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문화비평과 Jungle의 "Back On 74" 음악 비평
미국 문화에서 1950년대는 낭만의 시기로 그려지곤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혜성같은 등장과 함께 떠오른 록 음악과, 전후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에 기반한 근교 생활의 낭만, 하이웨이스트 팬츠와 마릴린 먼로 스타일로 표상되는 이 시기는 이후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수차례 재현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 되기 마련이다. 1900년대 후반에 등장한 향수영화는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을 중심으로 1950년대 미국을 낭만화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의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러한 향수영화의 의의로 "번지르르한 이미지의 형태로 과거를 소비하는 법"을 제시한 점을 꼽는다. 그 덕에 다양한 포스트향수적 진술과 형식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낭만은 실존적 고민을 제거한 시각적 이미지에 기초하며, 그러한 이미지를 환기하고 나아가 유지하는 것은 음악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전 시대에 대한 그리움은 주로 패션 트렌드를 통해 표출되며, 음악은 그 근거를 자처한다. 2010년대 말부터 전세계적으로 복고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고 패션에서는 시티보이, Y2K, 올드머니가 순차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음악에서는 2019년을 강타한 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를 비롯하여 두아 리파의 <Future Nostalgia>와 실크 소닉의 "Leave the Door Open"이 이전 세대에 대한 향수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였다. 국내에서는 잔나비가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적 언어를 결합하여 70년대 한국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낭만에 내재한 도피적 충동은 현실과 복고의 충돌을 야기한다. 현실의 라이프스타일과 합치되지 않는 레트로 열풍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한창 복고 트렌드가 대두되던 2021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얻기 위해 필름을 현상해야 한다는 불편함으로 이제는 그 인기가 시들해졌다. 결국 성공적인 복고를 위해서는 이전 세대의 문화를 차용하는 데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적절하게 가공하여 선망의 대상으로 포장해야 할 것이다.
음악 시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르음악의 경계가 팝과 흐릿해지고 있다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듣기 좋은 음악'이 소비되는 시대에 마이너함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음악은 완성되지 못하는 까닭에서다. 다양한 아티스트들은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락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고유성이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유행하는 복고 음악 또한 장르음악의 특징을 덜어내는 한편, 팝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한편으로 복고 유행이 정말로 대중의 호오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시간의 광휘 아래 아름답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겠는가. 당대의 고민이 제거된 과거는 매력적이고, 대중이 현재의 복고에 피로를 호소한다면 다른 시대를 선망의 대상으로 가공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동경한다고 말할 때 그 이유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그 애틋함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그 선망에 실체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런 실체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영국의 밴드 정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항하며 시간의 흐름 아래 잊어버린 가치들을 다시 조명한다. 2023년에 발매된 그들의 곡 "Back On 74"는 70년대의 댄스 음악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며 온라인 상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댄스, 팝 소울, R&B 장르의 이 곡은 코레오그래피로 구성된 뮤직비디오가 바이럴되며 틱톡을 중심으로 다양한 소셜 미디어로 확산되었다. 포브스는 "Back On 74"를 두고 MTV의 시대 이후 잃어버린 음악과 뮤직비디오의 연관성을 다시금 확보하는 음악으로 평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정글의 복고는 MTV 시대에 성행했던 '안무'를 다시금 곡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한편, 댄스 음악의 섹슈얼리티적 본질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복고 유행이 팽배한 지금, 복고의 본질적 가능성(복고의 소재로 삼는 과거/역사에 내재한 의미)을 상기시킨다.
https://www.youtube.com/watch?v=q3lX2p_Uy9I
"Back On 74"의 안무는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평론가들은 자연스러운 원테이크 촬영 기법의 사용과 가사의 내용을 적절하게 형상화하는 안무의 조화를 극찬한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카메라와 그 앞에 놓인 댄서들은 제한된 인원으로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다. 그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차용하며, 한 장면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댄서가 다른 장면에서는 엑스트라를 연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그들이 넘나드는 아이덴티티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주변성과 중심성, 무위와 갈망 등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절에서 엑스트라 역을 맡은 여성은 2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애를 받는 인물로 변모한다. 선두의 남성은 여성을 사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몸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사랑은 좌절된다. 이 장면에서 남성 댄서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운 접근과 강렬한 의지의 표명, 접근과 회피의 뉘앙스를 모두 가지고 있다.
특정한 인물을 집어낼 수 없다는 점과 각 인물들의 역할이 끊임없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부정성은 마치 인생처럼 극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불어오는 바람은 이내 사라지고, 새로운 바람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처럼 "Back On 74"에서는 특정 시점에서 이야기를 주도하는 인물이 또 다른 시점에서는 군중으로 전락한다. 음악은 “Where did it / go-"라는 구절을 기점으로 급변하고, 행복과 결부된 회상의 색채는 지워지며 대신 허무와 회한이 느껴진다.
"Back On 74"의 안무는 다양한 정체성을 넘나들며 성소수자의 역사와 함께 발전한 댄스 음악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댄스 음악의 기저에 있는 소수자성은 정체성의 혼란, 억압된 욕구,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구체화된다. 댄스가 주류 장르로 부상한 이후로 댄스 음악의 이러한 특징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일반적인 댄스 음악에서 소수자성을 도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동시대의 비욘세, 트로이 시반은 댄스 음악의 소수자성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정글은 "Back On 74"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과 확고하지 않은 실존적 위치를 질문하고자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53QJYP-lqY
한편으로 "Back on 74"의 안무는 의미와 몸의 움직임을 화합하였다는 점에서 고도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동일한 동작의 반복은 꺼려지는 것이고, 그 덕에 모든 동작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는다. 인물과 곡은 수많은 아이덴티티를 차용하며 소유와 부재, 획득과 좌절, 주인공과 들러리, 성공과 실패, 행복과 후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데, 평범한 안무로는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춤이 음악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시대를 살아가는 만큼, 우리 주변에는 좋은 무용이 많다. 음악과 교감하고, 신체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들이. 한편으로 “Back on 74"의 안무는 뮤직비디오 밖으로 넘어올 수 없는 운명이다. 밴드의 매 공연마다 댄스팀이 춤을 춘다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이겠는가.
동시에 어느 무대에서건 재현될 수 있는 춤이 있다. 노래와 함께 연주될 수 있는 춤이 많은 까닭에 재현되지 못하는 무용에 의문을 표하지는 않으려나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Back on 74"의 무용은 더 큰 가치를 가진다. 의미를 가지는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반복하여 재연되는 연극처럼, 패턴이 되어 버리면 창작과 수용이라는 예술함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겠는가. 마치 <빈 공간>에서 피터 브룩이 지적하듯,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끼고, 배우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이 음악에는 춤이 함께 해야 해” 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매 순간 동일한 무대를 만들지 않겠는가. 동작이 맥락과 떨어지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즉흥, 새로운 변주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겠다. 모든 공연은 동일한 것, 지루한 것을 향해 가고 무대를 차지한 무용은 연극 텍스트의 단어 하나하나와 달리 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공연의 수명은 그 끝을 향할 것이겠다. 그렇기에 반복은 피하되, 감상자 개개인이 공연을 보며 춤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음악은 새로운 차원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2024년 패션 트렌드로 많은 사람들이 1990년대 미니멀리즘을 예측하고 있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갈망하고, 새로운 것의 창안은 어려운 일이기에 미래를 향한 첫걸음은 기존의 것들을 변형하는 데서 시작하곤 한다. 복고의 의의와 한계가 어떠하든 모든 시대의 복고 유행은 현재가 바라보는 과거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복고 유행에서 재현의 대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듯 재현의 방법 또한 변화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발전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행의 소재 변화가 그러하듯 다양한 선택지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현실의 삶이 너무도 힘들어질 때, 과거에 보여주었던 맹목적인 과거에 대한 재현이 주류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정글의 "Back On 74"가 시사하는 것은 복고 열풍에 시간의 흐름 앞에 모두에게 뒷전이 되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조망하는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잃어버린 안무의 개연성과 고유성, 댄스 음악과 정체성 문제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