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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1. 2022

20. 서사와 은유의 존재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0일 : Ledigos에서 Sahagun까지 약 15km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제 잠들기 전에 맥주를 한 잔 마신 덕인지 야영하면서 처음으로 중간에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으로 나와 짧게 스트레칭을 하고 텐트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잠결에 서둘러서 가방을 꺼내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늦춘다. 어차피 시간 많으니까,라고 혼잣말도 한다. 야영지를 정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장비들을 꼼꼼히 다루는 것이다. 아무리 무게 변화가 없더라도 장비들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 공간 확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텐트 정리를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가방 위에 올린 내내 균형이 안 맞아서 걷기가 불편할뿐더러, 모든 장비들 중에서 다시 정리하기 가장 번거롭다. 처음부터 제대로,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순례길을 거닐면서 잊을만하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정돈된 배낭을 뒤로 메고 순례자는 길을 나선다.



오늘은 꽤나 기념비적인 날이다. 곧 도착하는 Sahagun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중간 지점이라고 불린다. Saint-Jean-Pied-de-Port에서 시작하면 딱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다른 순례자들보다 느린 속도로 걷고 있는데도 발걸음이 무겁다. 나에게 허락된 길의 절반을 걸었지만 아직 나는 답을 찾기는커녕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속도를 늦추고 싶지는 않다. 미루고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중에 벌어질 일을 지금 걱정하지 말자. 나머지는 길이 가르쳐 줄 것이다. 비록 그 끝이 사형 집행이라 할지라도, 순례자는 걸어야 한다.




모든 동물과 인간의 행동 동기는 본질적으로 같음에도, 그 결과물은 인간을 지구의 신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그중에서 가장 차별화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인간은 서사적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언어나 문자가 생기기 전부터 이야기는 존재했다. 우리는 이야기에 살고, 이야기에 죽는다. 이야기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겪은 일을 남들에게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고, 듣는 사람들은 그 장면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서 전달할 수 있다. 서사는 단순히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모든 상호 작용에 존재한다. 사람의 입에서 만들어진 모든 신비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저 생체 기계로서의 본능적 행동들의 경박함을 감추기 위해 (의식이 바라보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의식체는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는 곧 의미 그 자체다.


주변 사물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인지할 수 있게 된 의식체는 인간이 생물로써의 역할(DNA 복제 및 계승)에 그친다는 사실이 너무 경박하고 역겨웠으리라, 우리가 선악과를 입에 댄 그 순간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생물적 한계와 무력감에 구역질이 나왔으리라. 본능을 걷어내고 나면, 삶은 그저 고통뿐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두려웠으리라. 그래서 의식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방패인 합리화를 통해 무력감과 고통이라는 바닥을 이야기와 의미로 덮어 씌운 것이다. 그렇게 유전자 계승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이야기가 되어 가정에서 공동체로, 사회로, 국가로 뻗어나가서는 도덕이 되고, 문화가 되고, 종교가 되었다. 이야기를 벗겨내면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자면, 의미를 가지는 모든 행동에는 서사가 필요하다.




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 묵게 될 숙소의 위치를 미리 파악한 뒤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다. 소가 열리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편하게 작업을 한다. 내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이 종종 보인다. 그들과 짧은 잡담을 나누고는 이내 떠나보낸다. 나와 마주쳤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어딘가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을 거란 건 알지만, 다시 혼자 남았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않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이 배가 된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마주치지 못하고 잊히기 마련이다. 그런 헤어짐을 배우러 순례길을 혼자 걷지만,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감정이지 않을까. 일을 마치고 마을을 둘러본다. Sahagun은 큰 도시는 아니지만 촌락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기준 중에 하나로, 은행이나 현금 입출기가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 골목을 걸으며, 다음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혹시 반가운 얼굴이 보이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그런 삶이었다.





아가페적 관계를 다루면서, 서사성을 짧게 언급했었다. 병적인 경우를 설명하면서 나온 단어이기에 안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오히려 유익하고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과하면 안 좋은 법이다.)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관계는 껍데기일 뿐이다. 가족을 좋은 가족으로 만들고 묶어주는 핵심은 유전적 유사성이 아닌, 좋은 이야기가 쌓였느냐이다. 유전적 유사성은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앞쪽에 출발점을 두는 이점을 제공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쌓지 않아서 오히려 평범한 관계보다 더 심하게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를 쌓는 데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 같이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긴다 하여도 이야기가 쌓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육체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리 짓는 행동일 뿐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만남은 애초에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함이 아닌데 어떻게 이야기가 쌓인단 말인가?


그래서 서사성은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서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서사를 써 내려가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애초에 상호적 관계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타인은 그저 자기의 서사를 채우기 위한 도구, 투사체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사람들을 생명체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기준'이 명확하다면 그런 행동에 끝이 있겠지만, 애초에 스스로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을 사람들이 저런 걸 고민 할리가 만무하다. 서로가 서로를 각자의 서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합의를 하는 건 자유지만, 그래 놓고 진정한 관계를 갈망하는 것도 역겹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고 싶다면 타인의 이야기를 가지려고 욕심하면 안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심긴 당신의 이야기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먹고 자라날 것이다. 이야기가 잘 크는지 아닌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다. 야기를 가지려 욕심하지 마라.




숙소에 들어와 점심을 먹는다. 근처에 큰 마트가 있어서 오랜만에 샐러드와 고기를 듬뿍 먹을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숙소에서 묵기에, 저녁엔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미사가 끝나면 늘 순레자들을 축복해주는 시간이 있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예배실에서 나온다. 이전에는 내가 방황하는 이유를 몰라서 축복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혹은 그냥 뭔지 모르고 가서 받았지만), 지금 안다. 나는 신의 축복이 필요 없다. 내 길은 더 험하고 아파야한다. 지금까지 절반을 걸어오면서 좋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온도에 취해 붕 뜨지 않기를. 내가 어떤 갈증으로 순례길에 올랐는지 잊지 않기를. 내가 답을 찾길 바라지만, 두려움 때문에 오답을 답이라고 우기고 최면하지 않기를. 싸우러 왔다면 도망쳐서는 안된다. 계속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예전에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협화음들이 은유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되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전거로 오르막을 달리고 나면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데, 내리막에선 페달을 밟지 않아도 순식간에 바닥까지 내려온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오르는 길은 험하고 오래 걸리지만 추락은 한순간이다,라고 당연한 과학적 법칙에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근데 자연법칙과 인간 법칙은 좀 다르지 않나? 속담이나 비유, 시인들의 노래, 연인을 홀리기 위한 표현들, 이런 것들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나? 이렇게 복잡한 고등 사고 유기체들의 예상할 수 없는 행동에서 나오는 모든 불협화음들이, 정교한 자연법칙에 종속된다고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 않나?


렇게 생각하면서도, 따지고 보면 또 그렇게 다를 게 있나, 하고 코웃음 치게 된다. 애초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모든 신비를 걷어내면 그저 자연의 일부 아닌가? 그 아이러니함이 웃기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대단하고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사실 모든 생물체 중 가장 추한 유기체라 은유로 논거 할 수 있다니. 모든 신비를 걷어내서 자연 그 자체로 추락해야만 은유당할 자격이 생기고, 은유를 통해 다시 존엄성을 되찾는다. 도종환의 덩굴이 담을 넘을 때, 먹먹한 간장 속에서 알들을 끌어안고 불 끄고 잘 시간이라 말하는, 안도현의 게를 볼 때, 홀로 서있기에 더 아름다운 나태주의 꽃을 맡을 때. 그것이 은유가 아닌 자연 스며든 법칙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시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안에 인간 자체가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 문장이 알을 깨고 나온다. 너는 시다. 너는 정말로 시 그 자체다. 그러니 너 스스로를 은유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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