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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Aug 15. 2020

사랑은 살짝 맞닿는 순간으로부터,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대학 학부 교양 수업이었던 '음악의 세계' 과목에서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당시 기억으론 '시간의 흐름을 인위적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 하셨던 것 같다. 자연에서 흐르는 시간을 인간의 기준인 박자, 음정 등으로 나눴다는 의미였다. 그 이후로 음악을 들을 때면 가끔 그 정의가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음악과 다른 예술의 차이점인 '시간 의존성'을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한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 같은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데, 이 점이 문학 작품이나 그림은 사람마다 감상하는 시간이 달라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슈베르트는 그런 음악의 본질 -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인 기준을 덧붙인 - 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인물인 듯하다. 그의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스레 흘러나온 멜로디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베토벤이 엄격하고 체계적인 화음으로 음악을 쌓았다면, 슈베르트는 그런 규칙 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아이처럼 멜로디가 흥얼흥얼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에서는 들을 때마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데, 그게 바로 슈베르트가 잊히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슈베르트의 작품들 중에서도,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네 손을 위한 환상곡', D.940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한 곡을 같이 연주한다는 점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한다는 점이 본질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드라마 '밀회'에서, 선재(유아인)와 혜원(김희애) 사이의 사랑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이 곡은 슈베르트(1797~1828)가 죽기 몇 달 전인 1828년 1~3월 사이에 작곡되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초연 후 애제자였던 캐롤라인 에스타르하치에 헌정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네 손을 위한' 곡이었기에 슈베르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이 곡을 썼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작품은 총 4악장이지만 실제 연주 시에는 악장 구분 없이 이어서 연주한다. 연주자에 따라서 총 연주 시간이 18~21분 정도로 보통 소나타 한 곡 정도의 길이라서 짧은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 모티프가 반복되면서도 변형되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단 쉽게 흘러간다고 느껴졌다.





곡 전개에 대한 간단한 해석,


1악장. Allergo Molto moderto



 곡은 어두운 무대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듯이, 잔잔한 왼손 화음으로 시작한다. 이어 작품 전체에서 반복될 오른손의 멜로디가 조용히 등장한다. 거울같이 평온한 호수에 돌 하나가 떨어졌을 때 생기는 잔잔한 물결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마음의 동요가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작품은 시작된다.



 잔잔한 멜로디가 조금씩 커지다가 갑작스레 왼손과 오른손이 주고받는 옥타브로 진행된다. 계속해서 양손이 서로 멜로디와 반주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강하게 나아간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아주 작게 멜로디는 변한다. 폭풍 후의 고요함처럼. 그러면서도 파도처럼 커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며 음악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사랑하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2악장. Largo


 2악장은 갑작스러운 조성 변화, 강한 타음, 그리고 트릴로 이어진다. 원곡은 양손을 이용하여 트릴을 하라고 적혀있다. 마치 서로 목소리를 주고받듯이, 왼손과 오른손이 트릴을 주고받으며 곡은 이어진다.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가 커지며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갑작스레 곡은 힘을 뺀다. 다시 아주 여리게 비슷한 멜로디가 등장하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 다시금 화음과 부점이 등장한다. 그렇게 음악은 조금씩 커지는 마음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나아간다.




3악장. Allergo Vivace


그리고 마침내, 3악장으로 넘어간다. 3/4박자에선 왈츠의 도도한 느낌을 받는다. 1악장과 2악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그러면서도 도도한 멜로디가 정말 인상적이다. 이 부분을 들으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무도회에 나서서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생기를 잃지 않고, 우아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무도회장에 등장하는 안나의 모습이.



그렇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 다시금 고요함으로 곡은 빠져든다.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다시금 3악장의 멜로디가 종종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면서 조금씩 풍성해진 화음은 하나의 깔끔한 완성을 보여준다. 마치 이것이 끝인 것처럼.



4악장. Tempo primo


그러면서 다시금 곡은 처음의 멜로디, 박자로 돌아온다.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그렇지만 사랑을 겪은 인간이 달라지는 것처럼, 1악장의 멜로디에서 조금씩 변형된 부분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변화가 느껴지는 처음은 아주 미약하지만, 점점 왼손과 오른손이 주고받으며 그 변화는 커져간다.



그리고 역시 점점 풍성해진 화음은 진정한 절정을 맞이한다. 앞의 모든 악보들이 이 부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정열적이면서도 과감하게 곡은 진행된다. 진정한 폭풍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점점 커지던 음악은, 너무나 슬프게도, 단 한순간에 끝을 맞이한다.



그러고는 다시 처음의 잔잔한 멜로디로 돌아간다.



마지막 세 번째 마디의 화음 진행이 참 인상 깊다. 끝나 감에도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였을까. 그렇게 곡은 강하면서도, 약하게 끝을 맞는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대답,


어쩌면 이 곡은 슈베르트가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악장의 기본 멜로디가 현실이고, 3악장과 4악장에서의 격정적인 멜로디는 상상 속의 사랑과 고뇌가 아니었을까.
곡에서라도 슈베르트가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는 것처럼 희망차게 끝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심했던 그는 차마 음악 속에서라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었나 보다. - 2018년 7월


 내가 이 곡을 듣고 처음 썼던 글의 일부이다. 지금 보니 우울했던 감정 때문인지 슈베르트의 슬픈 면모만 많이 봤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몇 가지 생각이 덧붙여졌다.




 이 곡을 한참 많이 들을 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이 곡을 함께 연주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상상을 종종 했었다. 같이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을 주고받으며, 가끔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으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상상을.


 하지만 그런 사랑은 결국 상상에 불과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연습을 안 해서 내가 이 곡을 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렇게 같이 연주할 수 있는 게 진짜 사랑인가,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조금씩 생겼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두 사람이 이 곡을 연주하면 손가락이 움직이다가 살짝 맞닿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슈베르트가 일부러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사랑이란 그런 스침, 살짝 맞닿는 순간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느꼈던 사랑이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집착에 가까웠다면, 맞닿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싶다. 각자의 연주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처럼.




결국 끝날 사랑일지라도,


 또 한편으론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별과 함께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 지라도 사랑했던 순간은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새로 들었다. 이 곡이 비록 슬프게 끝날지라도 끝을 향해 나아가는 중간 과정의 멜로디는 아름답듯이, 삶의 끝을 맞이하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은 아름다운 것처럼. 비록 언젠가 끝난다 할 지라도 경험했던 소중한 순간은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치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주인공인 캉디드가 세상을 겪기 전 생각했던 순진한 낙관주의와 온갖 풍파를 겪은 후에 생각하는 낙관주의가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일지라도 그 깊이가 다른 것처럼. 사랑하고 난 후의 삶이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일지라도 그 깊이가 달라지는 것처럼.



비록 실패할지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한 인간의 삶은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에 도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헤밍웨이가 적은  '패배하더라도 파멸하지 않는 것'처럼, 니체가 추구했던 '명랑성'처럼,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던 '논리보다 앞서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설령 그런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살 수는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사랑하려 애쓰는 삶을 살다 보면 먼 훗날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없지 않을까.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lorenzokim/15711040?np_nil_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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