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재택근무를 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근 일 년간에 대한 내 감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비극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할 것까진 없지만 썩 좋진 않았다.
코로나와 맞물려 벌어진 여러 상황들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몇 달간은 좋았다. 정말 좋았다. 출퇴근이 없고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 내리면서 잠옷 차림으로 메일 체크가 가능하다. 회의실을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이 뜨듯한 고타츠에 앉아서 회의 참가 버튼만 클릭하면 팀원들과 소통할 수 있다.
몇 달간 이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하다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영향으로 회사에서 나가는 사원들이 많아졌고 신규 채용은 모두 정지되어있기에 남아있는 팀원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졌다. 일반 평사원인 내가 홀로 글로벌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그 와중 회사의 상황은 이러하다.
인건비를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으니 야근, 추가 근무는 절대 하지 말 것. 정해진 근무 시간 안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코로나 영향으로 휴업을 한 회사에는 휴업한 종업원 수 x휴업 일수만큼 보조금을 준다. 보조금 신청을 위해 최소 주 1회씩 휴업하도록 모든 사원에게 안내가 나갔다. 더불어 연차도 소진해야 한다.
이번 2월은 근무일수보다 휴일수가 더 많았다.
사정 얘기 않고 이 말만 하면 다들 부러워한다.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고, 심지어 일하는 날도 100% 재택근무라니!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달라. 그렇지 않다.
억지로 휴일을 만들어서 쉬는데 업무는 많으니 하루만 쉬어도 메일이 100통 이상 쌓인다. 인원수가 부족해서 내가 쉬더라도 누가 커버해주지도 않는다. 내가 막히면 모든 일처리가 막히니 내 답장을 기다리는 연락들도 같이 쌓인다. 이거 어디 맘 편하게 쉴 수 있겠는가. 소파에 앉아 있어도 넷플릭스를 봐도 머리 한편엔 일 걱정이다. 자격증 공부, 외국어 공부, 독서, 유튜브 등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해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금방 집중력이 끊기더라.
그리고 일하는 날도 마냥 여유로운 것만은 아니다. 쌓인 메일 처리, face-to-face커뮤니케이션이 불가해지면서 생겨난 많은 사소한 온라인 미팅들.. 1시간 점심시간은 사치다. 그냥 책상에서 먹으면서 일한다.
(나는 창문이 큰 거실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이 같으니 더 전환이 힘든 것 같다. 의식적으로 분리할 필요를 느낀다.)
이 중 가장 힘든 점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평가,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승진도 연봉 인상도 작년부터 모두 멈춰져 있다. 스스로를 평가하자면 기계적으로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위한 프로젝트 진행 등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2019년 인사고과는 부서 톱이었다. 승진이 코앞인 상황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지금은 무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모의 이런 상황들은 근육 하나 없는 집순이 체질인 나를 바꿔놓았다.
일을 잊기 위해 얼마 전부터 집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용건이 없으면 밖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가던 내가 집 근처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을 할 때는 직장인의 시선으로 이미 익숙해진 풍경들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고자 노력한다. 왜 내가 일본에서 일하고자 했는지, 일본에 처음 여행 와서 느꼈던 그 감각들을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일하는 나, 평소의 나를 구분하고자 계속 미뤄왔던 관심분야에 대한 공부를 드디어 시작하려 한다. 쌓여가는 업무에 파묻혀 '나'를 잊는 일이 없도록. 대학생 때 부전공으로 늘 하고 싶었던 예술학에 대한 공부다. 대학에 편입을 할 예정이다. 정식으로 졸업하면 학예원(큐레이터) 자격이 주어진다. 일본에서는 국가자격증이라 한다.
이렇게 한 걸음 한걸음, 나는 집순이 생활을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
천성이 집순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 노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보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