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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19. 2024

한달살기 여행이 안 맞는 사람

즐거운 아내 vs 지루한 남편

"지루하다."

어느 평일의 한낮,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은 지난달, 그러니까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직장까지 버리고 국내 한달살이를 떠나온 지 6개월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자체를 오가며 한 달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맛집을 탐방하고, 어디를 가든 평일의 한적함을 누리며 그 어느 때보다 재밌게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지루하다니... 진심인가?

당시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아무 도 하지 못하였다.


서울에 갔을 때 친한 언니를 만났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


"난 휴가 받아 집에 하루 이틀만 있어도 무료하거든. 넌 몇 달째 천천히 여행 중이잖아, 좋은 것도 잠깐이지 계속 그렇게 지내는 게 심심하진 않아?"


"아뇨, 그렇게 느낀 적은 하루도 없어요. 겉으로는 여행하는 백수지만, 저 하루를 꽉 채워 사는걸요^^ (어쩌고 저쩌고 불라 불라) 아!......"

언니의 질문에 대답하다 말고, 얼마 전 신랑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남편과도 잘 아는 사이라,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이어졌다.


같은 환경에 놓였지만 즐거운 나와 지루한 남편, 우리는 왜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우선은 절대적 시간의 여유 때문일 것이다. 숙소와 맛집, 여행할 곳을 찾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여행 초반에는 다음 숙소 구하고 새 동네 적응하는 것으로 한 달을 꽉 채워 썼지만, 그는 행동과 배움이 빠른 사람이라 현재는 시간을 훨씬 덜 쓰며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남는 시간만큼을 무료함으로 느꼈지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삶을 통해 '전업투자자'라는 새 직업을 얻었지만, 그는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주 5일 해야 할 일이 있고, 현재까지는 목표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으며, 자기만족용 weekly, monthly report를 만들며 신나게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신없이 일하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내가 먼저 퇴사를 했었기에, 퇴사 후 시간이 지나며 느끼는 불안, 공허함 등의 감정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사회적 편견까지 더해지니 남편은 대한민국/ 40대 초반/ 남자 백수라는 꼬리표가 당당할 수만은 없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하고 싶은 것, 즉 놀 줄 아느냐 여부다.

나는 업무(투자)와 관련하여 뉴스와 영상을 보고, 리포트와 책을 읽는다. 특히 투자 관련 엑셀을 만지는 게 재미있어 혼자 있으면 식사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빠질 때도 있다.

때때로 여행이 끝난 후 살게 될 집을 꿈꾸며, 부동산 앱에서 원하는 예산과 조건의 집을 뒤진다. 원하는 집을 발견하면 집 평면도에 가구를 가상으로 배치하며 인테리어를 시작한다. 가전과 가구를 찾고, 가구 색상과 분위기에 맞추어 인테리어 용품까지 서칭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주 1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조금 더 자주 블로그에 포스팅한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거나 소설을 읽는 것을 즐긴다.

일상에 위 취미생활 1,2,3을 섞으면 하루가 짧아 지루함이나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다.

 

반면, 남편은 여행 초기 유튜브를 시작하였지만, 반응 없는 일을 계속하는 것에 지쳤는지, 그의 채널에 영상 업데이트 주기가 점차 길어지고 있다. 그 외 별다른 취미가 없다.


걱정스러웠다.

이 삶이 나는 만족스러워도 남편은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이어나가는 게 그에겐 고역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안타까웠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 시간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그가.

어릴 때 우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노는 법을 알았는데, 어른이 되면서 어려운 것들 해내느라 쉬운 걸 까먹었나 보다.   


남편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는 열심을 다했던 과거에 대한 대가이며 잠시 동안의 휴식이라며 그의 마음을 도닥였다. 하지만 안 되겠으면 언제든 말해달라 했다. 정착해 여보가 다시 우리 가정의 경제적 가장으로서 사는 게 행복하다면, 나 역시 그 삶이 더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거제도가 마지막 한달살이 여행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고심 끝에 나온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는 한달살이를 이어가되, 이 여행을 새로운 것들 배우는 시간으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바로 골프레슨을 등록하였다. 예전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 안 했을 일인데, 그의 변화와 도전이 새롭고 멋있다.

골프입문반 2일 차

애초에 그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을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매우 적합하지 아니한가. 비록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 해보고 모른다와 해보고 나서 아니다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노년이 되었을 때, 지금의 시간 덕분에 남편은 '아, 그것을 못해봤네.' 아쉬움이 줄 것 같다 하였고, 나는 '아, 그때 그것을 해봤었지!' 성취감이 늘 것 같다고 하며 함께 웃었다.


이로써 우리 부부의 '중년의 갭이어' 이어지게 되었.

기존에 내가 계획했던 기간, 지역 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남편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손을 붙잡은 채 각자의 현재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다. '무엇'이라는 명사보다는 '어떤/어떻게'라는 형용사와 부사의 빈칸을 채워가며 우리의 한달살이도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한달살기, 그거 해보니까 어때요?" 묻는 다면, "노는 법 아세요? 모르면 준비해서 나오세요." 대답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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