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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Aug 01. 2023

기괴함이 품은 아름다움: 오페라 <플라테>

2022년 7월 26일의 기록

처음 유럽에 가기로 했을 때 가장 기대했던 것은 사진으로만 접하던 그림들을 보는 것이었다. 이전에 오르세에서 한 층을 다 보는 데 네 시간을 썼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겠나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나는 상당한 좌절감에 직면했다. 더이상 그림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미술에 열광하는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나의 자부심이 산산조각난 것이었다. 이 자각은 여행을 하는 동안 목소리를 높였고, 로마에 당도했을 때는 강한 반발심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을 모두 지나치는 정도로 나타나기까지 했으나 나는 이 사실이 두려워 외면했다.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에 열광하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 좌절감을 선사하였다. 왜 나는 열렬히 사랑하는 취미가 없는지 한탄했다. 일련의 사고 과정을 통해 나는 나름 명쾌한 결론에 도달했다. 작년의 내가 미학을 선택한 뒤로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지금의 나는 미술을 남겨두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났다는 것. 새로운 세계는 음악, 그 중에서도 대중음악과 오페라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나를 스쳐간 작품은 여럿이지만 결정적인 판결로 이끈 작품은 두 가지인 바, 이 글에서는 그 중 하나인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에 관해 쓰고자 한다.


라모는 반가운 이름이다. 라모는 많은 불협화음과 전조로 인해 음악에서 처음으로 '바로크하다'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것이 이후 바로크 장르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에서 처음 접한 이 이름은 파리 이곳저곳에서 나를 사로잡았는데, 노점상에서 디드로의 책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를 발견하기도 했다. 강의에서 라모를 접하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직접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르니에에서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를 공연한다는 소식에 바로 예매를 했던 것이다.


<플라테>는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식에서 공연된 오페라이다. 하지만 상연되는 장소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상당한 풍자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마리아 테레사는 못생긴 공주로 이름나 있었는데 그런 공주의 결혼식에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운 님프 플라테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상연한 것이다. 플라테와 개구리 무리들은 극에서 시종일관 웃음거리가 되며 극의 모든 등장인물이 플라테를 조롱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상연된 공간을 생각하였을 때, 라모는 대담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우스꽝스러운 등장인물과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는 자칫 이 극을 가벼운 오락거리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테>는 오락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훌륭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예술사적으로 도전적 시도와 완성도를 모두 가져간 작품은 많지 않다. 바그너는 라이트모티프와 무한선율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론들을 정립하였지만 플롯이 부실하였고, 푸치니는 짜임새 있는 플롯과 아름다운 아리아를 만드는 데 능했지만 오페라 장르의 지평을 넓히진 못하였다. 라모는 음악에서의 바로크를 개척한 동시에 <플라테>를 통해 훌륭한 짜임새까지 쟁취하였다. 극은 테스피스가 사랑의 모범을 알려주겠다며 쓴 극작품에서 1막이 시작되는 액자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1막은 유피터가 유노의 질투를 해소하기 위해 플라테와의 거짓 결혼을 꾸미는 과정을 보여주며, 유피터의 강림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천둥의 신 유피터는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이는 플라테가 유피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그에게 오고 있음을 믿는 증거가 된다. 곧이어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Orage>가 연주되며 1막이 끝난다. 이 곡은 유피터의 등장을 완곡하게 예고하는 동시에 '바로크적인' 곡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라모 오페라의 정수이다.


<플라테>는 프랑스적인 오페라의 모범이기도 하다. 루이 14세가 궁정에 발레와 춤 문화를 도입한 이후, 발레곡/춤곡은 프랑스 오페라의 주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라모 또한 그의 오페라에 다양한 춤곡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발레곡은 계속되는 레치타티보로 극이 지루해지는 것을 막아주며, 이야기의 주제, 단계를 구분하게 해준다. 그래서 <플라테>는 비프랑스적인 다른 오페라에 비해 끝까지 집중을 유지하기 쉽다.


극 속 세계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점 또한 신선한 충격이다. 광기의 여신 폴리는 노래를 부르다 우스꽝스러운 애드립을 하기도 하며, 지휘자 대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한다. 이때 지휘자가 역할을 뺏겨 좌절하는 연기를 하는 장면은 인상깊다. 그리고 개구리가 오케스트라 피트에 내려가 악보를 뺏거나, 연주자 대신 연주하고, 대신 지휘를 하고 박수를 유도하는 장면도 이 극의 장난스러운 느낌을 부가시킨다.


무대 구성의 측면에서도 <플라테>는 훌륭하다. 테스피스가 새로운 작품을 쓸 것을 결심하는 '관객석'을 기본으로 하여 막이 변할 때도 관객석의 기본 틀을 유지한다. 늪지대를 이끼 낀 관객석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플라테>는 주목할 만한 아리아가 없는 것이 가장 아쉬운 작품이다. 좋은 오케스트라 반주와 흥미로운 소재, 짜임새있는 이야기와 훌륭한 무대배경에도 불구하고 내세울 아리아가 없어 대중적 인기를 끌기 힘들다. 나 또한 강의에서 라모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유럽까지 와서 '듣보작'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Orage 정도를 제외하고는 주목할 만한 곡이 딱히 없다. 그리하여 <플라테>는 지루함과 흥미로움의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끝까지 유지한다. 나에게는 흥미로운 작품이었지만,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분석적인 시선으로 작품에 접근한다면 충분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플라테>에 관한 기억을 훑으며 나는 오페라를 더 알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로마에서 본 <카르멘>에, 뮌헨에서 보게 될 <장미의 기사>, 어쩌면 대구에서 볼 <니벨룽의 반지>까지.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오페라에 흥미를 붙여가고 있다. 오페라는 종합 공연 예술이다. 그리하여 같은 작품을 다양한 시선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내가 아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작품을 해석하고 평하는 재미가 있음을 얼마 전에야 자각했다. 그리하여 오페라를 더 공부해볼 생각이다. 언젠가는 훌륭한 비평가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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