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경을 넓히니 생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달을 지낼 숙소로 레지던스를 예약했다.
숙소는 침실, 서재, 거실과 부엌으로 나뉘어 있었다. 침실과 서재를 방으로 만들지 않았지만, 벽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부부가 따로 또 같이 생활하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월넛 색상의 원목 가구와 카펫을 깔지 않은 대리석 바닥이 마음에 들었다. 큼직한 욕조를 갖춘 호텔식 화장실은 감탄사를 뱉을 정도로 넓고 좋았다.
방 구경을 마치고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다는 루프탑에 올라갔다.
쿠알라룸푸르의 반짝이는 야경을 배경 삼아 파란색 조명이 켜진 수영장과 주변의 야자수가 이국적인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우와, 여기가 한 달간 우리의 집이라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어젯밤엔 달랏을 떠나기 아쉬워 잠도 못 이루었으면서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자 이곳이 마음에 쏙 들어와 어느새 달랏을 밀어낸다.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며 이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화장실에 준비되어 있는 바디워시와 샴푸의 향이 좋아 기분까지 좋아졌다.
내 몸에서 나는 좋은 향을 맡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 인근 레스토랑에서 카야버터 토스트와 반숙계란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한달살이의 첫 주는 숙소 주변을 탐색하는 시간이라, 우린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레지던스에서 1분 거리에 쇼핑몰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가 내리쬐거나 갑작스럽게 비가 오더라도 해나 비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어 외출 시 날씨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쇼핑몰엔 슈퍼와 식당, 마사지 샵과 에스테틱 샵, 한국의 다이소 같은 Mr. DIY 그리고 올리브영과 비슷한 왓슨스 등이 있었다. 이 정도면 한 달을 지내기에 불편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쇼핑몰 반대쪽 출구로 나가보니 식당가가 이어져 있었다. 한식당, 일식당을 포함하여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어, 한 달간 여기에서만 외식을 해도 충분하지 싶었다.
식당의 노천 테이블엔 여러 피부색의 사람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외국 노천카페'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닮아있었다.
숙소 밖 동네는 깔끔하고, 조용했으며, 고급졌다.
'우와, 말레이시아는 이런 곳이었구나. '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첫 한 주간 우리 부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지금은 안다. 멋모르고 갔던 첫 숙소가 있던 곳이 KL 내 특별한 동네였다는 것을. 한국에서 바로 갔다면 감흥이 덜했을 텐데 달랏에서 지내다 가서 대비효과가 컸음을.)
며칠이 지나자 우리 부부의 대화에 슬슬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우리가 쿠알라룸푸르에서 살잖아~"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생활의 질은 한국보다 나은 것 같은데 물가는 서울보다 저렴했다.
눈 뜨면 쪼르르 레지던스 옥상으로 올라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뜨거운 낮시간에는 쇼핑몰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서재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해 질 녘이 되면 다시 루프탑에 올라 일몰을 감상했다. 수영장 벤치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음악을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의 풍경은 아직 내가 꿈속에 있는 건가 헷갈리게 아름다웠다.
늘 마음이 앞서 달리는 나는 KL의 콘도 1년 렌트비를 알아보고, 한인 채용 정보까지 찾아보았다. 말레이시아의 주거비는 질 대비 저렴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서 거주나 구직을 위해 굳이 현지어를 익힐 필요가 없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정보를 모을수록 진짜 여기서 일 년 정도 살아볼까 생각이 강해졌다.
작년 국내 지방도시를 돌며 한달살이를 할 때 남편과 나는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직장에 매여있지 않은 우리가 꼭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 지방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은데 말이야. 지방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 다녀오면 되겠는데?!"
해외 한달살이 두 달 차에 우리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반드시 한국에서 살 필요가 있나? 삶의 만족도는 더 높은데 물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곳이라면 그곳에 정착하는 게 낫지 않아? 석 달에 한 번씩 한국 다녀오면 되고."
여행을 통해 삶의 반경이 넓어지니 생각의 범위도 넓어진다. 경험을 통해 앞으로의 삶에 대한 스케치가 달라진다. 아직 정착지를 결정하기엔 이르고, 올 하반기 새로운 도시들을 더 경험하고 느낀 후 우리의 앞날을 그려나가려 한다.
나오기 전에는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해외 한달살이였는데, 지금까진 만족스럽다.
도전하기로 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하고, 내 뜻에 따라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