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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3. 2022

22. Vanitas Vanitatum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2일 : El Burgo Renaro에서 Mansilla de las Mulas까지 19km, 다시 Leon까지 18km, 총 37km.


다른 순례자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시침은 숫자 6에 다가가고 있었다. 심지어 전날 침대 위에서 쉬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었다. 근래에 체력적으로 무리한 적은 없는데, 그래도 피로는 쌓이고 나 보다. 평소보다 늦은 기상 시간에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다시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춘다. 내게 중요한 건 얼마나 걷느냐가 아니다. 글에 집중하자고 다시 다짐한다. 천천히, 다만 게으르지 않게 짐을 정리한 뒤 숙소에서 나온다. 오늘도 서너 시간만 걸으면 충분할 것이다.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고 도착한 다음에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문장을 토해내기 위에 이 길 위에 올라섰다. 스스로 되새기면서 순례자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세 시간 남짓 걸으면 다음 마을에 도착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니지만,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근처 카페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주문한다. 며칠 전부터 종종 숙소에서 마주치던 프랑스인 알렉상드르(Alexandre)를 만났다. 그는 아내와 같이 순례길을 걷는 중인데, 오늘은 아내가 물집이 너무 심해서, 그녀는 택시를 타고 자기 혼자 걷기로 했다고 한다. 나도 다음 마을까지 혼자 걷기엔 지루한 참이었기에, 그와의 동행을 시작한다. 그는 15년 전에도 같은 순례길을 걸었다.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냐 묻자, 시설 면에서 더 안전해졌다던지, 때론 마을이 바뀐 건지 자신이 기억을 못 하는 건지 기억과 다른 경우를 종종 본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순례자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길을 걸으면서 마주치는 순례자들은 그때보다 더 '닫혀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비단 순례길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닫혀가고 있다고 답했고, 그도 동의했다. 이 문제에 대해 깊게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참 아프다.


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하고 그와 헤어진다. 나는 마을을 돌아보며 작업하기 좋은 장소를 찾다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좁은 골목과 그 끝의 문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가니 잘 가꿔진 잔디 정원이 보인다. 오른쪽 구석에는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어차피 오늘은 이 마을 주변에서 야영을 할 생각이었다. 너무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해 기분이 좋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할지 고민한다. 마을과 멀지도 않아서 식수를 구하기도 용이하다. 아직 점심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텐트를 펼치기엔 이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순간을 만끽한다.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으니 남는 시간은 편하게 쉴 수 있으리라. 식탁을 대체할만한 게 없어서 작업하기 용이한 환경은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 근처 카페를 갔다 오면 된다. 빛이 드는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청한다.



작업을 마치고 시간이 지나 늦은 오후가 되었다. 내 주변엔 산책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끔 보이고, 나와 대화를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 여기를 발견했을 땐 이 고요함이 좋았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맥주를 들이켜던 나는 몇 가지를 깨닫는다.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심심해서, 외로워서 여러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혼자 있을 때 메아리치기 시작하는 공허의 목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미 사람의 무의식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처절하게 경박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오는 공허함에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를 흐트러뜨리려면 타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나를 순례길로 이끈 공허함의 압도가 나를 짓누른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저항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삶이 이토록 재미가 없다니. 더 걸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어떻게 해야 내 죽음에 빈틈이 없을지 고민할까,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진다. 들이 내 죽음에 대해 뭐라고 판단하고 토를 달던, 나는 항상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잠들기 전까지 이런 상태라면 나는 공허감에 질식당할 것이다. 아직은 그에게 압도되어선 안된다. 풀어놓은 짐을 다시 정리한다. 차라리 계속 걷자. 나에게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찾아 대화를 나누겠다는 생각은 도망치겠다는 것과 같다. 차라리 계속 걷는다면, 그게 이 공허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생각이 들 때 해야 하는 건, 엉엉 울고 타인에게 칭얼대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그쪽으로 계속 걷는 것이다. 어떻게든 더 걷자. 걸음은 맞섬이다. 시지프는 자신이 응당 짊어져야 할 것을 등에 메고 발을 뗀다. 나는 아직 토해내야 할 문장이 많다는 생각에 며칠간은 순례 거리를 줄이려고 했다. 계속 글을 더 우선시하며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자,라고 정하면서 순례를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건 내 죽음에 유예 시간을 더 주고 싶어서 떠오른 생각일 수도 있다. 며칠을 고집해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런 방식으론 문장이 토해지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속도를 늦춘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선고당한다. 너에게 유예 시간은 없다. 미룰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 순례자는 태양을 향해 뙤약볕을 걷는다.



화가 난다. 는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왜 이런 생각을 이어가지 않고는 못 버티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텐데. 아니,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야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차라리 기억 상실이라도 걸리면 좋겠다. 나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다. 더위를 먹은 건지, 취기가 오른 건지 감정이 북받친다. 누군가라도 비난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이라도 나타난다면 멱살을 잡고 소리 지를 것이다. 가시면류관을 쓴 자는 어딜 갔는가? 열반에 오른 이는 왜 침묵한단 말인가? 진화론자가 그들을 원숭이로 전락시켜 버렸나? 망치를 든 철학자가 그들을 부숴버리기라도 했나? 신들은 모두 죽었는데 왜 시지프는 계속 형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매일 아침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걸었던 순례자는 지금 그림자를 등지고 걷고 있다. 앞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인다.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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