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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Mar 07. 2020

흔들리는 침대 속에서

너의 네 다리가 보였던 거야

바야흐로 2년 하고도 7개월 전, 2017년 8월 즈음 후쿠오카에서 있었던 일이다.


35도에 육박하는 땡볕과 깃털처럼 가벼운 지갑에 힘입어 내 발등엔 쪼리의 Y자 자국이 낙인처럼 새겨졌다. 만보기 어플은 3만보를 가리켰으며 삼성 헬스가 '당신은 상위 1% 뚜벅이'라고 공인해줬다. 매우 지쳐버린 육체는 간절히 수면을 원했고 맥주 한 잔 하러 나가자는 친구의 바람엔 도저히 응해줄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에 기어들어가 이층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음 날 예정된 나가사키의 풍경을 그리며.


흔들흔들, 침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눈이 떠졌다. 잘못 느낀 것인가? 지진인가? 재차 덜컹이는 이층침대, 확실히 진동을 감지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아뿔싸, 지진이구나! 여행자 보험도 없는데! 이불을 내던지고 기상했다. 2층에서 내려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가리고 있어야겠다 싶어 안경을 찾았다. 멈추지 않는 진동에 앞은 보이지 않으니 더욱 공포감은 커져갔다. 어디선가 이불을 확 덮는 소리와 함께.


시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땐 청각 같은 감각기관들이 훨씬 예민해진다. 어두컴컴한 게스트하우스 방 안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속으로 삼켜내려 하지만 이내 터져 나오는 숨소리는 거칠었다. 침대는 그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진원지와 소리의 근원은 동일했다. 안경을 썼다.


내 침대와 대각선에 자리잡은 이층침대 1층에는 흰색 이불이 있었다. 급하게 덮었는지 미처 가려지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한 사람이 자고 있어야 할 침대에는 다리가 네 개가 보였다. 그렇다, 그곳은 동물의 왕국이었다. 내 침대와 사바나는 서로 붙어있었고 순백의 초원이 들썩일 때마다 침대가 같이 흔들린 것이다. 초유의 사태에 놀라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내가 ASMR을 듣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들의 번식 욕구가 시들겠지 싶어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으나 새벽 4시까지 ASMR 라이브는 계속됐다. 첫 흔들림을 느끼고 시간을 확인했을 땐 새벽 1시가량이었으니 인공지진은 최소한 3시간 이상이라는 계산을 마쳤다. 흘러간 시간에, 격정적 소리에, 한계 없는 체력에 또 놀란 나의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이왕 깬 거 근처 산책이나 나가야겠다 싶었다. 그들의 유희가 끝나고 난 뒤 샤워를 하고 나온 시간은 약 새벽 5-6시쯤으로 기억한다. 타의로 보게 된 일출은 아름다웠다. 나카스 강을 가르는 주홍빛 햇살은 강렬했다. 감동의 눈물인지 건조해서 눈물이 흘렀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눈이 부셨다.


구글 맵을 뒤지다 운 좋게 7시부터 여는 스페셜티 카페를 찾았다. 청각 테러에 두뇌가 지쳐있던 탓이었을까? 커피 맛은 각별했다. 잔은 이뻤다. 초코 스콘에 로손 아이스크림을 올려먹으면 세상 행복했다. 직원의 배려와 친절은 배로 다가왔다. 뭐든지 잃는 게 있으면 얻은 것이 있구나 싶었다. 한 손엔 원두 봉투를 쥐고 기분이 업된 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그는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먹고 있었다. 밤새 달리던 야생마와 아침인사를 나눴다. 정말 잘 잤다는 런던 출신 친구의 눈빛은 알파 메일 특유의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이토록 웃는 낯에 침을 뱉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했던 적이 있었던가! 짧은 대화와 함께 오늘 귀국한다는 그를 배웅해준 뒤 게스트하우스 스탭과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신 미안함을 표하면서도 체력에 탄복하던 직원이었고,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웃어넘긴 나였지만 두 번 다시는 그곳에 갈 생각이 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런 게 여행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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