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은 지난달, 그러니까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직장까지 버리고 국내 한달살이를 떠나온 지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도 자체를 오가며 한 달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맛집을 탐방하고, 어디를 가든 평일의 한적함을 누리며 그 어느 때보다 재밌게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지루하다니... 진심인가?
당시엔 그의 말을이해할 수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서울에 갔을 때 친한 언니를 만났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질문을 던졌다.
"난 휴가 받아 집에 하루 이틀만 있어도 무료하거든. 넌 몇 달째 천천히 여행 중이잖아, 좋은 것도 잠깐이지 계속 그렇게 지내는 게 심심하진 않아?"
"아뇨, 그렇게 느낀 적은 하루도 없어요. 겉으로는 여행하는 백수지만, 저 하루를 꽉 채워 사는걸요^^ (어쩌고 저쩌고 불라 불라) 아!......"
언니의 질문에 대답하다 말고, 얼마 전 신랑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남편과도 잘 아는 사이라,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이어졌다.
같은 환경에 놓였지만 즐거운 나와 지루한 남편, 우리는 왜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우선은 절대적 시간의 여유 때문일 것이다. 숙소와 맛집, 여행할 곳을 찾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여행 초반에는 다음 숙소 구하고 새 동네 적응하는 것으로한 달을 꽉 채워 썼지만, 그는 행동과 배움이 빠른 사람이라 현재는 시간을 훨씬 덜 쓰며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남는 시간만큼을 무료함으로 느꼈지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삶을 통해 '전업투자자'라는 새 직업을 얻었지만, 그는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주 5일 해야 할 일이 있고, 현재까지는 목표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으며, 자기만족용 weekly, monthly report를 만들며 신나게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신없이 일하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내가 먼저 퇴사를 했었기에, 퇴사 후 시간이 지나며 느끼는 불안, 공허함등의 감정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사회적 편견까지 더해지니 남편은대한민국/ 40대 초반/ 남자 백수라는 꼬리표가당당할 수만은없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하고 싶은 것, 즉 놀 줄 아느냐 여부다.
나는 업무(투자)와 관련하여 뉴스와 영상을 보고, 리포트와 책을 읽는다. 특히 투자 관련 엑셀을 만지는 게 재미있어 혼자 있으면 식사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빠질 때도 있다.
때때로 여행이 끝난 후 살게 될 집을 꿈꾸며, 부동산 앱에서 원하는 예산과 조건의 집을 뒤진다. 원하는 집을 발견하면 집 평면도에 가구를 가상으로 배치하며 인테리어를 시작한다. 가전과 가구를 찾고, 가구 색상과 분위기에 맞추어 인테리어 용품까지 서칭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주 1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조금 더 자주 블로그에 포스팅한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거나 소설을 읽는 것을 즐긴다.
일상에 위취미생활 1,2,3을 섞으면 하루가 짧아 지루함이나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다.
반면, 남편은 여행 초기 유튜브를 시작하였지만, 반응 없는 일을 계속하는 것에 지쳤는지, 그의 채널에 영상 업데이트 주기가점차 길어지고 있다. 그 외 별다른 취미가 없다.
걱정스러웠다.
이 삶이 나는 만족스러워도 남편은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이어나가는 게 그에겐 고역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안타까웠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이 시간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그가.
어릴 때 우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노는 법을 알았는데, 어른이 되면서 어려운 것들 해내느라쉬운 걸 까먹었나 보다.
남편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는 열심을 다했던 과거에 대한 대가이며 잠시 동안의 휴식이라며 그의 마음을 도닥였다. 하지만안 되겠으면 언제든 말해달라 했다.정착해서 여보가 다시 우리 가정의 경제적 가장으로서 사는 게 행복하다면, 나 역시 그 삶이 더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거제도가 마지막 한달살이 여행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고심 끝에 나온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는 한달살이를 이어가되, 이 여행을 새로운 것들 배우는 시간으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바로 골프레슨을 등록하였다. 예전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 안 했을 일인데, 그의 변화와 도전이 새롭고 멋있다.
골프입문반 2일 차
애초에 그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을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매우 적합하지아니한가. 비록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안 해보고 모른다와 해보고 나서 아니다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노년이 되었을 때, 지금의 시간 덕분에 남편은 '아, 그것을 못해봤네.' 아쉬움이 줄 것 같다 하였고, 나는 '아, 그때 그것을 해봤었지!' 성취감이 늘 것 같다고 하며 함께 웃었다.
이로써 우리 부부의'중년의 갭이어'는 이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계획했던 기간, 지역 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크게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남편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손을 꼭 붙잡은 채 각자의 현재와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거다. '무엇'이라는 명사보다는 '어떤/어떻게'라는 형용사와 부사의 빈칸을 채워가며 우리의 한달살이도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한달살기, 그거 해보니까 어때요?" 묻는 다면, "노는 법 아세요? 모르면 준비해서 나오세요." 대답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