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월 초의 부활절 휴가(금요일부터 주말 끼어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4일을 쉰다)가 다가왔다. 올해는 엄마가 스위스에 와 계셔서, 연휴에 코로나 시국이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체르마트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 제네바 역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꽤나 붐볐고, 연휴 특유의 설렘과 들뜸이 보였다. 4일 동안 여행의 두 사람 짐은 각자가 멘 배낭 하나씩이면 충분했다. 다만, 내가 새로 산 등산 스틱을 가방 안에 구겨 넣을 공간이 부족해서 옆에다 꽂아 넣었다. 스위스에 처음 오신 엄마는 처음 타는 장거리 기차가 좋으셨는지, 기차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을 하셨다. 스위스 최고 관광지 중 하나인 체르마트로 향하는 (물론 환승을 해야 하긴 했지만) 기차 앞에서 사진을 찍는 아시안 모녀는 그렇게 전형적인 관광객처럼 보였을 테다.
기차에 자리를 잡고, 나는 배낭을 머리 위 짐칸에 무심코 올렸다. 사실 가볍게 여행하는 나는 짐을 위에 올리거나 좌석 밑에 놓을 만큼 짐이 크지 않아서 보통 무릎에 올리거나 옆에 끼고 다닌다. 하지만 그 날은 짐이 좀 무거워서 자연스럽게 내 배낭과 엄마의 배낭을 위에 올렸다. 사실 많은 스위스 사람들이 그렇게들 하고, 친구들과 여행할 때도 대부분 짐을 짐칸에 올린다. 내 머리 위에 있는 짐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연휴 첫날 오전의 기차는 로잔을 지나면서 붐비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빈자리는 다들 차 버렸다. 로잔에서 비스프로 향하는 기차는 레만 호수 옆을 끼고 지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미 다녀온 길이었지만, 엄마는 기차 밖 풍경을 참 좋아하셨다. 날씨가 좋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로잔, 브베 그리고 몽트뢰를 지나서 기차는 칸톤 발레에 들어서고, 다시 기차 안은 좀 한가해졌다. 한가해진 기차를 둘러보다 머리 위 짐칸을 본 나는 그제야 내 배낭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배낭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그것도 스위스에서 말이다. 너무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고 같은 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지만 내 배낭은 없었다. 엄마의 배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음에도 말이다.
내가 너무 당황해하니 앞에 앉은 스위스 여자 분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걱정을 해줬다. 그리고 본인이 내리면서 역무원에게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를 해 준 듯했다. 역무원이 다가와서 이것저것 묻더니만, 여름에 특히 아시안 관광객- 다들 아는 현금이 많은 아시아 사람이란 클리셰에 충실하다-을 노린 가방 절도범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말인즉슨, 도둑들이 우리를 처음부터 노린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나마 정말 다행인 건, 주요 귀중품, 돈이나 신용카드, 신분증, 집 열쇠, 핸드폰 등등은 내 손가방에 있어서, 배낭에는 귀중품이라고 할 만 게 등산스틱 외에는 없었다. 그냥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먹을거리 조금이 전부였다. 오히려 엄마의 배낭에는 현금과 아이패드가 들어있었다. 다시 생각을 해보니 처음부터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아무래도 로잔에서 사람들이 많이 타고 15분간 정차해서 정신이 없을 때 누군가 내 배낭을 감쪽같이 들고 사라진 것 같았다.
사실 스위스에서 가방이나 귀중품을 도난당한 사람들 이야기는 종종 들었다. 또 스위스는 아니지만, 유럽 기차에서 도난사건은 꽤나 흔한 일이고, 예전에 스웨덴에 살 때 내 친구는 룬드에서 스톡홀름 가는 기차에서 25인치 캐리어를 통째로 도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고, 나는 돈 많아 보이는 관광객이 아니어서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소매치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짐칸에 있는 가방을 그냥 가져가버리는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니, 일단 체르마트에 도착해서 경찰서에 리포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역무원은 스위스 철도 사이트에 분실물을 등록할 수 있으니 혹시 모르니 등록을 해보라고 충고해 줬다.
스위스에 처음 오신 엄마를 모시고 간 여행에서, 스위스에 살고 있다는 내가 가방을 도둑맞다니, 안에 든 물건을 차치하고라도 황당하고 속이 상했다. 비스프에서 가방 없이 기차를 갈아타는 것도 이상했고 말이다. 체르마트 도착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경찰은 이런 사례를 흔히 본다는 듯 아주 능숙하게 다음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일단 당장 필요한 잠옷이며 속옷 그리고 세면도구를 급하게 쇼핑했다. 쇼핑하고 나니 그걸 담을 가방이 없어서 또 슈퍼에서 가방을 급하게 샀다. 엄마는 중요한 걸 잃어버리지 않은 게 어디냐며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했다고 생각하라 하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스위스 철도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밑져야 본전이니 분실물 등록을 했다. 분실물 등록은 꽤나 자세하게 정보를 입력하게 되어 있었다. 가방 모양, 브랜드, 색깔, 안에 든 소지품, 특이 사항 등등. 그리고 만약 분실물을 찾게 되면 어떤 역에서 픽업을 할 것인지도 정하게 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찾아주려고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모든 정보를 자세하게 입력했다. 그리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체르마트의 아름다운 풍경은, 봄햇살이 빛나던 마테호른은 나의 쓰라린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스위스 철도에서는 다음날 그리고는 1주일 간격으로 분실물의 상황에 대한 업데이트를 메일로 보내주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이메일이 와도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게 돌려줄 거라면 훔쳐가지도 않았을 테니깐.
그리고 정확히 2주 후에, 스위스 철도에서 내 가방을 찾았고 그 가방이 제네바 역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메일을 받았다. 믿기지 않았다. 가방이 돌아온다면 빈 가방만 오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돌아올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다음날 가방을 제네바 역 안내소에서 찾으라는 메일을 받았다.
안내소에 가서 10프랑을 서비스 이용료로 내고 기다리니 놀랍게도 내 가방을 돌려주었다. 역무원이 가방을 드는데 묵직한 걸로 봐서 안에 있던 게 그래도 좀 남아있는 듯했다. 어디서 가방이 발견되었냐 물으니 기차 안 화장실이었단다. 가방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거의 새것이자 가장 고가인 등산스틱 외에는 모든 물건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물론 여기저기 뒤진 흔적이 있긴 했지만 체르마트 가서 먹으려고 챙겨둔 튜브 고추장이며 라면, 잠옷까지 모두 고스란히 돌아왔다. 내가 맸던 가방이 노트북 가방처럼 보여서 아마도 고가의 노트북이나 전자기기를 기대했을텐데 그 도둑에겐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위스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안전한 나라인 건 맞지만 항상 소지품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걸 또 배웠다. 문단속하고, 물건 챙기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특히 내 손을 내 시야를 떠난 물건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그리고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도록 많은 걸 지니고 다니지 말자는 것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