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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Apr 28. 2023

34.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20)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시작

감독. 로베르트 비네

출연. 베르너 크라우스, 콘라드 바이트, 릴 다고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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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최초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로 불리는 작품이다. 1900년대 초의 고전 영화를 자주 본다면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비교하였을 때 뚜렷한 독창성을 보이며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꽤나 전위적인 형식미를 보이며 자칫 하나의 실험 영화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흔치 않은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출의 배경은 1908년경 시작된 독일 예술계의 표현주의 양식의 유행이다. 칸딘스키의 기하학적인 그림은 대표적으로 연상되는 표현주의 이미지인데, 연극에서도 표현주의 회화와 비슷한 분위기의 세트를 사용하는 등 흐름을 이어갔다. 표현주의 예술의 주요 특징은 형상이 극단적으로 왜곡되어 표현된다는 것과 배우도 마치 세트와 한 몸이 된 듯 과장된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도 사선으로 배치된 기이한 도형을 배경으로 어색하게 걷는 배우와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이에 정적인 카메라 구도가 더해져 마치 녹화된 연극을 보는 건지 영화를 보는 건지 혼란이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연출은 등장인물의 병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여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한 남자가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건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며 시작한다. 한 마을에 ‘칼리가리’ 라는 괴짜 박사가 찾아와서 박람회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깨어나지 않는 몽유병 인간 세자르를 선보인다. 알고 보니 이 박사는 세자르를 조종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이었고, 세자르의 정체가 들통나자 황급히 도망친다. 남자는 박사를 쫓으며 그가 한 정신병원의 원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병원 직원들과 함께 그를 체포하여 병원 안의 밀실로 가둔다. 영화의 반전은 이야기를 마친 남자가 사실 정신병원의 환자였고, 원장은 그가 자신을 ‘칼리가리’ 라는 가상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는 발작하는 남자를 병원의 밀실에 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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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개성 있는 서사와 명확한 캐릭터성이 고루 녹아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특히 등장인물의 유령과도 같은 화장이 굉장한 공포감을 조성했는데, 칼리가리 박사와 세자르가 눈을 굴리며 등장인물을 쳐다 보았을 때 실제로 많은 관객들이 소름이 돋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조명의 사용도 상당히 예술적이었다. 청색, 황색, 녹색 등 장소와 시간에 따라 적재적소의 조명을 배치하여 공포감 조성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이 당시 독일은 실내 스튜디오 기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이 영화를 통하여 그 결과물을 제대로 확인한 것 같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이 마치 남자의 악몽 속에서 혼란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실제로 기하학적인 도형과 사선, 곡선으로 도배된 배경의 반복을 마주하며 관객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만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영화 후반부 원장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아이리스 효과를 우상단과 좌하단에 반복하여 인물들이 상황을 상상하는 듯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전까지의 편집의 리듬보다 조금 더 빠르다고 느끼기도 했고, 자고 있는 원장의 모습이 반복 교차되어 심리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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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서사는 꽤나 급진적인 전개가 두드러지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흐름을 보인다. 남자의 이야기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병원에서, 세자르와 동일한 인물이 그의 앞을 지나자 기겁하며 굳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달려가서 사랑을 고백할 때도 여자의 모습이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눈치챘을 것이고, 후에 등장하는 의사의 진단으로 의심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남자의 허구 이야기에서 갇힌 사람은 원장이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그가 갇혀버리며 병치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제목에 대한 중의적인 해석을 해 보았다. 영어 제목에서는 ‘Cabinet’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영화에서 세자르가 갇혀 있던 관과 남자가 갇힌 관이 이에 해당하기도 하고, 또 그 관이 존재하는 방을 밀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밀실’ 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영화 속 갑갑한 인물의 심리를 잘 대변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지금껏 이 작품을 로베르트 비네 감독이 아닌 F.W. 무르나우 감독의 작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데, 이번 기회에 비네 감독의 다른 작품도 찾아보며 표현주의 영화를 더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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