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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Jan 04. 2023

31. 남쪽 (1983)

소녀의 시선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

감독. 빅토르 에리세

출연. 오메르 안토너티, 손솔레스 아란구렌, 이시아르 볼라인, 롤라 카르도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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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의 영화 감독으로 1973년 <벌집의 정령>이라는 걸작으로 데뷔하여 10년 간격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독특한 감독이다. 2022년 새로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남쪽>은 에스트레야 라는 소녀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이다.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을 차분히 담아낸다. 영화는 상당히 감각적이다. <벌집의 정령> 때도 느꼈지만 빛과 그림자를 정말 잘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화면 구성에서 유화 그림과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로 유명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남긴다는 평가가 많다. 이런 색채감은 특히 피사체가 황색의 빛을 받을 때 그 오묘한 분위기가 더 도드라진다. 이러한 점에서 <벌집의 정령> 과 비교했을 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많은 감성적인 부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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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페인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인 195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에스트레야의 어머니가 남편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찾는 도입부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쪽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이견이 있어 다툼이 일어난 후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트레야는 어릴적 아버지의 출신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다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배경을 알게 된다. 그녀는 눈이 오지 않는다는 남쪽 세상이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영성체 날을 기념하여 아버지의 고향에서 할머니와 가정부 할머니 밀라그로스가 함께 그녀의 집을 찾는다. 상상으로만 그려보았던 세상에서 온 사람들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던 에스트레야는 밀라그로스와 같은 방을 쓰며 궁금한 점을 쉬지 않고 질문한다. 영성체 날, 그 동안 한 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직접 등장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특히 이 장면은 후반부에 이어지는 아버지와의 식사 장면에서 또 한번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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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출입이 허락되지 않던 아버지의 다락방에 들어간 에스트레야는 이레네 리오스라는 여성의 이름이 가득 적힌 종이를 발견한다. 그녀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던 중 영화 포스터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하곤 해당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레네 리오스는 무명의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오래 전에 아버지가 마음이 있었던 여자로 에스트레야는 그녀를 위해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 때부터 아버지를 보는 에스트레야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화목한줄로만 알았던 집안 분위기는 부모님의 다툼이 잦아지며 차츰 긴장감이 깃들기 시작했고, 에스트레야 또한 성장하면서 자신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심란해진다. 하루 종일 침대 아래에 들어가 숨어서 반항심을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조금씩 서먹해진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기고 얼마 후 아버지와 단 둘이서 한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된다. 이 호텔의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던 집안의 연출과는 달리 화이트톤의 밝은 느낌이 가득했다. 앞서 언급한 아버지와 춤을 출 때의 장면도 떠올랐는데, 마침 그 때와 같은 음악이 나와서 극중에서 아버지가 이에 대해 에스트레야에게 기억나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에스트레야는 이레네 리오스에 대해 아버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아버지는 그녀에 대해 두루뭉실한 거짓을 둘러대다가 화장실로 가버리며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마음 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다짐한 듯 보였지만 이번에는 에스트레야가 수업을 가야한다며 이러나고 만다. 떠나는 그녀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고, 이 대화는 둘의 생전 마지막 대화가 된다. 아버지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앓아 누운 에스트레야는 밀라그로스의 초대로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남쪽으로 떠나며 영화는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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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차분하고 한적한 흐름이 이어지다가 영화관 장면 이후에 묘한 긴장감이 깃드는 진행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아버지에게서 도통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3번의 좌절을 경험한다. 첫 번째로 이레네 리오스에게 마음을 전달하였지만 그녀에게서 온 답장은 거절이 깃들어 있었다. 두 번째로 집안에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이레네 리오스를 만나러 하루 동안 들어오지 않았던 그는 결국 기차역 근처까지만 가고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마지막은 에스트레야와의 호텔 장면에서 털어놓지 못한 그의 속마음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실패한 그의 안타까움은 에스트레야에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멋있다고 하는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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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 대한 어릴 적 에스트레야의 시선과 성장하며 느낀 시선의 대비가 잘 느껴졌다. 아이의 시선에서 본 어른들의 모습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그녀 또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 하려고 한 유년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 넓어진 시야를 통해 아버지의 모순됨이 보이기 시작하자 심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야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극을 통해 어른으로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은 남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고향이지만 에스트레야는 그 아픔 또한 받아내려고 하는,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도전같은 것이 아닐까. <벌집의 정령> 에서 느꼈던 것 만큼의 신비스러움은 적지만, 이 영화 나름대로의 매력 요소를 받아들인다면 그것과는 다른 황홀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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