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단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승민 ASM Jun 19. 2023

43. 여름 이야기 (1996)

에릭 로메르, 사계절 이야기 - 2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멜빌 푸포, 아만다 랑글레, 그웨나엘르 시몬 등


-

<여름 이야기>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시리즈 연작의 두 번째 작품으로, 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 한 휴양지에서 일어난 남녀간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가스파르는 여름을 맞이해서 브르타뉴로 여행을 오는데, 이곳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인 레나의 사촌이 살고 있는 동네다.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 레나는 7월 20일 즈음 이곳에 오기로 했고, 가스파르는 그보다 일찍 이곳에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휴양지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방에서는 기타로 작곡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레나를 만나기 전까지 두 명의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된다. 먼저 카페 종업원 마고는 우연히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서 만났다가 다음 날 해변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자 마고가 가스파르에게 먼저 말을 걸며 서로에 관한 대화를 이어간다. 가스파르가 레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고는 그와 함께 20일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는 마고는 가스파르와 함께 선원을 인터뷰하며 뱃노래를 듣기도 하는데, 가스파르는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의 작곡을 이어가기도 한다. 가스파르의 연애 코치를 자처하던 마고와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고, 가스파르는 그녀와의 대화로 마고가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

한편 마고와 함께 한 클럽에 갔다가 솔렌이라는 여성도 알게 된다.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가스파르의 말에 마고는 솔렌은 이미 가스파르에게 빠졌다고 반박한다. 며칠 후 산책을 하다가 솔렌과 만난 가스파르는 그녀의 제안에 즉흥적으로 그녀의 친척이 머물고 있는 생 말로 섬으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작곡하던 곡을 그녀에게 선물하는데, 원래 레나를 위한 곡을 다른 여자에게 들려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솔렌은 가스파르에게 원래 레나와 가려고 했던 웨상 섬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가스파르는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고 마는데, 그러던 중 기다리던 레나를 우연히 마주치고는 굉장히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간다. 그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화가 난 레나는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고, 가스파르는 세 여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채 심란한 마음으로 방에서 작곡을 이어간다.


-

영화 후반 가스파르는 마고와 만나 자신의 고민에 대해 털어놓게 된다. 영화가 진행되며 다른 여자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갈등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애쓴다. 아직 자신이 어리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있는 시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가스파르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대상을 선택하기 보다는 대상이 자신에게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또한 우연한 만남들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수와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한다고 했지만, 레나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모습과 솔렌과의 여행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가스파르에 대한 모순적인 모습이 돋보이며 그에 말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스파르가 그렇게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사랑을 경험하거나, 혹은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을 때 언제나 100%의 확신을 갖고 그 사람과 함께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관계란 항상 약간의 불안감을 유지한 채 이어지며, 불안감을 낮추고 확신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성숙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가스파르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말대로 아직 어리고 미숙한 그는 갑자기 맞닥뜨린 이성 관계에 대한 혼란을 3주라는 기간 동안 온 감정을 다해 표현한다. 그는 가장 뜨거운 계절인 여름에서 성장하는 과정에 있으며, 어떤 가을과 겨울을 맞이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은 가스파르의 혼란스러움을 마치 기타 연주곡이 흘러가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정적이고 잔잔한 연출과 함께 휴양지의 아름다운 배경과 느긋한 분위기는 가스파르가 산책을 하거나 배를 타며 고민하는 장면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다고 느꼈다. 사유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브르타뉴에 온 가스파르는 인생의 중요한 성장 과정에서 그보다 더 적합할 수 없는 배경 장소를 찾은 것이다. 바캉스로 놀러 온 그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이 기간은 일이나 공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괴로울 일도 없다. 또한 누구에게나 부여된 자유를 누리며 실수를 해도 크게 걱정할 이유도 없는 짧은 기간이다. 관계에 있어 미숙함을 보인 가스파르는 이 짧은 바캉스 기간 동안 만난 세 여자와의 경험에서 분명 실패를 겪었지만, 분명 쉽게 털어내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남을 것이다.


<여름 이야기>는 사계절 이야기 연작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상미를 선보인다. 프랑스의 여름은 이런 것인가 하는 부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배경과,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이 매력적인 합을 이룬다. 또한 그에 맞는 채도 높은 강렬한 색채도 인상적이다. 눈을 즐겁게 하는 여러 요소 때문이라도 이 영화를 다시 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4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찾을 수 있어서 새로웠고, 언제 보아도 또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42. 봄 이야기 (199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