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앤비의 호주, 너네 어디서 놀아 1. 쉐어하우스 이야기
“지난번에 보니까, 전자레인지 위에 개미가 돌아다니더라고요. 혹시 살충제 있으세요? 그럼 제가 처리할게요.”
당신의 집 주방에 개미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개미 약이라던가 살충제라던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 개미들을 박멸하자(해달라). 세 들어 사는 나로서는 집 주인인 당신들이 해주길 바라지만, 여의치 않다면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는 완곡하고도 분명한 목표가 담긴 문장이었다.
“그 개미들 안 죽여도 돼, 그전에는 더 큰 개미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개미들은 없어지고, 작은 개미들이 나타났어. 그냥 놔둬”
“……”
너무 완곡하게 돌려 말한 탓일까. 주방에 개미들이 들끓는 게 싫다고 더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나.
결국 더 이상 개미들에 대해 항변하지 못한 채, 코끼리가 내 방에 들어온 거 마냥 불편한 동거를 이어나갔다.
호주는 집값이 너무 비싸 셰어하우스 문화가 일반적이다. 집 한 채에 여러 사람을 들여 남는 방에 세를 놔 집값 부담을 더는 방법이다. 개미와 동거했다는 그 집도 아직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가 방 3개짜리 일반 가정 주택에서 남는 두 방을 유학생들이나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들에게 내놓은 것이었다.
처음 경험한 호주식 셰어하우스는 조용한 주택가에서 조용한 태국인-인도인 부부가 알콩달콩 지내고 있는 신혼집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거실을 좋아했는데, 4K 화질로 볼 수 있는 TV와 내 키와 딱 맞는 가로 길이의 소파가 내 방에 있는 침대보다 더 편안하고 포근했다. 딱히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던 그때, 푹신하다 못해 허리 부분은 매트가 꺼져버린 소파에 앉아 영어 자막이 나오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4K 화질로 보는 것이 낙이었다.
맨 처음 개미를 발견한 건, 아마 빵 집에서 4시간 동안 면접 삼아 일한 대가로 받은 에그 타르트를 버리려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었을 때였다.
정당한 보수 없이 연습이나 시험 삼아 일을 하는 건 호주에서, 워홀러들에게는 ‘트라이얼’이라는 이름으로 왕왕 있는 일이다. 원래 트라이얼은 당연히 보수와 함께 최대 2시간 이하로만 가능하지만 하지만 그 에그 타르트집은 최저 시급보다 한참 못 미치는 시급에 무급여로 만 8시간을 트라이얼 하는 걸 요구했다.
싱크대 바로 앞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었을 때는 꽤 쓰레기들이 차 있는 상태였는데, 그 위에 에그 타르트를 버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알개미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얼른 쓰레기봉투를 갈아 끼웠다. 쓰레기봉투만 자주 갈아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개미들이 득실득실한 프라이팬을 보기 전까지는.
검은색의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자 불이 한 번에 안 켜졌다. 토치를 이용해 점화시키려고 프라이팬을 들었는데 눈에 가까이 들어오니 그제야 보였다. 족히 수 백 마리는 돼 보이는 개미들이 프라이팬을 점령하고 있고, 대형 군집에 끼지 못한 낙오 개미 몇 마리가 내가 잡고 있는 손 잡이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는 것을.
‘집에 큰 코끼리가 들어와 있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낸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 말을 좋아(?) 하는 데, 나에겐 이 집에 있는 개미들이 코끼리 같은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이 득실득실한 알개미들이 너무나 불편하고 없애고 싶지만, ‘큰 개미를 겪었더니 작은 개미가 오더라’라는 집주인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미뤄두고 티를 내지 않았다. 모든 주방기구를 쓸 때마다 강박적으로 물로 꼭 헹군 다음에 사용하고, 개미가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밟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며 나는 어느덧 제대로 된 일을 시작했고 떠날 날이 다가왔다.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던 터라, 이 집을 나서면 으레들 정든 집을 떠나듯 아쉬움이 들 거라 기대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짧았던 탓인지, 조용한 부부와 더 친해지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들어가고 나온 짐이 단출해서인지 내 집을 떠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흔한 포옹 인사 한 번 없이 악수와 잘 지내라는 간단한 인사말로 헤어졌다. 이토록 미련 없이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들의 쿨한 방식인지 내가 겪은 특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개미와 우리 집. 아니 그들의 집에서 떠나왔다.
호주는 나에게 이런 곳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에 편안하면서도, 개미처럼 불편하고, 남의 집처럼 내 것이 아닌 느낌.
정을 주고 싶지만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 오늘도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