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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동 Dec 06. 2019

그대의 겨울나기

2017년 10월, 강제독립당한 후 씀!

아침 샤워 순서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외출 전 옷에 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낼 필요가 없어졌다. 집에서 저녁을 먹을 건지 외식을 할 건지 의논하지 않아도 된다. 냉장고 속 식재료 재고량이 머릿속에 전부 입력돼있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배달 업체 전단지보다 식자재마트 일자별 할인 품목 전단지가 눈에 더 들어온다. 옷보다는 이케아 가구 구경이 재미있다.

 

혼자 살게 된 지 45일 째다.


사실 가족들과 떨어져 산 건 처음이 아니다. 편입 전, 춘천 소재의 타 대학에 다닐 때도 2년 간 원룸과 기숙사를 전전했으며 21개월 동안 국가에 청춘을 바치느라 집에 가기 힘들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도 이번은 다르다. 학기 중에야 혼자였지만 방학이면 춘천에서 돌아와 안양에서 살았기에 타지 생활이라는 느낌이 없어서였을까. 군대에서도 또래 친구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니 혼자라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기 때문일까. 어찌 됐든 살림하는 실력이야 늘었다지만, 진짜 홀로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위에 부모님의 품을 벗어났다는 소식을 전할 때, 보통 반응은 부러움과 걱정 섞인 목소리였다. ‘눈치 보고 살지 않아도 돼서 좋겠다.’, ‘너희 집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 딱 되겠다.’, ‘술 사갈 테니 잠 좀 재워주라(응, 안 돼)’, ‘고양이 네 마리랑 살다가 갑자기 헤어지려니 외롭겠다.’, ‘모든 일을 너 혼자 하려면 힘 좀 들겠다.’


다 맞는 말이다. 모든 일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와도 맞이해주는 건 미처 치우지 못한 아침 식사의 흔적이다. 엄마가 싫어하던 장르의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도 괜찮고 주방 더러워진다고 절대 해주지 않던 치킨을 기름 신나게 튀겨가며 맥주랑 마셔도 뭐라 할 이 하나 없다. 마냥 좋지도 힘들지도 않을 뿐이다.


최근 기상할 때 기침이 잦아졌다. 이사 온 아파트는 분명 중앙난방이라 찬바람을 쐴 일도 별로 없고, 고양이도 더 이상 키우지 않아 날릴 털도 없는데, 원인이 뭘까 싶어 동네 작은 병원에 갔다. 우리 병원에선 알아보기 힘드니 대학병원 같이 큰 병원에 가보라 했다. 폐 기능 검사와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증상에 대한 질의응답도 했다. 기침성 천식이란다.


친구들이나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직원들에게야 ‘이러다 나 죽겠다’고  하나은행 620 177718 ... 예금주 이재동으로 입금하는 것이 유일한 타개책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해댔지만, 부모님께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과 전화를 하다가도 기침을 연발하니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최근 증상을 말하고 병원비 잔뜩 들었다니까 “실비보험 들어놨다고 어차피 병원비는 청구할 건데 CT도 좀 찍어보지 그랬냐” 하시기도 하고,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니까 “그럼 됐다”고 하셨다. 약 잘 챙겨 먹으란 말을 더할 뿐, 생각보다 반응은 담담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우체통에 부재중 택배가 있으니 경비실에서 찾아가라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즉흥여행의 후폭풍 탓에 가난한 삶을 사는 중이라 택배 올 것이 없는데, 확인해보니 아버지가 보낸 거다. 9월 29일, 엄마는 안양에서 아버지가 미리 자리를 잡아놓은 거창으로, 나는 안양 3동에서 1동으로 이사를 동시에 갔는데, 짐을 나누던 과정에 섞여버린 물건들을 다시 나한테 보내준 거였다. 상자 안에는 겨울에 쓰던 담요, 말린 오미자 그리고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쪽지에는 기침성 천식에는 말린 오미자가 좋다며 어떻게 우려먹어야 하는지, 담요의 세탁 방법과 그 주기 등이 적혀있었다. 사실 다 아는 내용이라 뭘 이런 것까지 적어주나 싶었다.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닌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겨울나기 준비는 항상 어머니의 몫이었다. 겨울옷을 꺼내고, 거실에 러그를 깔고, 이불을 두꺼운 걸로 바꾸는.


어제는 침대 매트리스 위에 담요를 깔았다. 천식 약은 오미자 우린 물과 함께 삼켰다. 약이 효과가 좋은 건지, 따듯하게 자서 그런 건지. 오늘은 왠지 기침하는 횟수가 줄어든 느낌이다. 기분이 좋아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월동준비는 잘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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