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4일
휴가가 끝나고 새해 첫 출근- 여전히 재택근무이지만-을 산뜻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블라인드를 올렸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 블라인드를 올리는 핸들이(100% 문과인 나는 한국말로도 이 '도구'가 뭐라고 불리는지 모르겠다.) 약간 뻑뻑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 막대와 핸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다시 넣어보려고 했는데 완전히 빠져버려서 내 힘으로 고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 새해인데 또 부동산이랑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우리 집은 1960년대에 넘쳐나는 주택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어진 제네바 약간 외곽의 별로 이쁘지 않은 아파트이다. 집집마다 리노베이션을 어떻게 얼마나 자주 했느냐에 따라 비슷한 면적의 아파트라도 집세가 꽤나 차이가 나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리노베이션이 된 건 이중창 밖에 없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시설은 내 짐작이지만 거의 60년이 다 되어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집세가 또 엄청나게 싼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입주 전에 점검할 때도, 화장실 변기며 세면대 그리고 싱크대, 냉장고 다 교체해야겠네 라며 부동산 담당자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때 온 직원은 우리 집 담당자가 아니어서, 실컷 이야기한 후에, '하지만 최종 결정은 네 담당자가 할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입주할 때 해 준 건, 벽에 부분 페인트칠과 라디에이터와 냉장고 점검뿐이었다.
주택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제네바에서 세입자의 권리는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기간과 월세 외에는 그다지 잘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계약기간이 길고 월세를 마음대로 올릴 수 없는 건 큰 장점이지만, 이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집의 유지 보수 면에서는 부동산 회사마다 다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세입자 권리는 거의 보장되지 않는다. 아니 보장되려면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 집에 산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wear and tear/ usure naturelle'가 이래저래 많다. 그동안 세면대 배수구가 역류했고, 욕실 벽장의 유리가 갑자기 떨어져서 나갔고, 라디에이터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말썽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블라인드 핸들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동산 담당자와 통화하는 건 경험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프랑스어는 영어보다 훨씬 포멀하고 관용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쓰듯이 개발새발 이메일을 보내면 우습게 본다고 다들 말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는 것부터가 스트레스이다. (초반에는 원어민의 첨삭도 받았다...) 또 이 'wear and tear'의 범위가 어디인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내 부주의가 아니라 교체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집주인인 부동산이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도 확답을 받아야 한다. 확답이 올 때까지 계속 긴장상태인 것이,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뭐가 되었든 기술자를 부르면 수십만 원은 기본으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답을 받으면 기술자가 나에게 전화를 해서, 방문 약속을 잡고, 방문해서 일을 진행하니 빨리 되어도 최소한 1주일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작년에 욕실 벽장 유리가 갑자기 떨어져 내렸을 때는 참 막막했다. 이미 세면대 배수구 문제로, 스위스 부동산 업자들이 상대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배수구가 역류하면 또 세면대가 30년 이상 된 거면 차라리 통째로 바꾸는 게 더 나을 텐데... 또 배관공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담당자는 오직 파이프만 교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메일이 오가고, 전화도 했지만 그녀는 확고했다. 필요하지 않은 교체라면서... 나중에는 내 전화나 이메일 자체를 다 무시했다.)
부동산이 자기들 비용으로 교체를 해 줄 것 같지 않은데, 누구를 어떻게 부르고 비용은 또 얼마가 나올지 걱정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보냈는데, 이건 또 선뜻 자기네 비용으로 욕실 벽장 자체를 교체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담당자의 기분이 좋았었나, 의외였다.
여하튼 오늘 저녁에도 앉아서 열심히 블라인드 그리고 블라인드 핸들이 프랑스어로 무엇인지 찾아서, 이게 이렇게 마모가 되었네 하며 사진과 함께 메일을 정성 들여 써서 보냈다. 자잘하게 고쳐야 할 게 많아서 아예 집안의 모든 물건/시설의 리스트와 내구연한이 표시되어 있는 프랑스어 문서도 구글에서 찾아 저장해 두었다. 이 집에서 이사 가기 전까지는 부동산 담당자에게 연락할 일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이사를 다시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깨끗하게 리노베이션이 된 집을 찾고서 거기서 세입자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싶다. 부동산 담당자는 그래서 우리 집 블라인드의 핸들을 자기네 비용으로 교체해줄까? 얼마나 빨리 답장을 할까? 안된다고 하면 이걸 바꾸는 데는 얼마가 들까? 잠이 잘 오지 않는 월요일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