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을 읽고
<이방인>을 챙겼다. 다음 날 일정이 있지만 가방에 짐을 더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미묘한 감정만이 남아 있다. 라인의 황금 전주를 들었을 때와 비슷하다. 나의 예술적 영혼이 <이방인>에 감응하고 있었다.
<이방인>에서 죽음은 이야기를 이끄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죽음을 직시하기 전까지 삶은 꽤나 무의미해 보인다. 삶을 비출 조명이 없을 때 모든 노력은 불순하다. 명예욕, 안정적인 삶을 살겠다는 불안으로 추동되는 삶은 현실의 삶을 파괴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삶의 끝에는 죽음이 아닌 성공이 있어 희생적인 삶을 정당화한다.
소설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전통을 계승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단 한 번 주어지는 삶이 특별한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 주인공 뫼르소는 목적을 잃고 즉흥적인,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에서 촉발된 어머니의 존재는 그를 떠나지 않는다. 죽음 이전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존재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가 아랍인을 살해한 뒤 감옥에 갇히게 될 때도 죽음을 직면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 그에게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죽음을 직면하는 데서 태동하는 삶의 가치나 영겁회귀 속 가치를 가지는 삶이라는 말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별 이유는 없다. 다소 이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카뮈가 구성하는 소설의 체계는 매력적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다가도 어떤 지점에서는 말을 쏟아내며 독자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일종의 의도된 일탈인 것이다.
<이방인>을 읽고 난 뒤 <결혼. 여름>을 다시 읽었다. 다시. 그때 나는 이 책이 프랑스 삼대 산문에 손꼽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같은 삼대 산문으로 불리는 <지상의 양식>에서 훨씬 의미있는 문학적 경험을 했다. 나의 글쓰기 모범엔 지드가 있었다. 카뮈는 그곳에 없었다.
다시 읽은 <결혼. 여름>은 아름다웠다. 작가의 개인적인 고백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왔기에 <이방인>의 탄생 배경을 알게 된 지금, 이 책은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카뮈의 매력을 조명하자 책 또한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이 책도 가방에 넣었다.
태동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떠한 글을 써야 하는가. 나만의 문체를 만들고자 했었다, 요 몇 주 간. 한국소설의 녹진한 몰개성에서 벗어나 나만의 글의 외형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나는 의식의 흐름과 비슷한 무언가를 생각했었다. 결론적으로, 작가가 한 문장을 쓸 때 응축된 생각을 글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가령 위의 “삶을 비출 조명이 없을 때 모든 노력은 불순하다” 문장을 쓰며 나는 외적인 동기에 의해 고양되는 우리네 삶을 지적하고 싶었다. 안정적인 ‘삶’으로 일컬어지는 것 중에 ‘삶’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모순을 꺼내 보이고자 했다. 그래서 ‘불순하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 속에 좋은 글이 탄생한다는 믿음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글의 흐름을 유지하며, 글을 쓸 때까지의 생각을 녹여내고자 했다. 혼란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깔끔하게 떠오르는 상은 선택받은 문장에서만 엿볼 수 있기에.
카뮈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하였다. 작가가 침묵을 유지할수록 함축된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건조한 서술을 선택하여 독자가 서술의 이면, 인물의 배경을 떠올리게끔 한다. 어떠한 방법이 옳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더욱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주목했으면 하는 부분에 집중하게끔 할 때 어느 정도까지의 개입이 적절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작가의 선택을 보여주고플 뿐이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흐름’을 좋은 글의 제일 원칙으로 삼고 있다. 중학생 때 나는 디킨스와 울프에게 글을 배웠다. 독창성을 찾고자 하는 의식에 좋은 글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 담담하게 고백하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글을 쓰지 않는 모든 삶에서 가치와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삶의 가치를 느낀다. 이외의 모든 순간은 가치가 없다. 나만의 표준을 세우고 싶다. 나는 발악한다.
카뮈를 사로잡은 단어는 ‘낯섦’이다. 불순하게 자전하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방향을 찾는 뫼르소는 낯선 인물, 이방인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을 낯설게 보기 시작한다. <이방인>은 ‘낯설게 하기’ 방법으로 뫼르소의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어가 없다. 내게 단어랄 것은 ‘세계’밖에 없다. 나는 이 말에 심취해 있다. 감정, 사상, 배경, 의지 등을 포괄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재현하는 개인적인 가상의 공간으로서 세계는 존재한다. 가치관, 생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총체적인 나의 정신은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만 어렴풋이 짐작될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는 행위도 태도도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전지적인 세계에서 관조하는 소설양식을 창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나만의 서술어를 찾고 싶다. 어쩌면 스펙타클과 시뮬라크르, 쇼펜하우어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파편, 파상실재, 허위욕구, 충분근거율, 삶에의 의지와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잘 모르겠다. 글을 어떻게 끝내야 될 지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도. 불안이 나를 스치듯 지나간다. 어쩌면 불안을 나의 뮤즈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글을 쓰기 시작하며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음을 느낀 적이 종종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한켠에서 나는 묵묵히 관조하다가도 다시 현실의 일원으로서의 참여를 반복했다. 나는 두 세계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어느 하나 선택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갈 곳 없는 사람이다. 외롭진 않다. 단지 ‘나의’ 무언가가 없을 뿐이다. 나 또한 이방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