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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Dec 06. 2019

어쩌다 마주친 하숙생 속옷에

‘하숙집 하면 은근히 재미있을지도 몰라.’


tvN 드라마 ‘응답하라 OOOO’ 시리즈를 보며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손이 커도 너무 큰 이일화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성동일. 극중 두 배우의 연기에 빠져들어 하숙 생활을 해보고 싶기도, 하숙을 쳐보고 싶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지나가는 생각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1994년 성동일, 이일화 부부의 하숙집을 마지막으로 2014년 3월, 입대를 했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러 2015년 11월, 남아있는 복무기간 43일 중 37일은 휴가로 보내게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말년휴가’의 시작이었다. 휴가는 신병들과 같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첫 휴가의 기대감에 부푼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마냥 귀여웠다. 강원도 고성에서 동서울터미널까지는 어림잡아 서너 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어쩜 한시도 쉬지 않고 휴가 계획을 떠들 수 있는지. 난 그저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동서울터미널에서 내려 1650번 버스로 갈아타고,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복무지역이 한국의 최동북단에 위치했던 터라 11월 초였지만 칼바람이 부는 곳이었고, 그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상하의 내복을 입고 휴가를 나왔건만 사회는 아직 가을이었다. 때문에 집에 오는 내내 땀을 뻘뻘 흘렸고 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뱀 허물 벗듯 ‘일보(一步) 일탈의(一脫衣)’했다. 양말, 전투복 하의, 군 보급 내복, 유니클로 히트텍. 현관에서 10m 남짓의 거리인 내 방까지 가는 길, ‘군바리’의 흔적을 하나 둘씩 벗겨내고 사랑하는 침대를 만나기 위해 방문을 벌컥 열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이게 뭐람!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헤어 롤, 이내 풍겨오는 디퓨져의 향기. 엄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이 전부 남자인 우리 집에선 이런 냄새가 날 수가 없는데. 친구들이 이런 냄새를 내 방에서 맡았다간 필시 ‘XX(중요부위) 떨어진다.’며 아주 기겁을 했을 거다. 끔찍한 상상을 뒤로한 채 시선을 돌리니 전에 본 적 없는 순백색 스툴, 그 위엔 고데기. 침대엔 왜인지 하늘하늘한 패턴의 레이스 이불이 깔려있고 침대 헤드엔 속옷이 걸려있다. 음. 여자 속옷이네. 여자 속옷?!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을 쾅 닫았다. 도저히 상황판단이 되질 않았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속옷은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국방색 흔적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우선 숨을 돌리고, 문을 조심스레 열고 빼꼼 들여다봤지만 다시 봐도 내 방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충격적 사태를 보고했다. 돌아오는 대답.


“네 방 하숙 놨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남동생이 유치원 시절부터 쭉 친하게 지내던 여자인 친구가 우리 집 근처 대학을 다니게 되었더란다. 이전 학기는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터라 적응이 어려워 내 방에서 지내게 해주기로 했단다. 동생과 그 친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고, 아빠는 귀농해서 시골에 내려가 있으니 우리 집에서 살아도 문제없다고. 그런데 나는 아니지 않은가. 이름만 들어봤을 뿐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생김새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일언반구도 없을 수 있는지. 휴가 나가겠다고 전화도 꽤나 했었는데 귀띔 한 번조차 없었다니.


첫 하숙 주인 노릇은 이렇게 여자 속옷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작됐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 대신 할 일 없는 말년병장인 내가 하숙생의 의식주를 책임지게 되었다. 방이 없어 거실 소파에서 자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만들고, 모두가 나가고 공허한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고 청소기를 돌렸다. 고작 걸려있었을 뿐인데도 그토록 난감했던 그녀의 속옷을 언젠가부터 내가 추슬러 거리낌 없이 속옷 전용 빨래망에 넣어 세탁기를 돌렸다. 과제물을 놓고 왔다고 전화가 오면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나가고, 야근이 잦던 엄마 대신 동생과 하숙생에게 희망 메뉴를 받아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을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아침을 차리다 보니 어느새 2015년 12월 2일, 전역을 하게 됐다. 의무를 마친 그 날은 바지를 벗으며 집에 들어오진 않았다. 기분이 찢어지게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들어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밀려있는 설거지를 할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전역 기념으로 엄마, 동생, 하숙생과 저녁에 고기를 썰러 나갔고, 이후로는 11월 초 마주친 새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가족 안에서 홀로 타인으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터인데, 마치 원래 가족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녹아들었던 그녀가 대단했다. 처음에야 내 방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종강일이 다가오는 게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결국 학기는 마무리됐다.


2016년 1학기에는 하숙생이 없었다. 영화관도 잘 가지 못할 정도로 중증의 공황장애를 앓던 그녀였지만 우리 집에서 한 학기를 보낸 덕에 많이 나아져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고, 하숙을 치던 그 집에서 나와 나 홀로 살고 있다. 홀로 적막한 아침식사를 하는 건 이미 익숙해졌지만,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아침부터 못생긴 거 보면 수명 짧아진다며 서로 등지고 밥을 먹던 동생과 하숙생, 헛소리 하지 말라며 숟가락으로 응징하시던 엄마, 그 왁자지껄하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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