자를 어떻게 적는지 물어봅니다. 노트에 적어주다가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펜을 돌려주며 이름이 뭐냐고 묻자 노트에 한자를 적어주며 '유우다이 야마시타'라고 읽는다고 알려줌과 동시에 제 이름을 묻습니다. 저도 한글로 적어주고 읽는 법을 알려줍니다.


한참을 더 이야기해도 손님이 오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오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에 유우다이도 동의를 합니다. 나 없었으면 그 손님을 오매불망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니 어차피 내일모레에 발표할 PPT 만들어야 해서 밤은 새웠어야 했을 거랍니다. 아아, 불쌍한 어린 영혼이여, 나도 대학생인데 과제의 굴레를 던져버리고 타국 일본에 왔다고 말해주니 아주 부러워 죽겠는 눈치입니다. 인생 멋지게 산다는데.. 제 생각엔 막 산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지만 칭찬이겠거니 하고 말았습니다. 이 뒤로는 술이 더 들어가기도 했고 4년 전 이야기라 무슨 말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아, 첫날 마셨던 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마자케라는 걸 처음 마셔봤는데 정말 맛있었다, 어디서 살 수 있느냐 물어봤고 약도를 받았습니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PPT도 거의 다 만들었다고 하여 퇴근할 거라고 합니다. 마지막 노맘바! 셋째 날 밤은 만취 상태로 갔습니다.


마셔라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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