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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Sep 24. 2023

<위대한 개츠비>와 대한민국의 자기계발서 열풍

<위대한 개츠비>, <비극>, <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읽고

신역사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변되는 자수성가 이념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학교에서는 벤저민 프렝클린의 자기계발법을 배우고, 서점에서는 각종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당시의 자기계발서에서 설파하는 ‘뚜렷한 목표를 세울 것, 인내심을 가질 것’ 따위의 조언이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전히 노력으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믿음에서일까, 그렇다면 그 성공의 기준 또한 자수성가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함께 낮아진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단지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노력으로 손쉽게 성공할 수 있던 시절이 존재했고, 지금은 오히려 비관적인 담론이, 스스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특이한 점은 자수성가 이데올로기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성장동력이 사라진 2010년대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자기계발서 열풍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쟁이 극심해진 사회에서는 희망과 목표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만 같지만, 비극적 운명을 아이들은 빠르게 깨우치고 저마다 성공의 자리를 하나둘 선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때론 어른들보다 성숙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어른은 세상과 과거를 낭만화하곤 하기 때문이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판사, 의사 따위를 말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자리는 적으며, 채워진 자리는 타인의 좌절을 의미하며, 자수성가를 믿지 않음에도 여전히 실패의 원인을 개인으로 돌리는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모순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사회는 원활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먼이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은 모순적인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로먼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며 생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하지만 자식에게는 ‘로먼 가’의 긍지를 가지고 구직을 이어가기를 종용하는데, 그 배경에는 본인을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믿음이 있다. 살아가면서 때론 모두가 특별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은 나름대로의 평범함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겠다. 하지만 모든 발화된 말이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으며, 일관된 사유 체계의 일부만을 믿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윌리 로먼의 경우, 본인을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한편 실패의 원인을 본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실패는 개인의 잘못’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로먼의 경우처럼 적어도 본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꽤나 많다.


1920년대 미국의 자기계발서에는 성공을 거머쥐기 위한 청춘의 열정이 담겨 있다. 2010년대 한국의 자기계발서에는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 담겨 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중간자를 자청할 수는 없다. 사회는 끊임없이 1등이 될 것을 요구하고, 저항하는 학생들은 결국 ‘1등, 승자, 성공’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바라는 것은 성공이지만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성공이기에 이러한 가치체계에서 평범함은 실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기에 낭떠러지에 내몰린 마음으로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그러니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 이데올로기만을 모순되게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꿈이 거짓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면 무엇을 믿어야 할까. 다만 정말로 믿음이 필요한 시기에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한 믿음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삶을 그리는 모든 말들이 그러한 시대에는 허무맹랑하기에. 그럼에도 나는 믿음이 필요할 것만 같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믿음을 갈구하지만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기존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닐까. 작위적인 최면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마음의 불편한 구석을 잠시 억누르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래서 모두가 자수성가를 믿지 않고, 자기계발서를 의심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순수한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집어삼킬 듯이 작열하는 주황빛 가로등이 무서워 집으로 달려가던 나날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별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별을 보게 되었을 때, 밝은 꿈의 흔적을 중심으로 수많은 별들이 공전하며 깜빡이며 시야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그 순간에 나는 야심만만한 과거의 나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개츠비>의 닉은 “나는 서서히 옛날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에 한때 꽃처럼 찬란히 떠올랐던 이 옛 섬이 어떤 곳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매혹적인 한 순간 인간은 이 대륙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음에 틀림없었”으리라 추정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했던 그 시절에도 살기 위해 헤엄쳐야만 했던 사람들은 있을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때 고통받는 사람들은 더 이전에는 분명 행복한 꼬마였을 것이다.


어른이 된 뒤로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식의 말을 할 수는 없다.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고, 주위의 눈치를 살필 줄 아는 나이이다.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고, 몰락의 가능성이 도처에 내재한 상황에서 우리는 믿음을 갈구한다. 마치 “이성적 또는 초감각적 자아가 자연적 또는 경험적 자아에 거두는 승리”로 규명되는 ‘숭고’처럼, 실존에 대한 공격 앞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을 버릴 수 없다. 비록 그것이 그들을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그들이 진부하고 허무맹랑한 자기계발서를 놓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곳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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