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었다. 지금보다 훨씬 반짝거렸던 연말에 대한 기억과 성탄절을 기다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이맘때가 되면 조건반사 작용처럼 마음이 들뜬다. 숙소에 트리라도 장식하려다 기껏해야 한 달을 위해 비용을 들이고, 이곳을 떠나면서 쓰레기를 늘리고 싶지 않아 들뜬 마음을 조용히 달랬다.
트리는 포기해도 연말 공연은 놓칠 수 없었다. 거제 인근 시에서 하는 문화행사를 찾아 ‘크리스마스 영화음악 & 캐럴 콘서트’ 티켓을 일찌감치 예매하였다. 프로그램의 선곡만 보아도 설레서 심장이 콩콩 뛰었다. 내친김에 음악회를 마치고 갈만한 꽤 좋은 레스토랑도 예약했다. 유명 셰프가 운영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녔으나 가격은 합리적이라 더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자신에게 주는 연말 선물치고 썩 좋다. 어서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말이 가까워지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흥얼거리다 말고 아뿔싸! 내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걸 깨달았다. 10개월 차 장기 여행자인 우리 부부에겐 음악회나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옷이 없다! 어머, 어쩌지.
우리의 외투 사정은 이러하다. 내겐 뒷면에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큼직하게 쓰인 검정 후드 점퍼가, 남편에겐 지난달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때 저렴하게 구입한 갈색 숏패딩이 있다. 이번 겨울 한 철 입고 내년 해외 한달살이 전에 처분할 예정이라, 질이 좋거나 예쁘진 않으나 따뜻하고 편한 옷이다.
점퍼 차림으로 연말 데이트를 나간 우리를 상상해 보았다. 콘서트까지는 괜찮은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캐주얼 패딩을 입고 때 탄 운동화를 신고 가는 게 영 마음이 걸린다. 여행 중 제멋대로 자란 머리를 질끈 묶고 평상시처럼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사진에서 본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앉아 칼질하는 나를 떠올리다 폭소가 터졌다. 우리 창피한 건 둘째 문제고, 식당 측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10대, 20대라면 어리다는 핑계와 젊다는 무기로 어디서든 당당하겠지만, 우린 40대이다. 남편 머리엔 새치가 희끗거리고 내 눈가엔 주름이 새끼를 치고 있다. 입는 옷에 따라 예전보다 훨씬 큰 각도로 사람이 달라 보이는 나이이다.
옷을 살까? 여름이라면 이미 우아한 원피스 한 벌쯤 샀을 테다. 그러나 여행 중 입을 일이 많지 않으며 부피와 무게가 상당한 겨울옷을 추가로 사는 건, 짐을 늘리고 싶지 않은 장기 여행자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1회 성으로 입고 처분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트리도 한 달 볼 것을 뭘 사냐며 포기했던 우리인데.
그냥 우리 의상과 잘 맞는 곳에서 편하게 식사할까? 네이버에서 레스토랑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르니 사유를 적으란다. 아 놔 참. 뭐라고 하나. 엄마는 사람이 늘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입고 갈 옷이 없어서요’라고 적어야 하나. 내 메시지를 읽을 그곳의 직원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크크크 또 웃음이 터졌다.
난감하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하나 없는데 콧노래가 신음으로 바뀌어 끄응~소리가 나왔다.
마음의 요동이 그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어제 하루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무수한 사람 중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사람이 있나? 없다. 단 한 사람도. 그러면서 왜 남들은 내가 무슨 옷을 입었나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지? 아이러니하다.
불현듯 이종훈 작가님의 ‘타인은 놀랄 만큼 당신에게 관심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떠올랐다. 남의 시선 신경 덜 쓰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90년대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2000년대는 지금보다 타인을 더 의식하던 시대였다. 특히 신입사원에게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민폐 끼치는 것을 죄악시했으며,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튀지 않는 게 중요했다. 판단의 기준은 집단의 연장자나 권위자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나는 내려놓고 그들에 맞추어 살았다.
사회 눈치 보고,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40년을 살아왔다. 이젠 조금 더 내 마음에 초점을 맞추며 살고 싶다. 연말 데이트 예약에 기분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왔으면서 옷 때문에 취소하려 하다니. 사실 ‘옷이 없어서’는 표면적 이유이고, ‘타인의 시선이 의식되어서’가 내면적 이유이지 않은가.
‘그런 의상으로 가면 초라할 거라 여기는 내 생각이 오히려 더 초라하다.’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번 주말, 우리는 가진 옷 중 최대한 깔끔하게 입고 당당하게 부부의 연말 데이트를 즐기려 한다. 레스토랑에 방문한 자 중 가장 편한 차림으로 들어오는 손님일 수 있겠지만, 가장 매너 있게 식사하고 떠나는 기분 좋은 고객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