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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헉죄송 Oct 05. 2019

리틀 포레스트는 됐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우프, 한국 우프 GG_105

우프를 시작하고 열흘쯤 지났을 무렵, 호스트님께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 버전)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권해주셨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속셈이 있었기에 보러 가기로 했다.

'리틀 포레스트'는 생각보다도 더 별로였다. 낭만적이라든가, 비현실적이라든가 그런 부분은 애초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현실적인 걸 보고 싶으면 다큐멘터리를 보면 될 일이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냥 영화 자체가 재미없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 엄마와의 관계, 친구&연인 관계, 농촌에서 사는 일, 음식 해 먹는 일 등등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단절적이고 얕게 다루어지니까 몰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농사짓고 음식 해 먹는 일을 중심으로 삼고, 음식에서 비범한 디테일을 보여준 일본 버전에 비해 흡입력이 너무 떨어졌다.

후반부 들어서 벼농사, 농부분들의 어려움 얘기가 나올 때는 헛웃음도 나고 짜증도 났다. 마치

'내가 농업 농촌의 이런 부분까지도 알고 있고 신경 써서 영화 장면에 넣었어!'

라고 하는 도시인의 생색같이 느껴졌다. 제대로 다루지 않을 거라면 안 다루느니만 못하게 느껴졌다.

이런 감상들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 했다.

도시에 살 때 나는 아이스크림을 좀 많이 좋아했다. 아이스크림 3개 천 원에 판매하는 슈퍼에 가서 3개를 사면 자취방까지 걸어오는 길에 2개 먹고 도착해서 1개 먹어버렸었다. 그렇지만 6개, 9개 사면 6개, 9개를 다 먹어버릴까 봐 3개만 샀다. 그리고 냉동실에는 통 아이스크림을 꼭꼭 챙겨뒀었다. 홈플러스, 편의점에서 진행되는 여러 1+1, 2+1 행사를 매달 꼼꼼히 확인해서 사두었다. 그리고 한 통을 먹기 시작하면 그냥 한 번에 다 먹었었다. 밤 10시 넘어 산책하다가 내가 지금 딱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찾아 여러 편의점을 돌아다닐 때는 참 행복했었다.

아이스크림 중독에 가까운 나였기에 주변에 편의점이나 슈퍼가 없는 시골에 와서 약 열흘 넘게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한 게 좀 많이 힘들었다. 사실 우프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 부분을 진지하게 걱정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영화관이 있는 번화가라면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리틀 포레스트를 보러 온 것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먹은 아이스크림은 일기에 적고 싶을 만큼 행복한 맛이었다.

첫 아이스크림은 나름 힘겹게 먹었지만 농장 생활이 익숙해지면서부터는 그럭저럭 잘 찾아 먹을 수 있었다.

GG_105 양계농장은 주택 몇 채가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든 마을이긴 마을인 곳에서부터도 약 몇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우퍼의 숙소는 이 양계농장 안에 있었다. 밤이 되면 반경 몇 km 안에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농사일에 진을 다 빼버려서 지쳐있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밤에는 그냥 숙소에 박혀있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일도 몸에 익었고 마음의 여유도 많이 생겼다. 점점 바깥으로 눈이 돌다가 편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걸어서 왕복 약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다녀왔었다. 한 번은 자취할 때 좋아했던 불닭게티도 사 와서 해 먹었는데 아이스크림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행복해졌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익숙함을 맛보는 것, 완전히 새로운 생활양식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수종사에서 본 풍경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부터는 낮에도 종종 시간이 날 때 농장 바깥을 나가서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농장 주변 북한강이나 수종사 같은 명소도 좋았지만 도시 촌놈한테 특히나 재미있는 농촌의 풍경이 많이 있었다.


이런 조각상은 이런 곳에서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어린 왕자에 대한 아주 도발적인 해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들도 꽤나 허슬 하시는구나 싶었다.



남양주에는 이 외에도 클라라의 떡&커피, 두물머리 연핫도그 등 좋은 곳이 많았다.


또한 GG_105에 원래 계획 보다도 오래 머무르길 결정하고 나서는 근처 시장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일할 때 앞머리가 불편하기도 했고, 머리 감고 말리기도 귀찮았고, 나름의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발소'는 도시 살 때 갔었던 '미용실'보다 훨씬 저렴하리라고 예상했고, 군대에 있을 때는 혼자서도 머리를 빡빡 밀었었기에 생각보다 비싼 이발소 비용에 좀 당황했었다. 그렇지만 이발사분께서 내 머리를 만지자마자


"이거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네"


라고 하셔서  뭔가 신뢰도가 높아졌고 머리를 엄청 섬세하게 빡빡 밀어주셔서 만족스러웠다. 머리 길이를 균일하게 미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이때 배웠다.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여가 시간을 풍부히 보내게 되기도 했지만 일을 더 즐겁게 하게 되기도 했다.


호스트님께서 도시 촌놈을 걱정해주셔서 처음에는 이런 옷을 입고 작업을 했었다.


나중 가서는 훨씬 가볍게 입고 작업을 했다.


대학교 다닐 때 머리 손질하는게 귀찮았어서 모자를 많이 쓰고 다녔었다. 하지만 축협에서 나온 모자는 이 때 처음 써보았다.


닭이랑도 많이 가까워졌다. 농장에서 강아지들한테는

'너희는 너희 그대로 이뻐!'라는 존재에 대한 반응을 하면서 닭들한테는 

'알을 낳아줘서 고마워'라는 기능에 대한 반응을 하는 게 뭔가 좀 죄책감이 들었었다. 그리고 알을 들어 올릴 때 항상 잘해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기도 했었다.


고장났던 급수대를 고쳤을 때. 이럴 때에는 급수대와 별개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바가지에도 물을 엄청 떠왔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잘해주는 건지 모르고 마음만 앞설 뿐이었지만 지내다 보니, 양 선생님이 하시는 걸 계속 보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났었다. 닭들이 물을 마시는 급수대가 고장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이 넘쳐나서 땅이 질척거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풀 사료는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닭의 건강을 위협하는 동물(=mouse)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알게 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같이 지내도 닭들은 이뻐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농장의 생활이 점점 몸에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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