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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8시간전

L’IDENTITE, LA LENTEUR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정체성에 대한 느린 시간 회상

[Silence in the Mist: A Slow Recollection] Hong Kong. 2010. 2. 28. PHOTOGRAPH by CHRIS


느리게 걷기, 시간회상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낳은 남성들은 나와 일치하는 면이 많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이란성쌍둥이 자아들이 내뱉은 언어와 사상은 내가 불어대는 입김에 파릇하게 물들어 버렸다. 고드름 된 무관심과도 비슷해 보인다. 어떤 이에게 마음이 떠나던 어느 날, 나는 빈둥거림을 씹어대며 푸념을 지껄였다. 지금이야 빈둥거리든 말든 담담하지만 한량의 본래 의미가 담긴 느릿한 삶의 여유만은 그리워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 어슬렁대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느림 La Lenteur,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한동안 알았던 그가 자주 했던 말은 "너와 함께 빈둥거리는 게 좋다"였다. 고요함에 젖기, 신의 창(窓)을 관조하는 한가로움이 나쁠 리 없지만 빈둥댐은 지켜보는 선을 넘어섰다. ‘빈둥’이란 단어가 불러온 연상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는데 실패한 대갓집 자제를 떠올리게 했다. 정형화된 놀이의 유형을 벗어나면 고도로 학습된 유약에 미끄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줬다. 자기애가 결여된 상태에서 자신의 의미를 타자에게서 찾으려는 낙오감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별난 의구심까지 새된 가슴팍에 빗장을 질러 놓았다.


 시각만이 아니라 많은 부위에 민감한 나는 자극이 잘 되지 않는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상의 창구가 달궈지지 않으면 일차의 유혹을 통과한 감각이라도 하잘것없는 냄새를 피우다가 꺼진다. 치기가 넘치던 한 때는 쾌락이란 웅변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정복하는 즐거움을 알려주기도 했다. 허무가 판을 치던 하루엔, 쾌락에 대한 의지는 매달림에 익숙하지 않은 속마음을 배반하는 장치였다. 지금은 이 쾌락을 어느 광주리에 떨궈 놓았는지 생각할 수도 없게 물끄러미 지나간 시선만 좇고 있다.


 강박이란 기제가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다. 이해도 못하는 이들 앞에서 노출되는 자체가 끔찍하다. 광대의 춤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자신과 닮은 면에 곧장 우울의 동굴로 직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저속한 행동이라며 욕을 하고 침을 뱉을 뿐 아니라 우월한 위치를 비교하며 으쓱거린다. 솔직히 정당한 도덕이란 것은 비육질과 육질이 공존하는 식간의 놀이터에서 어떨 때 작용하는가? 서로 알지 못하는 속을 자로 재가며 틀에 끼우려고 논의한다는 자체가 미친 짓거리나 마찬가지다. 치욕의 순간에서조차 본능에 따라 환락을 경험하고 비밀을 지키며 어스름한 익명을 고수해 보자. 지식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 발휘하는 우울한 긍지를 불러본다. 괜한 열성으로 겁에 질린 나약함을 숨겨보자고 혼자 투닥거려 봤다가 소요한 반란이 꺼진 텅 빈 무대에서 조롱의 논박을 덤터기 쓰는 기분이 든다. 불쾌한 빈정에 탈출이 불가능한 행위는 광적인 지랄로 밖에 남지 않는다. 풍성한 푸성귀로 자란 갑작스러운 공포는 확신이 사라진 어느 날부터 허약한 밤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이젠 누런 대낮에는 발각되기 싫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짓밟고 정신을 내리누르는 당신에게서.


 자아의 고통 속에 사유가 깃든 문화의 집산지이며 예술적 영감이 박혀있는 체코, 그리고 체코인. 어떤 면에서 다루기가 꺼려진다. 경험의 한 자락이 두루마리 푸는 것을 말리나 보다. 일단 꺼냈으니까 가둬둔 기억과 만나면서 시간의 문제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느림과 기억사이, 빠름과 망각사이에는 내밀한 관계가 성립된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 La Lenteur》 1990년대 중반, 그의 글이 선풍이었을 때 슬쩍 읽곤 한참을 생각했던 구절이다.


 "어떤 사내, 길을 걷다가 뭔가 회상하려고 하나 기억나지 않을 때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늦추는 반면,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할 때는 시간상 현재 위치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니까 이 단문의 요점은 시간의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시간의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쿤데라의 이야기는 듣다 보면 이건 철학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나른한 중간계에 빠진 느낌이다. 마음과 일치하는 일말의 내용은 수용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의 인상처럼 ‘음울한 회상’용이다. 영상이건 실생활이건 행동의 한 텀을 계산한 이 말은 맞는 듯싶다. 매섭게 달리고 현재를 잊는다! 그런데 달려보니까 이 작용이 긴가 민가 싶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던 질주(疾走)가 별안간 무서워졌다. 멍하게 달리는 가운데서도 더욱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 그 질긴 섬광이 온몸을 감싼다. 느리게 걷기, 이 또한 공존하는 비정상적 주변과 부합되지 못하고 이탈의 기미를 제공해서 무섭다. 내가 원치 않았는지 아님 원했는지 모르는 세계에서 분리된 이후 나는 인간이란 타이틀을 얻었고 기억, 그 안의 속도, 시간, 주변, 일상, 존재, 자아, 타인, 형상 등, 각자 공간을 이루는 독립된 세계에서 행동반경을 결정해 왔다. 일치하는 순간이 죽음, 정지, 불변이고 불일치가 생명, 변화, 진행이라면 불일치의 난무로 하루를 흘려보내며 내일의 장막을 거둬가는 삶을 그토록 미워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추위가 드세다. 겨울바람에 맨 얼굴을 내놓고 계절의 발걸음을 재 보았는데 성큼 거리며 다가온다. 볼을 때리는 매서운 채찍소리. 바람결이 조랑말의 살랑거림이 아니라 경주마의 질주 같다. 다치는 것에 개의치 않고 그에 맞서 내딛는 발걸음은 망각할 것이 많음에도 여전히 느릿느릿하다. 철마다 색다른 냄새를 풍기며 강도를 조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바람들에 떠밀려 갈 수도 있건만, 지평의 뜨거움이 아스팔트 바닥을 녹이던 여름에도, 빙우의 차가움이 땅바닥을 얼리던 겨울에도, 술에 너끈히 취한 채 갓 비뚤어지고 갈지자로 행로를 내딛는 한량의 보폭은 넓되, 걸음은 느리다. 아직까지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는 없다. 느리게 걷는 것은 그저 걷는 습관 때문인 듯하다. 삶이 온전히 느림을 향해 걷는다는 것, 빨리 구워대는 세상에 살면서 너무 큰 기대를 가지는 걸까?

 

2005. 1. 10. MONDAY




정체성 : 편으로 갈린 현재의 연인들


 "꿈은 현재의 특권적인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한다. 모든 세월이 무화되고 과거가 마각을 드러낸다."

  《정체성 L’identite,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나는 현재에 집착하고 있는가. 역시 오늘도 현란한 꿈에 시달렸기에 물어본다. 현재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나는 현재를 없애기 위해 현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자주 꾸는 꿈은 삐걱대는 자물쇠 속에 쟁여 놓았던 현재가 웅크리고 있다. 온갖 반대급부를 소급하여 현재의 먼지를 털어내고자 노력하는 과정들을 지켜보면 부동질의 뇌와 하염없이 흘러가는 피와 끓어오르는 감정의 전류들은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 나름의 색다른 해석을 부여하거나 시간을 역류하며 왜곡된 장소, 변질된 상황을 설정한 뒤 캐릭터의 변형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정차된 이는 과연 누구이고 누가 주체가 되며 누가 시간의 기억을 돌리는가. 내 안에 갇힌 영(靈)들은 도대체 몇 개이며 이들은 어떻게 육체에서 빠져나가려고 애쓰는가.

 권태에 치달은 사람들은 눈꺼풀의 움직임처럼 이상한 몽환을 거듭하는 우정에 관심 있을까. 옛일을 회상하며 오래전에 지워진 내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 바로 우정이라면,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짧은 시간에서 이뤄질 수 없는 장기(長期)용이 분명한데 짧은 공백에도 연기를 뻑뻑이며 적극적인 권태를 피워대는 사람들이 과연 긴 시간을 견뎌낼까 궁금해진다.


 난 수동적 권태기인가? 춤을 추었다가 금세 피로해져 하품을 연달아하는 꼴을 보니 그런 듯하다. 타인과 나의 실루엣이 겹쳐지는 것은 선명한 빛이 있을 때인가, 아님 희미한 빛도 사라진 시점인가? 이성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있는 게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유를 느낀 순간 울부짖을지 모른다. 해변가의 짠 모래 위를 걷다가 "남자들, 더 이상 날 돌아보지 않는다"라고 절망하던 파리한 그녀처럼 ‘관망’과 ‘관음’이 ‘관심’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름다움도 벗어버린 한 여자가 있다. 시간에 태워가는 유한계적 노화는 다중의 거울이 된 세상에서 마법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관능의 시소를 타며 누군가 질러대는 욕망의 시선에 한 달음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자 하니 홀로 소유할 수 없는 감정의 불평등은 인간 사이에 기울어진 욕구를 제공했음이 분명하다. 저녁나절, 하얀 우주 속에서 백색으로 희석된 장미는 여전히 모험을 원한다.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닌다."


 연모의 편지를 심장을 가리는 브래지어 속에다 몰래 감추는 행위를 보다 보면 여자는 작은 메모조차 감출 수 없는 나체로 세상을 걷고 있는데 이런 고백에 대한 수줍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묻고 싶다. 진실과 친구 중에서 언제나 친구를 택하겠다던 어느 비관론자, 남자는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헛된 꿈을 불어넣으려고 쓰고 지우는 소모전을 거듭하는 것일까. 그는 이데올로기나 종교, 국가보다 이상에 치우쳐 있었는지 모른다. 정말 우정은 남자만의 소산인가?

 에로틱한 혼합물에 젖는 서구의 결례와 소란한 웅성임으로 감정을 정중하게 만드는 동양의 격식과 혼동을 거듭하는 선로에서 아름다움의 중심이라 말해지는 인간의 눈은 스스로 정체성을 얼마나 담아내는가. 불량품 기계처럼 서로의 눈꺼풀이 요동칠 때, 속도의 불규칙에서 비정상적인 감흥을 읽는다는 연인들은 감정이 메마른 참혹의 거리에서 빨간 잠옷을 사며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란 은밀한 상상에 키득대지만 이미 한쪽은 적나라한 속살처럼 상대를 알고 있고 달라진 모습에 만족해하며 다른 글을 준비한다. 하지만 곧, 다른 한쪽도 정리된 서랍이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곤 상대의 달라진 모습을 관찰한다. 오직 무관심만이 집단의 열정으로 인식된 시대에서 균일을 깨어보겠다는 발악은 비밀을 터놓는 것뿐이다.

 제2의 시라노, 감성이 대단한 남자는 시든 얼굴로 굶주린 낭만에 허덕이는 여자를 보았다. 매력적인 문장을 쓰면서 쾌활하고 즐거웠던 그녀를 되살리는 연금술사가 되기로 했다. 자신의 위로엔 꿈쩍도 하지 않던 그녀가 가상의 인물에 복종하자 질투가 생기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에 만족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고통과 자괴감 때문이다. 뻔뻔한 배반, 우스꽝스러운 거짓. 남자의 뺨에 살짝 닿았던 차가운 그녀의 촉감은 찰나였으나 영원한 이별의 공포가 된다. 다른 생으로 이탈해 버린 사람, 그녀는 누구인가! 그리고 황홀경을 찾기 위해 다수의 용광로에서 벗어 나온 남자, 그는 과연 그녀를 만날까?

 모든 것이 현실에서 비현실로 접어드는 새벽이다. 남자와 여자, 모두 환상에서 머무를 수 있다. 같은 시제를 사용하기란 삼차원의 세계에선 힘든 걸 알기에 차례로 몽상의 해협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찻잔의 부딪힘이 난무하는 카페의 광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렵다. 어쩌면 그대는 애타게 찾는 그녀를 알아볼지 모른다. 그리고 그댄, 그런 그를 알아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들. 현재의 사람인가, 현재를 접은 과거의 사람인가, 현재를 굴리는 미래의 사람인가.


2004. 12. 27. MONDAY




 한동안 밀란 쿤데라 글을 좋아했다. 그의 말들은 속마음처럼 아무런 걸림이 없이 넘어갔다. 유명을 달리한 그처럼 느릿하게 문장들을 회상해 봐도 왜 그를 좋아했는지 시간에 묻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던 작가들은 많은 이들이 묻혀버렸다. 머리가 복잡했던 시절에는 자신에 대해 연구하던 사람들에게 온 신경이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도 인간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지만 시간을 오래 써서 그런지 시간의 시계줄이 늘어져있다. 바늘로 찌르면 튀어나오던 즉각 반응도 사라져 있다.


 대학 2학년 여름, 급작스레 휴학을 했을 당시, 사태를 수습하고는 몇 개월간 책 대여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대여점 안의 책을 다 읽으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 기대만큼 양질의 읽을만한 책들은 많지 않았다. 대중적인 소설과 만화, 잡지들, 대하소설들이 대다수였다. 돈 주고 사기엔 아까운데 가독성은 있어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다양할 것 같지만 노친네의 일장연설처럼 놀랍게도 흡사하다. 노벨문학상을 탄 글들의 구조배열과 사고체계는 동일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엄숙한 언어들은 잡다한 언어들보다는 몇 번 읽어도 궁금했던 내용이 숨겨져 있어서 들여보게 된다. 들어보지 못한 어투라던지 단어의 배열이 주는 흥미로운 충격이 있어 찾아보는 경향이 있다. 작가가 미친 것인지 진짜배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나 말맛이나 글맛이 있어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할 때면 아예 그 사람을 모르거나 아주 잘 아는 관계일 때 시간이 의미롭게 흘러간다. 사람을 알기 위하여,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은 스쳐 지나간다. 시간의 축적성은 시간을 쌓는 것과 시간이 부재한 것이 비대칭으로 맞닿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인 면에선 자폐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다. 일상에선 다른 이들과 어떤 마찰이 있어도 생명유지에 요구되는 필수적인 생활일 뿐이니까 공간 공유에 있어 그것이 생활적으로 필요한 것이란 인식이 있으면 거부감이나 집착은 적은 편이다. 나의 것을 포기한다던지 조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체계를 단단히 쌓기 전에 주춧돌부터 무너진 경험이 반복되어선지 나만의 형태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다. 예전보다 훨씬 강도도 깊고 복잡해 보인다. 이런 그물망도 고도화되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것이고, 텅 빈 하나의 블랙홀로 응축될 것이다. 완전 불굴의 의지를 가진 아라크네다. 지금은 내 안의 내가 방황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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