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동 Feb 02. 2020

굿바이, 사가(佐賀).

이 시국에 무슨 일본이냐 싶겠지만 2017년에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사건은 새벽에 일어납니다. 학교 가기 싫어 침대에서 한바탕 몸부림을 쳐대다 그만 잠이 다 달아나버린 겁니다. 이왕 깬 김에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부팅될 동안 커피를 내리고 얼음 몇 알을 띄워 가져옵니다. 이내 꿈나라 대신 이진법 세상에 빠져듭니다. 클릭 몇 번에 무한한 세계가 펼쳐지는 이곳. 옛날 사람들은 인터넷 없이 어떻게 살았나 문득 궁금합니다. RSS로 구독해둔 블로그 몇 군데를 둘러본 후, 늘 하던 대로 스카이스캐너에 접속합니다. 딱히 계획이나 목적지가 있어서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저렴한 항공권 어디 없나 보는 겁니다.


 어제, 그러니까 10월 27일엔 인천공항이었습니다. 문제의 그 새벽에  일본 규슈의 사가 현으로 가는 티켓을 사버린 겁니다. 돈도 없는데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른 건지. 새벽은 정말 무섭습니다. 그래도 이왕 가게 된 거, 재정난은 귀국한 뒤의 걱정으로 미룹니다. 한두 번 타는 비행기가 아닌데도 이륙하는 그 순간엔 많은 생각에 잠깁니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내려치면 깨질까?', '추락해서 섬에 불시착하면 재빨리 핸드폰을 끄고 말려야겠다.'하는 시시콜콜한 걱정들. 그러다 비행기 엔진 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합니다.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자, 기체가 흔들려 잠에서 깹니다. 창밖을 보니 논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마땅한 농지가 없어 밭을 일구기 위해 불을 붙인다는 화전민에 대해서는 책 어디선가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지만, 멀쩡해 보이는 논에서 연기가 올라온다니. 세상은 아직 궁금증 투성이 입니다. 한참을 바라보니 어느새 활주로에 안착합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여행이 시작됐구나 하는 설렘, 그냥 남들이 치니까 따라서. 다양한 이유로 기내는 박수소리로 가득합니다.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사가 역까지 갑니다. 실로 가을인 것이, 가는 내내 노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점점 짧아져만 가는 이 계절의 노을은, 볼 수 있을 때 꽉꽉 담아놔야 합니다. 노을 저장소를 만들어서 보고 싶을 때 꺼내보고 싶다는 시시한 생각도 해봅니다.


 저녁 5시에 노을이 진다는 건 그만큼 밤이 빨리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사가 역에 도착하니 해는 거의 저물었습니다. 하늘엔 까마귀 무리들이 날아다니고, 전선에도 족히 백 마리는 넘게 앉아있습니다. 역광에 비친 그 광경을 보자니 어쩐지 을씨년스럽습니다. 그래도 일본의 까마귀는 길조이니 하며 서둘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짐을 풀고,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합니다. 이번엔 라멘입니다. 일어무식자인 저에게, 일본어 메뉴판을 읽기란 무리이기에 추천을 받기로 합니다. 다행히 ‘오스스메(추천) 구다사이’ 정도는 알아왔기에, 이야기를 건네봅니다. 진한 돈코츠 라멘 한 젓가락. 이제야 일본에 왔구나,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부른 배를 붙잡고 숙소에 돌아왔더니, 소소한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일본 전통 새해 음식을 가져온 겁니다. 새해는 아니지만요. 그런가보다 하고 침대로 돌아가려는데, 파티를 즐기던 이들 중 한 명이 저를 붙잡고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봅니다. ‘아니오. 아직입니다. 이제 막 도착해서요.’ 혹시라도 남아있을 입가의 라멘의 흔적을 손으로 슥 닦아내며 대답했습니다. 이런 파티에 빠진다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자리에 앉으니 연어 회로 만든 장미부터 각종 해산물, 육류, 예쁘게 모양을 낸 야채들. 그야말로 산해진미의 총출동입니다.


 자신을 ‘모토노부’라고 소개한 오키나와 출신의 한 청년이 니혼슈 한 잔을 권합니다. ‘사가는 쌀이 유명해 이곳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건 모독’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기분 좋게 한 잔 걸치고 답례로 생맥주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눕니다. 다행히 영어가 되는 친구라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가끔 막히는지 일본어로 중얼대지만 좋은 뜻이겠거니 하고 '하이, 하이, 하이'하며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야 대화를 마치고 서로의 SNS 계정을 공유하며 각자의 침대로 돌아갑니다.


 지금, 2일 차의 사가는 장대비가 내립니다. 자전거로 시내를 둘러보려던 계획은 엉망진창이 됐지만,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덕분에 좋은 카페에 들어왔습니다.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드립 커피 한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부럽지 않습니다. 아, 방금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멜로디. 곰곰이 생각해보니 프라이머리의 'love'입니다. 범키의 보컬은 언제 들어도 매력적입니다. 우연히 들어간 타지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노래라니. 계획을 짜래도 이렇게는 못 짤 겁니다.


 아쉽지만 이제는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야 합니다. 커피 한 잔으로 세 시간을 버팅기고 있는 것도 좀 그렇거니와 야나가와(柳川)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워낙 즉흥적으로 떠나온 여행이라 뭐가 유명한지, 뭘 먹어야 할지 하나도 모르는 곳이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연락 없이 찾아온 친구가 그렇듯, 길을 가다 주운 돈이 그렇듯, 몰랐던, 갑자기 찾아온 것들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까요. 안녕, 사가.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라이더’로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