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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May 16. 2021

흔한 사가(佐賀), 야나가와(柳川) 여행기 [2]

야나가와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푹 잤습니다. 하루 평균 3시간을 자다가 9시간을 자니까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 계획은 없습니다. 혼자 여행의 장점은 역시 뭐든 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약간은 심심하다는 단점도 있지만요. 대충 씻고 배낭을 들쳐 매고 밖으로 나옵니다. 여전히 계획은 없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유제품 회사 Meiji의 우유입니다.


오랜만에 아침을 먹을 여유가 생겼는데도 영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라도 한 팩 구입합니다. 처음 일본으로 여행을 왔을 때 느꼈던 점이 있습니다. 축산물의 품질이 우리나라와 꽤나 차이가 납니다. 대표적으로 우유와 달걀이 그렇습니다. 국내산 우유는 약간 물을 탄 듯 유지방의 맛이 옅습니다. 상하우유 정도 되면 진하고 풍미가 풍부합니다만 일반 우유와 가격이 두 배 정도 뛰어버리죠. 일본 국내 우유 시장은 규모가 꽤 큽니다. meiji(메이지)나 森永乳業(모리나가)처럼 대형 브랜드에 더불어 각 지역별로도 쟁쟁한 로컬 브랜드가 있습니다. 지역 마트나 온천 같은 곳에 가 보면 그 지역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우유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식문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지역별 우유를 찾아서 비교하며 드셔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꽤 재미있는 콘텐츠가 될 겁니다.


사가 역

걷다 보니 사가 역이 나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이다 보니 역도 단출합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근처에 시라야마라는 아케이드가 있으니 잠시 구경을 해보기로 합니다.


열기구 모형

이동수단이 있지 않아 계속 걸었습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가는 길에 유난히 열기구 모형이 많습니다. 사가 현이 아마도 열기구로 유명한 동네 같습니다.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열기구 축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가까운 시일 내에 열리네요. 2017년은 11월 1일이 시작입니다. 아뿔싸. 여행을 일주일만 미룰 걸 그랬습니다. 귀국일이 10월 30일이었거든요.


시라야마 아케이드. 열기구의 도시 사가입니다.

시라야마에 도착합니다. 평범한 아케이드 상가입니다. 저만의 착각일지는 모르겠는데 일본 어느 동네를 가든 이런 양식의 아케이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름에 비해 일본이 더 습하고 더워서 천장을 세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동네의 시장은 정말 오래되었지만 천장을 올린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근처의 다른 시장엔 천장이 없는 곳도 많습니다.


천장에도 역시나 열기구 모형이!

시간은 10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아직 개점하지 않은 가게도 많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인 탓이었을까요? 유명 관광지보다 시장이나 상가 구경을 더 좋아하는 저에겐 다소 아쉬운 상황입니다. 나중에 시간 맞춰 다시 구경하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는 길에 하도 열기구를 많이 보다 보니 왠지 궁금해집니다. 사가 열기구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니 사가 벌룬 뮤지엄이라는 시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직 12시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니 사람도 북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라야마에서도 100미터 남짓 떨어져 있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벌룬 뮤지엄을 구경하러 가기로 합니다.


실제 열기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열기구가 반깁니다. 실제 열기구였다고 하는데요, 저는 열기구의 실물을 처음 봤습니다. 매번 사진으로만 봐서 그다지 크다고 느끼질 못했는데 실물이 눈 앞에 놓이니 굉장히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농구선수 단테 존스를 처음 본 그 충격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 6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3살의 이재동이는 농구 경기를 종종 보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지역 연고인 안양 SBS(현재 안양 KGC) 경기를 주로 관람했습니다. 단테 존스 선수의 시원한 덩크는 정말 일품이었죠. 계속 보다 보니 나도 농구란 걸 좀 더 깊이 있게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한테 말씀드렸습니다. 이왕 할 거 제대로 시키실 심산이셨는지 SBS의 홈구장인 안양종합운동장에서 강습을 받았습니다. 여느 날처럼 농구 연습을 끝내고 집에 가려하는데, 그날따라 버스 대신 걸어서 집에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다른 문으로 나왔는데, 전설의 용병 단테 존스 선수와 마주쳤습니다. 와, 생전 태어나서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제가 보던 TV 화면 속의 선수들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그냥 큰 사람들끼리 모여있어서 그런 거였습니다. Hello까지 말했던 건 기억이 납니다만 그 뒤로 존스 선수가 대답을 해 줬는지 아닌지는 가물가물합니다. 아무튼, 저 열기구를 보고 단테 존스 생각이 났습니다.


내려다본 열기구


뮤지엄 안에는 양력에 관한 설명도 있고, 누가 열기구를 처음 발명했는지도 나와있고 엄청 다양합니다. 사가 열기구 축제를 기록한 동영상도 재밌었습니다. 도라에몽 열기구는 참 귀엽더라구요. 문제는 제가 일본어 까막눈이라는 점이지요. 그래도 미니 열기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재밌었습니다. 높은 언어의 장벽이 유독 안타까운 날입니다. 그 문화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여행의 퀄리티가 갈립니다. 말을 할 줄 모르고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건 음소거를 하고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시각 하나만 가지고 영상을 해독해야 하니 심층적인 이해는 불가합니다.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처럼 액션 위주인 영화는 그래도 볼만하겠습니다만 딱 거기까지겠지요. 기초 회화를 익히거나 상용한자를 외워봐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재밌는 시간이었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배가 고파졌습니다. 우유 한 팩으로는 한두 시간쯤의 허기를 달래는 게 고작이었나 봅니다. 비가 쏟아질랑 말랑한 으스스한 날씨, 또 국물이 땡깁니다. 우동이냐, 라멘이냐. 선택의 갈래에서 고민합니다. 어제 저녁을 라멘으로 해결했으니 라멘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맛만 있다면야 같은 음식을 연속해서 먹는 건 아무래도 관계없습니다. 타베로그(tabelog, 일본의 맛집 평가 사이트)와 구글 맵스를 동원해 찾아보니 우동 가게보다는 라멘 가게가 평점이 더 높습니다. 다시 라멘을 먹으러 길을 나섭니다.


가는 길에 봤던 천


걷다 보니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근처에 편의점이 어디 있나 검색하고 싶은데 전날 밤 핸드폰을 충전해놓지 않았더니 배터리가 나갔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근처 건물로 들어갑니다. 아이들을 위한 학원 같은 곳으로 들어가 혹시 우산 파는 곳이 어디 있는지 물어봅니다. 영어에 짧은 일본어에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니 간신히 소통이 됩니다. 비에 젖은 모습이 영 안쓰러웠는지 핸드폰 번역기까지 사용해가며 편의점의 위치를 안내해줍니다. 가는 길에 우산 쓰고 가라고 빌려주기까지 하십니다. 알려주신 대로 가니 편의점이 눈앞에 등장, 일회용 우산과 함께 간단한 간식거리를 같이 샀습니다. 빌린 우산을 돌려주며 간식거리를 드리고 다시 라멘 가게로 향합니다. 



개점을 위해 노렌을 거는 순간에 매장에 도착했습니다. 우산을 사러 들리느라 약간 길을 돌아갔더니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네요. 아, 역시 나는 될 놈이다 싶습니다.

식권 자판기


주문은 자판기에서 하고 식권을 전달하면 그대로 메뉴를 만들어주는 방식입니다. 다행히도 사진이 함께 붙어 있어 주문하기가 수월합니다. 역시나 일본 라멘 가게의 특징이 보입니다. 대부분 챠항(볶음밥)을 함께 판매합니다. 국내에도 라멘집이 많지만 보통은 흰 밥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침 겸 점심 식사이고 저녁 식사는 아마도 늦어질 것 같으니 라멘과 교자 그리고 볶음밥을 함께 주문하려고 합니다. 추가로 뭐 빠진 거 없을까 하고 메뉴를 다시 한번 보는데 라멘 사진에 제가 좋아하는 아지타마고가 없습니다. 토핑으로 추가해야 하나 싶어서 살펴보니 생달걀만 있습니다. 한자를 읽어보니 달걀은 구슬 옥에 아들 자를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글자가 있는 게 아지타마고가 아닐까 싶어서 둘러보니 하단에 구슬 옥이 들어가 있는 버튼이 있습니다. 생달걀이 50엔이었고 이 의문의 버튼은 100엔이니 양념한 걸 감안하면 확실히 아지타마고가 맞는 거 같습니다. 선택합니다. '역시 잘 때려 맞추는 구만!' 내심 뿌듯해하며 식권을 건네고 자리에 앉습니다.



볶음밥과 교자 5입
잘 볶고 잘 구웠습니다


육수를 끓이고 면을 삶는 동안 먼저 챠항과 교자가 나옵니다. 라멘까지 먹을 걸 생각하니 양이 조금 많은가 싶기도 하지만 저녁까지 버티려면 약간 과식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입니다. 파향을 잘 살린 밥에 육즙이 터지는 교자는 라멘을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라멘


얇은 차슈에 묵직하나 깔끔한 돼지 뼈 육수. 짠맛이 다소 강하지만 원래 간간히 먹는 제 입맛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라, 아지타마고가 없습니다. 메뉴에서 빠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데 일본어를 잘 못하니 일단 먹습니다. 아지타마고를 잊은 걸 알아차리면 그때 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마침 주방 너머에서 검은 그릇에 뭔가를 담아오는 요리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른 버튼의 정체는 면 추가였습니다.


카운터 너머로 그릇을 건네는 요리사. 자, 이제 달걀을 먹어볼까! 하고 받아 든 그릇. 웬걸, 안에는 면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누른 버튼은 아지타마고가 아니라 카에다마였던 거 같습니다. 그제야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도 가끔 면 추가를 카에다마라고 써놓은 곳이 있었단 걸요. 구슬 옥 앞에 붙어있었던 의문의 한자는 아무래도 카에였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때려 맞췄다던 저의 뿌듯함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면추가가 된 것은 더 큰일입니다. 약간 과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 푸드파이터의 꿈은 평생 가져본 적이 없는데요. 제가 아무리 면 귀신이라지만 볶음밥에 교자까지 주문했는데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요? 어릴 적에 음식 남기지 말라던 어머니의 밥상교육이 효과적으로 먹혀든 저는 어떻게든 이걸 다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다행히도 맛은 좋은 라멘이라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터, 심기일전하여 젓가락을 듭니다.


결국 해냈습니다


면발이 목젖까지 차올라있는 것만 같은 포만감이었지만 어떻게든 다 먹고 나왔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를 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올챙이배가 된 걸 보니 향후 8시간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 하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없습니다. 배불러서 어디 움직이기도 힘들기도 하니 오는 길에 봐 뒀던 카페에 들어가 충전과 함께 정보 검색을 해보기로 합니다.


간단한 식사도 가능한 카페

1층은 카페, 2층은 스파로 운영되고 있는 곳입니다. 카레도 팔고 있지만 음식은 쳐다보기도 싫은 상태입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날이 추워도 얼죽아는 기어코 시원한 커피를 주문합니다.


예쁜 잔과 커피는 잘 어울렸습니다

어두운 계열의 목재 위주에 톤 다운된 조명에 빗소리까지. 여유 속에 핸드폰을 켰습니다. 근교에 가볼만한 도시가 있을지 검색합니다. 야나가와(柳川市)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후쿠오카 현에 있지만 사가 현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와(川)라는 한자에 걸맞게 동네 곳곳에 천이 흐르고 있는 것이 일본의 베네치아라는 별명도 이해가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어 요리로도 유명한 지역입니다. 적당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예약하고 한 숨 돌립니다. 밀린 연락을 이제야 확인해봅니다. 친구들과의 단톡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메시지가 있습니다.「뉴스취재/기사작성론」단톡방 강의 조원이 보낸 카톡입니다. 본인의 에세이를 올렸으니 확인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매주 기사나 에세이를 쓰는 강의를 수강하고 있거니와 조장까지 맡았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매주 제출 마감일이 토요일 24시까지인데 한가로이 커피나 마시고 있던 겁니다. 사실 과제용 에세이 하나를 완성시키기엔 11시간은 차고 넘치는 시간이지만 여행 중이라는 걸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황급히 이번 주의 글감이 뭔지 확인해봅니다. 하늘이 도왔습니다. 이번 주의 토픽 중 하나가 '해외여행'입니다. 지금 상황을 그대로 옮겨낸다면 누구보다도 현장감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터입니다. 디지털 세상에 굳이 펜과 노트를 챙겨 온 나 자신이 대견합니다. 아날로그 대학생은 펜을 들었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서 아름다웠던 카페의 전경. 글이 술술 써집니다.


손이 부러져라 여행 중인 현재의 상황을 써 내려갑니다.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굉장히 낯익은 멜로디가 들어옵니다. 한창 많이 듣던 프라이머리의 Love, 피처링은 범키와 팔로알토입니다. 해외에서 들으니 괜히 더 반갑습니다. 흥얼거리며 이런 우연을 에세이에도 적습니다. 얼추 골조는 완성시킨 것 같습니다. 1,600자 내외의 분량을 써야 하니 내용에 살도 붙여 보고 다이어트도 시켜 봅니다. 이쯤 썼으면 됐다 싶어 글자 수를 세어보니 딱 맞습니다. 글쓰기 달인은 몰라도 분량 맞추기 달인 칭호 정도는 도전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끝이냐? 아닙니다. 과제 제출을 해야 하니 디지털화시켜야겠지요. 다시 카카오톡에 옮겨 적습니다. 타이핑해가며 퇴고도 동시에 합니다. 교수님께서 과제 제출을 위해 개설하신 다음 카페에 글을 올리기 위해 접속합니다. 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 접속 불가랍니다.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겠다고 해외 IP 로그인을 막아둔 과거의 내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단톡방에 전문을 올립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대신 에세이를 제출해달라고 합니다. 착하신 조원 분들은 흔쾌히 수락합니다. 오히려 부럽다고, 여행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해 줍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있나 봅니다.


그날의 에세이. 악필이라 암호문에 가깝습니다.


마침표를 찍으니 그제야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에서 내려옵니다. 지금 다시 보니 여기저기 수정할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급조한 에세이인 것을 참작해줘야겠습니다. (당시 썼던 건 https://brunch.co.kr/@funny1231/7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1600자에 맞춰서 적느라 다소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게 눈에 띕니다. 1편의 표현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건 또 재밌습니다. 지금 기억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도 몇 군데 있는 거 보니 추억 보정이 좀 들어가긴 했습니다.



커피도 다 마셨겠다, 예정대로 야나가와로 갑니다. 사가 역 버스 센터에서 니시테쓰야나가와(西鉄柳川)행 버스를 타는 게 가장 편한 방법입니다. JR사가 역과 버스 센터가 붙어있으니 역으로 향합니다. 왔던 길 그대로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니시테쓰야나가와에 도착했습니다. 숙소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배차간격이 길어 한참을 기다려야 합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저는 걷기로 했습니다. 구글 맵스 기준 38분이 걸리지만 남들보다 걷는 속도가 빠르니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란 계산이 섭니다. 그냥 가면 심심하니 노래를 들으려 이어폰을 꺼냈지만 이내 관둡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 게 좋습니다. 


도보 이동의 장점은 천천히 음미하기가 좋다는 겁니다. 초행길이라면 그 매력은 배가 됩니다. 처음 보는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재미있는 간판들. 읽진 못해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걷다 보니 빵 냄새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사당역 2-4호선 환승구간에서 풍겨오는 쌀빵 집의 커피 번 굽는 냄새는 간신히 이겨내며 지나쳐왔지만 이번 유혹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아점을 엄청나게 과식했지만 면 위주의 식사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배가 금방 꺼집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숙소 도착해서 멜론빵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름 모를 빵 가게의 문을 열었습니다.


다양한 빵


파리바게트나 뚜레쥬르 같은 프랜차이즈 빵집이 득세하는 한국에서 동네 빵집은 귀한 존재입니다. 갖은 크림과 소스로 범벅된 요즈음의 빵보단 생도나쓰, 완두앙금빵, 소보루빵, 사라다빵, 고로케 같은 단출한 옛 빵들을 더 좋아하는 저에겐 항상 동네 빵집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비록 완전히 같은 빵들을 취급하진 않았지만 야나가와의 길거리에서 만난 이 빵집엔 옛날 냄새가 나는 빵들로 가득했습니다. 원래 목적은 멜론빵이었으니 그걸 샀고, 사진으로도 남기고 싶어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한 컷 찍었습니다. 계산을 하려는데 옆 냉장고에 지역 우유를 판매하고 있는 게 보입니다. 우유도 한 병 사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비와 빵은 저에게 각별한 조합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아버지랑 치악산에 갔습니다. 그날도 정말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땅이 뻘밭이 되어 네발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었죠. 능선까지만 가면 길은 편해진다고 했는데 도저히 나오질 않아서 정말 영화처럼 돌 밑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가방에서 주섬주섬 빵과 두유를 꺼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눅눅했던 소보루빵과 물 먹어서 흐물해진 팩 두유는 정말 꿀을 한 항아리 부어놓은 듯 달았습니다. 아무리 뽀글이를 먹어도 군대에서 먹었던 맛을 따라집지 못한다고 하는 것처럼, 저에게 빵은 빗속에서 먹어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입니다.


처음 만난 수로


야나가와라는 이름답게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수로가 있습니다. 물길 따라 난 길을 통해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방법과 그냥 큰 길가를 통해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동네에 살았더라면 무조건 편한 방법인 후자로 다녔겠지만, 관광객인 저는 역시나 길이 좋지 않더라도 낭만 있는 전자를 택합니다. 평소에는 밋밋하지만 번식기를 맞아 화려한 혼인색을 뽐내는 수컷 피라미처럼, 평범했던 수로도 비를 맞으니 농밀해진 색감을 무기로 저를 유혹해 옵니다.


첫 번째 커브


이 길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으스스합니다. 자연의 색이 진해진 건 좋은데 나무가 너무 울창하게 자라 있어 햇빛이 잘 들질 않습니다. 강풍이 불어 가로로도 내리던 비 탓에 옷도 젖어 으슬으슬하니 괜히 공포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퍼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큰 까마귀도 날아갑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아는데도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강 한가운데에만 햇빝이 그나마 들어오고 있습니다. 머리 위는 버드나무로 뒤덮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걸었습니다.


38분을 너무 만만하게 봤나 싶습니다. 두 손이 자유로운 상태였다면 모르겠는데 계속 우산을 쓰고 걸어야 하니 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귀여운 동물들 아니었으면 가는 길이 영 우울하기만 했을 겁니다.


귀여운 청개구리 개구리 수도꼭지
야나가와 특산물 우나기(민물장어, 뱀장어)와 멍멍이 안내판. 그림을 보니 목줄 매고 산책시키라는 거 같습니다.


일본의 베네치아라는 별명답게 수로를 실제로 이용하는 듯한 흔적이 보입니다. 정거장(?)과 나룻배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거장? 정류장?

이 길을 지나며 사진을 유독 많이 찍었습니다. 제가 이런 걸 유달리 좋아합니다. 13박 15일의 여행 중에서도 베네치아가 제일 좋았습니다. 자연 이상형 월드컵이 있다면 하천은 무조건 4강 안에 들어갈 겁니다. 계속 셔터를 눌렀습니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마도 축제의 현장
비가 와 휴업 중인 나룻배로 가득한 선착장


잔뜩 모여있던 나룻배를 지나니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호리와리(ほりわり)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땅을 파서 만든) 수로, 물길. (=ほり)이라는 뜻이랍니다. 야나가와의 수많은 물길들과 참 잘 어울립니다. 역에서 30분이나 가야 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야나가와가 소도시다 보니 유일한 게스트하우스가 여기였습니다. 단 하나의 선택지였지만 다른 곳들이 있었더라도 여기가 제일 좋았을 겁니다. 이 곳을 운영하시는 유키 상(사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가 않습니다)은 영어도 무척 유창하고 친절합니다. 간단한 이용 수칙을 말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게스트하우스는 원래 유키 상의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숙박에 맞게 개조하여 게스트하우스로 바꿨다는데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구조가 가정집 같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야나가와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도 물어봅니다. 본인이 여행자들을 상대로 가이드를 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풍경을 감상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려고 한다고 말해주니 스무고개처럼 다음 질문을 이어갑니다. 로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 좋냐, 가격대는 어느 정도까지가 좋으냐. 우리의 결론은 우나기 세이로무시(うなぎせいろむし, 장어찜 덮밥)로 정해집니다. 자기가 잘 아는 집이 있는데 비가 많이 오니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거 완전 땡큐지만 비에 젖은 생쥐 꼴로 갈 수는 없는 일, 옷을 갈아입고 옵니다.


기다립니다


제가 먼저 가서 타있으면 준비해서 나가겠다고 합니다. 운전석이 우측에 있는 거 보니 확실히 일본 차가 맞습니다. 도로에 있는 차들을 보면 대부분 경차인데 유키 상의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차가 출발합니다. 유키 상의 외모만 보면 굉장히 유한 이미지인데 운전은 꽤 과감합니다. 주변에 차가 별로 없는 것도 한몫하겠지만 후진을 이렇게 격하게 넣는 건 정말 오랜만에 경험합니다. 10분 정도 달렸을까, 장어집에 도착합니다. 익숙하게 장어집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저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 주십니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면 된대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데 문득 일본에서는 신발 앞코가 보이도록 정리하는 게 꽤나 중요한 예절이라는 게 생각납니다. 아차, 하고 돌아서니 이미 유키 상이 제 신발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데려온 손님이라 더욱 신경 쓰신 모양입니다. 의도치 않게 예의 없는 녀석이 되어버린 기분이라 유교맨인 저로서는 영 찝찝합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 세이로무시를 주문합니다.


녹차


먼저 녹차가 나옵니다. 계속 리필해 마실 수 있도록 조지 루시 전기주전자에 잔뜩 담겨 나오지만 다 마시긴 힘든 용량입니다. 기다리다 보니 우나기 세이로무시가 나옵니다.


찜기에 담겨 나옵니다


후쿠오카에서 우나쥬(うな重), 히타(日田)에서 히타마부시(日田まぶし)를 먹어봤지만 세이로무시는 또 처음입니다. 향긋하게 구워낸 장어를 달콤 짭조름한 소스를 바른 밥 위에 얹어 한번 더 쪄내는 것이 세이로무시입니다.(출처 https://tenjinsite.jp/manga/itopics/324) 백문이불여일견, 사진으로 보는 게 빠르겠습니다.

장어 스이모노(吸い物, 맑은국)와 단무지가 나옵니다.


타래 양념이 밥에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 우나쥬나 히타마부시와는 다른 세이로무시의 특징입니다. 저도 탄수화물 중독이라면 어디 가서 안 밀린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못 미치나 봅니다. 만우절 장난이랍시고 "가마솥 내장 리무진" 광고를 올리는 민족은 달라도 다릅니다. 아무리 봐도 장어에 비해 밥이 훨씬 많습니다. 밸런스를 맞추려고 조금씩 아껴먹었는데도 밥이 남습니다. 녹차를 벗 삼아 결국 다 먹었습니다.



처음 니시테쓰야나가와 역에서 걸어왔던 길과 비슷한 경로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왔습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냐고 물어보는 유키 상. 맛있었는데 밥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놀랐다고 말해줍니다. 또 신발 정리를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 나도 그게 중요하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적응이 안 돼서 그랬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봅니다. 외국인들은 대부분 잘 모르는 예절이라 아무렇지 않다고 답해주니 내심 안심입니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조식을 혹시 먹을 건지 물어봅니다. 300엔에 아침 식사면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려 몸이 찝찝합니다. 샤워를 다시 한번 하고 나옵니다. 다인실 게스트하우스지만 날씨 탓인지 손님은 저뿐입니다. 침대 프레임에 몸을 기대어 앉아 아까 썼던 에세이에 더불어 오늘 하루를 기록합니다. 핸드폰으로 걸음수를 체크해 보니 2만보를 넘게 걸었습니다. 이렇게 혹사를 시켰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습니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고 이불을 두꺼운 걸로 바꿔줬는데 더워서 땀이 나는 건지 비를 맞아서 체온이 내려가 식은땀이 나는 건지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여행 와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으니 괜히 엄마 생각도 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데 이 밤에 어딜 나가서 먹겠습니까. 어떻게든 잠들어보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까 사 왔던 멜론빵과 우유가 뇌리를 스칩니다. 오늘 하루 분명 매 끼니를 충실하게 챙겨 먹었습니다만 끼니로 따지면 아점과 저녁 두 번입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새벽까지 과제하느라 사실상의 저녁을 11~12시에 먹었던 일상을 살아온 터라 바이오리듬이 쉽게 바뀌진 않습니다. 십수 년 전 아버지처럼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꺼냅니다. 치악산 바위 밑이 생각나는 호리와리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습니다.


멜론빵과 야나가와 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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