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주말이다. 오늘은 주말 치고는 정말 바쁘게 보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꼭 토요일만 되면 눈이 빨리 떠진다. 더 자고 싶은데도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올려본다. 11월의 제네바 날씨는 참 별로다. 흐리고 어둡고 춥다. 아파트 7층 제일 꼭대기인 우리 집은 라디에이터가 잘 작동이 안 된다. 유튜브를 보고 배워서 라디에이터 공기도 빼 주고, 물도 몇 리터는 뽑아낸 것 같은데 아직 미지근하기만 하다. 빨래를 챙겨서 지하 세탁실에 내려가서 빨래를 돌린다. 원래 내가 빨래를 돌릴 수 있는 시간은 월요일 저녁인데- 이게 이미 1970년부터 최초의 세입자 시절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가만 보니 아무도 그 스케줄을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대로 하지만 요령껏 사람이 제일 덜 붐비는 토요일 아침에 빨래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올리고 냉장고를 연다. 그러다가 냉장고의 냉동고에 있는 얼음을 제거하고- 이게 가장 화나는 일이다. 냉장고가 오래되고 낡아서 아무리 제거해도 다시 눈꽃이 핀다. 사실 내가 이사 올 때부터 문제가 있어서 나는 은근히 냉장고를 교체해주나 기대했는데, 냉장고 손잡이만 바꿔주었다. 냉동실 문이 제대로 안 닫히는 것 같은데, 이건 부동산에 또 이야기를 해야 한다. -스위스에서 부동산에 집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확답을 받고 조치를 받는 것은 정말 큰 일이고, 힘든 일이고, 인내심을 요는 일이다. 특히 어리바리한 외국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내 손으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로) 얼음을 뜯어내고 만다.
아침을 먹으면서 한국에 엄마와 카톡으로 영상통화를 한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밥을 먹으면서 통화를 하는 게 어느새 자연스럽다. 1시간씩 영상통화를 해도 인터넷이 끊기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게 새삼 감사하다. 코로나 때문에 여기서도 친구들과 시간을 정해서 스카이프나 줌으로 같이 밥 먹으면서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고, virtual apero도 종종 한다. 직접 만나는 게 가장 좋지만, 밥을 뭐 먹는지도 볼 수 있고, 가깝게 느껴져서 좋다.
그리고는 슈퍼에 장을 보러 다녀왔다. 다음 주에 뭘 해 먹어야 하는지는 늘 고민이다. 특히나 외식할 희망이 없고, 날씨가 추워져서 더 이상 샐러드를 매끼 먹는 게 힘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오늘은 특히나 휴지 판매대와 쌀, 파스타 코너에서 나도 사재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약간 했다. (지난번 봉쇄 때, 휴지 사러, 또 쌀 사러 온 동네를 헤맨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스위스의 시민의식을 믿고 이번 주에는 사지 않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슈퍼 3군데를 빠르게 돌고 집에 와서 장 본 물건들을 정리했다.
원래는 친구와 점심 식사 약속이 있었는데,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관계로 같이 산책하기로 했다. 역시나 제네바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는-프랑스 사람이다- 1주일 동안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한 사람이 슈퍼의 계산 원외에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다. 그나마 그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했다. 둘 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밖에 나가서 뭘 하는 걸 즐기지 않는데, 그게 더 이상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게 좀 슬프다.
집에 와서는 샐러드로 저녁 챙겨 먹고- 샐러드가 차가운 음식이어서 안 먹어야지 하는데 밥하는 게 귀찮아서 어쩔 수 없었다- 샤워하고 나니 벌써 밤이 되었다. 해가 짧아져서 5시만 넘으면 캄캄하다.
참 이상한데 할 일 없는 주말 밤이면, 가끔씩 한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진다. 이제 나는 어쨌든 한국을 떠난 사람이고 돌아갈 이유도 의지도 없긴 하지만, 그곳에서 잘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를테면 같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낳아서 키우는…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을 떠난 12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삶도 멈춰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더 괜찮다는 식의 계산도 필요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많이 들었던 말 중에 또 나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부럽다’는 것이었는데 외국에 나와 살면서 그 부럽다는 의식 그리고 남과 비교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이 동네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나는 남을 너무 많이 생각하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네들이 가끔씩 부럽기도 하다는 말이다. 아마도 한국을 가줘야 하는 시기가 되었는데 가지를 못하니, 또 언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도 세울 수 없으니 막연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또 나의 토요일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