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1-4. 기준과 방향성
터닝 포인트를 겪은 후 1년 뒤, 나는 입사하고 싶은 곳을 정했다. 금융사, 광고 대행사 등에서 인턴도 하고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였다. '마케팅을 한다면서 갑자기 왠 NGO?'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마케팅은 영리와 비영리를 구분짓는 잣대가 아니다.
마케팅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내 이야기에 '설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일 뿐, 카테고리와 영역에 한계가 없다. '싱싱한 제주 갈치가 세 마리에 만원'이라고 확성기 방송을 하는 트럭에도, 밤 11시 이후면 유독 집중되는 맥주와 치킨 광고에도, 연말이면 늘어나는 기부금에도 마케팅이 활용된다. 모두 누군가를 '설득'하기위해 열을 올린 결과물이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는 점으로 보자면, NGO도 마케팅의 전쟁터라고 생각했다. 대중에게 '후원'을 설득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영리 사업을 하는 기업에서 고객을 소비자로 말하는 것처럼, NGO에서의 고객은 후원자다. 특히나 한정적인 이 후원자들(소비자)에게 수많은 NGO들은 자신들의 강점과 후원의 필요성을 매순간마다 어필한다. 때로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고, 언론 및 방송사, 연예인들과 함께 특별한 기획을 하기도 한다.
근데, 거기는 비영리잖아?
내가 NGO에서 마케팅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주로 했던 말이다. 앞 선 설명을 읽었다면, 당신도 이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마케팅한다고 왜 NGO에 가면 안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자는 목표는 세웠으니, 어떻게 하면 그 목표를 실행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해서 정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왜 경영학을 하려고 했을까. 내가 왜 마케팅을 하려고 할까. 머리 속에 돌아다니는 단어들이 있기는 하지만, 뾰족하게 하나의 정답으로 모아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면 슬슬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일까라는 불안이 발 밑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 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이 감정에 빠져들게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이 복잡해지면 여러 가지 행동을 하게 되는데, 나는 주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그때도 똑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싶을 때면 불안함이 올 때마다 머리 속의 단어들을 마인드 맵의 형식을 빌려 종이에 남겨 놓았다. 그것을 제일 첫 번째로 했다. 물론 거창한 기록은 아니다. 두둥실 떠돌아 다니는 생각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 마인드 맵은 그냥 낙서만 온통 그려진 메모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생각을 정리한다고 하면 머리 속에서 한 번 걸러진 것들을 종이에 적기 마련이다. 그것도 깔끔하고 명확하게. 근데 나는 그게 싫었다. 뭔가 1차로 걸러진 상태의 단어들만 조합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가? 펜을 들고 '자 이제 정리를 해야지'하는 순간, 머리 속에서는 생각을 정제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지는 않는지? 나 스스로에게도 민낯을 보이려면 '정리'를 위해서라기 보다 '나열'을 위해서 적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리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 나열의 마인드 맵'을 계속 그리다보면 중복으로 나타나는 키워드들이 보인다. 생각 정리는 바로 그때 시작된다.
나의 경우에는 <일>, <성장>, <마케팅>, <선한 영향력>이 중복되는 키워드였다. 키워드를 정리하면서 나도 느꼈다. '아, 나는 일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들을 정리하니 나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되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게 되고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덜 불안해지고,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 집중의 결과로, 나는 나만의 일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사회 경험도 별로 없는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만든 것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준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나만의 기준이 있어야 이후에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만의 일하는 기준
1.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 내가 일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3. 내가 일하는 곳은 2번과 연결된 구체적인 브랜드(기업) 메세지가 있어야 한다.
4. 내가 일하는 곳은 약간의 스트레스를 통해 자기 성장을 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5. 월세 60만원과 저축을 한 후에도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 40만원은 할 수 있는 월급을 받아야 한다.
기준을 정했으니,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 달려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했다. 막상 NGO에서 마케팅을 하겠다고는 결정했지만 실제로 나에게 그 방향이 맞는지는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팅 공모전이나 관련 인턴 등을 했었지만 아직까지 나는 대학생일 뿐, 실무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비영리쪽은 더더욱. 그래서 실제로 그들과 부딪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법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내가 파악해둔 기업 후보군 중에 마케팅 팀이나 홍보 팀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지 공고 내용을 확인했다. 지인이 일하는 곳에 문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직접 A단체 홍보팀에 전화를 걸어 NGO 마케터를 꿈꾸는 대학생인데 혹시 사람 필요하시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간접적으로라도 그곳을 경험해보고, 나를 점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간절함이 이루어진 것인지, 나는 B단체의 홍보 팀에서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국내 NGO의 신입 공채 전형에 합격하게 된다.
사실, 공채 첫 도전을 하면서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를 잘 알고, 경험해보고, 체크까지 해본 상태에서 내가 달려갈 길을 골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요즘에는 여기 저기로 이렇게 기준과 방향성을 설정한 방법을 꽤 많이 전하는 편이다. 좋은 것은 나누어야 배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아는 지인 H는 간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모델 활동이나 사진, 글쓰기 등 틈틈이 새로운 도전을 즐겼던 H는 병원 실습을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간호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H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설정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잡고 간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속의 갈등이 점점 더 커짐을 느끼게 된다. 지금 이 방향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도, 그렇다고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H는 불안과 우울을 느꼈다.
나는 H에게 이 말을 듣자마자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똑같았다고. 근데, 어쩌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위에 언급한 마인드 맵 그리기와 함께 나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제시했다.
우선은 H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포인트가 찾아와주길 기다리지 말아요. 포인트는 스스로 만들어야 해요.
본인이 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지금의 방향성을 그대로 가져가려고 하던지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의 순간도 본인이 만들어야 한다. 나의 인생을 바꿔줄 어떤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겟지만, 그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H에게는 현재 본인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마인드 맵에 키워드 형태로 적어보라고 했다. 행운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직접 찾아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특히나 진로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 부분에 국한되어도 괜찮다고 다독였다. 취업에 관련된 키워드를 정리할 때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적어보길 권했다.
A :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B: A를 직/간접적으로 일로서 내가 해볼 수 있는 것
C : A,B와 연관된 직업명
D : B 중에서 지금 당장 실천 해볼 수 있는 것만 체크
당시, H는 에디터 혹은 마케터로의 방향 전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A에는 본인과 관련된 것 중 직업적으로 가져가보고 싶은 것을 적고, B에는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실무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을, C에는 그것이 확장된 직업명을, 마지막으로 D에는 지금 현재 상황에서 본인이 가발 빠르게 해볼 수 있는 것만 체크할 것을 알렸다.
예를 들어 H가 글쓰기를 잘하고, 본인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A에 적고, B에는 브런치 작가가 되어 매거진을 하나 만들어 보거나 독립 출판을 실제로 해보는 것, 에디터 관련 클래스를 듣는 것, 문토 혹은 트레바리 등에서 관련 모임을 참석해보는 것등을, C에는 에디터라는 직업명을, D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B에 적은 것중 하나라도 당장 해볼 수 있는지는 체크하는 형식이다.
이 마인드 맵을 작성 이후에는 체크한 방법들을 반드시 실천해보길 부탁했다. 자신의 앞 길을 선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 마디의 조언보다 한 번의 경험이 낫기 때문이다. H가 이 방법을 몇 번 시도했는지는 이후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H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본인이 달려갈 방향을 직접 다시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 사례에 국한시켜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방향 선택에 관한 문제는 신입이나 경력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 같다. 혹시 지금이 자신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위의 방법대로 체크하고 경험해보며 준비해보길 권한다. 단순히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를 먼저 제대로 정리하고, 경험을 통해서 점점 더 자신을 뾰족하게 알아가면서 나만의 빅테이터가 쌓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이런 건 쌓이면 쌓일 수록 본인에게 더 좋은 자산이 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이 사람은 자기를 정말 잘 알고 선택도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됩니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나만의 기준과 확고한 방향성을 토대로 입사 후 1년동안은 미친듯이 NGO에서 마케팅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홍보팀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입사 3년차를 앞두고 갑자기 번 아웃Burnout syndrome이 찾아왔다.(--------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마케터 호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