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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Jul 29. 2021

스위스_올해 여름

벌써 7월 말이고 나에게는 제네바에서 세 번째로 맞는 여름이다. 


2주 전에 학교가 방학을 하면서 사람들이 다들 휴가를 갔는지 제네바 시내는 조용하기만 하다. 우리 집 맞은 편의 초등학교에 조잘대며 등교를 하는 아이들도 없다. 7월 중순만 해도 주말에 가면 앉을자리 없을 만큼 복작대던 레만 호수가의 공원에도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매일 산책을 가는 공원에도 저녁이면 걷거나 뛰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요즘은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오랜만에 외식 한번 해보겠다고 점심때 식당에 갔더니 여름휴가로 3주를 쉰다고 문이 닫혀 있었다. 코로나 이전이었다면 어디론가 여름휴가를 떠나는 제네바 사람들을 대신해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그 빈자리를 채웠을 텐데, 아직 관광객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서, 미팅도 없고 이래저래 오는 메일의 수도 확연히 줄었다. 오늘은 미팅이 하나도 없었고(!), 휴가를 간 동료의 백업을 하고 있음에도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어서 나머지 오후 시간은 못 읽었던 리포트를 읽고 파일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아이도, 파트너도 없는 내가 남들이 휴가 가는 때 그 인파를 따라갈 이유가 없어서 여름에는 보통 일을 하고 남들이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휴가를 가곤 한다. 

동료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제네바 작은 아파트에서 일이나 하면서 황금 같은 여름을 보내는 나를 안타까워한다. 전혀 사실이 아니지만, 나를 놀 줄 모르는 워커홀릭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코로나 백신도 맞았으니 다른 유럽 국가에 놀러라도 다녀오지, 아니면 짧게 프랑스나 근처의 산이라도 가보지 하면서 말이다. 여기 문화 자체가 여름에는 2주 이상의 휴가를 가지고 어딘가를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의 'small talk' 주제는 항상 휴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코로나 이전의 제네바 호숫가 '비치'의 여름풍경


나도 어릴 때(?)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훈련된 '백패커'였는데, 또 30대는 누구보다 열심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살았다. 하지만 제네바에 와서 정착한 이후로는 여행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다. 물론 마음먹고 스위스 여기저기를 다녀오고, 짧은 휴가로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했지만 이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가서 좋은 풍경을 보면, 맑은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지만 어릴 때의 눈부신 감동, 화질이 안 좋은 디지털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던 그 설렘은 없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어디를 가서 있다가도 제네바에 도착해서 작은 우리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가장 편안하다. 친한 친구는 그게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사실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주 제네바쪽 론강 풍경. 보트 타는 이도, 걷는 이도 휴가를 가버렸는지 조용했다. 


어쨌든 사람들이 떠나버린 도시의 고요함을 나는 오롯이 즐기고 있다. 더 좋은 점은 올해 여름이 덥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은 양로원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노인들이 종종 있고, 폭염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더웠다.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처럼 스위스도 에어컨이 있는 건물이 거의 없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풍기라도 하나 살까 생각했는데 가는 가게마다 선풍기 비슷한 것은 모두 품절이어서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집은 동북향이라 아침에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새벽 5시만 되면 잠이 깨곤 했다. 밤이 돼도 기온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페트병에 물을 담아 얼려서 수건에 감싸고 그걸 안고 잠을 잤다. 그럼에도 너무 더워서 잠을 잘 못 자서 사무실에 출근하면 피곤하고, 또 사무실도 에어컨이 없으니 찜통이어서 힘들고...  

그랬었는데 올여름은 전혀 덥지 않다. 7월 말인 지금도 햇볕이 짱짱할 때 25-26도 정도이고, 아주 더운 날도 30도를 넘지 않는다. 대신 비가 자주 와서- 독일에 홍수가 났을 때 여기도 비가 꽤나 많이 왔었다. 레만 호수의 수위가 높아져서 산책로를 덮치는 건 처음 봤다- 오히려 쌀쌀하다. 2주 전 어느 날은  7월임에도 11도까지 내려가서 사무실에 가던 날 나는 고어텍스 점퍼를 입고, 동료들은 경량 파카, 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여름이 여름이 아니라고 날씨가 너무 별로여서 우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 짱짱한 햇볕을 보기 위해 남쪽으로 휴가를 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덥지 않고, 조용한 제네바 여름은 이제까지 보냈던 여름 중에 최고이다. 물론 날씨도 그렇지만,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다. 한국은 찜통더위가 계속된다 하고, 또 캐나다나 미국, 이라크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폭염이라는데, 여기 여름은 지금까지는 여름 같지가 않다. 기후변화가 걱정이긴 하지만,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는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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