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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7. 2022

15. 유배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Burgos에서 San Bol까지 약 26km

여전히 부르고스에서의 밤에 머물러 있지만, 순례자는 길을 나선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정이지만, 또 새로운 상황을 마주한 순례자는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과 흥분이 앞선다. 경위는 이렇다. 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오자, 이탈리아 친구 라파엘라는 내일 다 같이 묵을 숙소를 예약했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나은도 내일 이탈리아 일행과 찢어질 생각이었는데, 그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이미 예약을 했다.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으나, 최대 열 명이 숙박 가능한 숙소에 우리들이 전부 들어가는 거라, 거길 간다면 다른 순례자들이 없는 우리들만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내가 계획한 여정을 하루 더 포기해야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고마움이 남는 친구들이다. 결국 마음을 바꿔 내일도 같이 지내기로 했다.



문제는 이다음에 생겼다. 부르고스에서 묵던 숙소는 오전 6시 이전에 먼저 출발할 수 없다. 나는 수업을 위해 예약한 숙소에 오전 11시까지는 도착해야만 하고, 다섯 시간 만에 가기에는 다소 벅찬 거리였다. 숙소 관리인에게 사정을 설명했으나 거절당했고, 나는 질문을 바꿔 그럼 오늘 숙소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는 건 가능하냐 물었고, 문제없다는 그의 말에 급하게 짐을 싸고 나왔다. 내 가방에는 야영을 위한 장비들이 있다. 숙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순례자는 아무도 없는 밤의 산티아고를 걷고 있다. 밤새 걸을 수는 없겠지만, 두세 시간은 거뜬하리라.




그렇게 인간의 초월적 가치가 점차 사라져 간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임을 증명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신의 창조물에서 주인 없는 유기체로 전락시켰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 분석은 사랑이라는 기적이 결국 성욕 덩어리에 불과함을 역설했다. 이내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신을 죽였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세상 가장 숭고한 사랑 중 하나인 모성애조차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행동 양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종국엔,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인간에게 영혼이란 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신비가 그렇게 하나 둘 해체되면서 나는 살아갈 이유를 잃고 계속 꼬구라지고 있다.


인류의 탄생 이래 역사가 24시간이라고 가정할 때, 산업화된 도시의 탄생은 35초 전조 차 되지 않는다. 지구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45억 년이 24시간이라면, 인류의 초기 등장은 약 1분 30초 전이다. 지구는 빅뱅 이후 우주가 탄생한 지 8시간 전에 태어났다. 시간의 급류를 벗어나 공간의 틈새로 오면, 지구는 나라는 사람이 7,000,000여 명 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 그런 지구가 109개가 뭉쳐야 태양의 크기가 될 수 있다. 태양을 감싸고 있는 우리 은하의 크기는, 태양이 2,100개 모여야 겨우 직경을 가로지를 수 있는 정도다. 얼마나 하찮은가? 우리가 마주치는 개미나 모래알은 작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세포와 세포가 볼 수 없는 원자조차도, 광막한 우주를 마주한 인간의 왜소함에 비하면 훨씬 거대하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오전 10시 30분이 막 지났다. 간밤에 약 10km를 걷고 도착한 마을에서 침낭을 펴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걸은 결과였다.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숙소에서 기르는 강아지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수업을 마치고 얘기를 들어보니 다른 이탈리아 친구가 숙소까지 오면서 만났고, 강아지는 그대로 그들을 따라왔다고 한다. 이제 막 2개월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생명체는 하루 종일 헤맸는지 물 마실 때가 아니면 계속 사람 근처에 자리 잡고 잠을 잔다. 친구들은 그 아이에게 산티아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마주친 강아지이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산티아고는 앞 발가락이 5개지만, 뒷 발가락은 6개다.

저녁이 되기 전까지 산티아고는 모든 일행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 아이도 인간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게 많이 무서운지 우리가 모두 숙소 안에 들어가 있을 땐 자기도 밖에 있기 싫은지 아직 오르기 어려운 높은 건물 입구 턱을 어떻게든 오르려고 낑낑대곤 했다.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식탁 아래까지 오길래 사람 음식을 탐하는 건가 했더니, 조금 담아준 음식은 전혀 먹지도 않고 근처에 누워서 다시 잠을 잔다. 그렇게 우리의 이쁨을 받으며 산티아고는 들판을 헤매는 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모두 쓸어 담는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노래를 부르는 숙소 관리인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친구들


문제는 잘 시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우리는 숙소에 머무는 손님이기에, 관리인의 허락 없이 그 아이를 안에 들일 수 없다. 그리고 관리인은 안에 들이지는 말라고 거절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우리 모두가 침실에 들어가니, 산티아고는 건물 밖에서 불안함에 계속 낑낑댄다. 이미 오랜 거리를 걷고 배를 채운 순례자들은 피로에 약하다. 이미 잠든 친구들도 있을뿐더러, 강아지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친구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더 이상 산티아고는 이쁨 받는 강아지가 아니라, 수면을 방해하는 징징댐의 원인이다. 일찍 잠들었다 이내 산티아고의 울음에 깬 나는 그를 충분히 만져주러 건물 밖으로 나가곤, 그렇게 몇 분을 있다가 침대를 포기하고 숙소 앞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랑 자도록 하자, 아가야.




사람은 모두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품고 살지만, 그 이야기의 원천은 똑같다. 우리가 신비하다고 말하는 모든 사건들이, 결국 생체 기계로서의 생존 본능과 그를 아버지 삼아 태어나, 그에게 (혹은 그 무의미함에) 저항하는 의식의 합주일 뿐이다. 사랑의 원천이 생물학적 반응과 계급투쟁에 불과하다는 초라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믿음의 원천이 자의식이 느끼는 생물학적 필멸 성에 대한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불편해 초월자의 서사를 써내려 간다. 다른 생물들과 스스로를 구별 짓기 위해 영혼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나, 과학적 증명까지 가지 않아도 모순성에 빠져버리는 모래집에 불과하다. 원초적 행동 동기에서 파생된 이 모든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고귀하게 여기고 합리화한다.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인 이유는, 합리적인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합리화를 할 줄 알아서가 아닐까?


모든 인간은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만 모두 다른 행동 방식이 있고,

모든 인간은 불평등한 삶을 살지만 모두 같은 행동 동기를 지닌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이 너무 무서워 입을 틀어막으라고 한다. 생각을 멈추라고 말한다.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자고 한다. 나는 인간을 끌어내리려는 게 아니다. 이 글은 삶을 비관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다. 나는 인간성을 부정하려고 순례길에 오른 게 아니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싶은 거다. 내가 가진 의구심들을 해결하게 위해 왔다. 하물며 스스로 입을 벌려 파란 약을 씹어 삼키라는 말인가? 당신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미 내던져진 질문을 없는 셈 치고 살아가란 말인가?



이탈리아 친구들 그리고 나은과 보낸 마지막 만찬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의 행동이 공감과 선함에서 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나는 선함의 신비를 무너뜨렸다. 포유류는 보호자로부터 신체적 접촉을 자주 받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아무리 숙소 앞 들판이 안전하더라도, 혼자 남은 강아지가 두려움에 짖는 대는 건 생존 본능이다. 이미 오랜 시간 같이 지내다가 떠나보낸 강아지가 있는 나는, 산티아고가 불안감에 밤새 목이 쉬도록 울 거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고 그것은 분명히 나를 포함한 순례자들의 수면에 방해가 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으면 산티아고의 울음소리가 불편하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그저 그 아이가 유기체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행동이다. 나는 그런 그의 생물학적 행동 방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를 만져주러 나갔을 뿐이다.


또한 나는 이 상황의 해결책을 두 가지 알고 있었는데, 첫 번째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와 텐트에서 자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텐트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렇게 결정할 '역량'이 된다. 두 번째는 다소 극단적 이게도, 그를 죽이는 것이다. 놀라지 말고, 일단 나는 이런 방식으로 여러 해결책을 모색해두는 편이다. 산티아고의 우는 소리가 안 들릴 거리에 매어두려면, 한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 여기는 건물 한 채가 전부인 광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멀리 보내든 정말로 죽이든, 내일 잠에서 깬 친구들이 강아지의 행방을 물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이고 (나는 거짓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이것도 이후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결국 이 산장에서의 숙박은 별로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할게 뻔하다. 무엇이 내 삶에 더 발전적이고 효율적인지를 따져보면 결국 첫 번째가 맞다. 그런 계산 결과일 뿐이고,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는 아니어도) 이런 계산 과정을 거쳐 선행을 한다고, 그게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시켜서 하는 선행은 순수한 게 아니라 덜 고려된,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다.  





2주를 넘게 순례길을 걸은 이제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인간성, 영혼, 의식, 이타심, 정, 사랑, 야망, 종교, 그 모든 인간의 신비로부터 유배당한 의식체는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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