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5년 한 후에 외국 단체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 중 하나는 나보다 어린 직속상관, 매니저와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자이고 비교적 빨리 입사한 터라, 나이는 많지만 입사 연도로 따지면 나보다 후배인 직원들이 종종 있었다. 또 옆 부서를 봐도 흔하지는 않지만 나이 어린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분들도 보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내 직속상관은 나보다 거의 10살이 넘게 차이가 나고 업무 경력도 훨씬 많은 분들이었기에 내 매니저는 무조건 업무경력이나 인생 경험이 훨씬 더 많은 사람, 뭔가 밑에(?) 있으면서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많았다. 한국에서 상사는 모시는 개념이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첫 매니저는 나보다 2살이 어린 철딱서니 없는 프랑스 남자였다. 그 단체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뭐 시원찮은 직업을 짧게 몇 개월씩 거쳤던 것 같다- 함께 일하면서도 우와 총명하구나 스마트하구나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고, 늘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아는 건 별로 없는 듯 하지만 할 말은 항상 많았다. 외국에선 나이를 잘 묻지 않기에, 또 서양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나이는 많겠지 그냥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여권을 보고 나보다 2살이 적다는 걸 안 후에 나는 그냥 일하는 단체에 이런 아이를 매니저 자리에 앉히다니 하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었다. 그는 매니저이긴 했지만, 한국처럼 모신다는 개념은 없기에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같이 상의하고 또 그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아주 결정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리바리하고 별생각 없어 보이는 내 매니저의 결단력과 판단력 그리고 팀을 이끄는 리더십을 보았다. 그리고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경력이 많다고 해서 좋은 매니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나이가 들수록 나보다 사회경험이 적고 어린 매니저와 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이제는 나이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어리지만 그들의 능력을 존경하고, 때로는 멘토로 생각하며 의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승진-한국과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더 많은 책임을 갖고 결정권을 갖는 위치에 오르는 것-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친한 동료 한 명은 내가 업무로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명석하고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내 매니저가 되면 좋을 텐데,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면 좋을 텐데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얻은 쌍둥이들의 육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매니저가 되는 길을 의도적으로 택하지 않았다. 또 다른 동료는 매니저로 승진했다가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상을 더 잘하기 위해서 매니저 자리를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다. 반대로 별다른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항상 기회를 엿보다 결국 매니저가 되어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만 들들 볶는 사람도 보았다. 어디든 사람들이 사는 건 다 똑같은가 보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내가 스위스에서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면, 높은 지위에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일을 10년 넘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실무자이고 내 밑(?)에 있는 직원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나 일을 할지 모르지만, 정년까지 일을 한다고 해도 내가 더 높은 자리, 매니저 자리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는 매니저로 승진할 야심도 능력도 없고, 지금 이대로 일과 내 개인생활의 균형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서 계속 일하는 게 흉이나 흠이 되지는 않는 듯하다. 대신에, 한국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월급도 자연적으로 올라가는 것도 없다. 단순하게 일하는 만큼 번다는 게 맞다.
또 내 주변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출중한 능력의 매니저들도 많고, 나보다 훨씬 나이는 많지만 실무자로 수십 년째 수직 이동 없이 일하는 분들도 많다. 실무자라고 해서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직장생활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에 굳이 조직의 사다리를 오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승진 시즌이 되면 온 부서가 들썩됐던 것 같다. 회사에서 연차가 되면 누구든 다음 단계로 승진을 해야 하고, 못하면 서럽고 쪽팔리고 비참해했다. 나 역시 그때는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과장되고 차장 되고, 또 부장 정도는 되어봐야 하지 않겠나 막연히 생각했었다. 나의 입사동기들 중 몇몇은 그 피라미드를 차근차근히 올라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그 용기를 존경한다.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지금, 그 경쟁에서 도망쳐 온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제네바의 수많은 일자리 중 하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소소하게 묵묵히 하고 있는 내가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