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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21. 2024

MURASAKI AT SUNSET うらむらさき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해질 무렵 무라사키》

[The sky at dusk, after the sun has set] 2019. 5. 25 PHOTOGRAPH by CHRIS



  해질 무렵 당신과 마주하였네

  미련한 해는 붉게 웃고 있건만

  하늘은 이미 검푸르게 졌구나




해질무렵, 광풍(狂風)이 부는 언덕에 서면
MURASAKI AT SUNSET うらむらさき
20050705.TUE



[一篇] 해질 무렵 무라사키 - 꿈같은 생각은 갑자기 날아가버린다



매미


 그녀의 봄은 그곳에 있어도 혼백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뜰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말을 시켜도 대답 없고 무슨 말을 해주는 것도 무리였다. 바싹 마른 허물이 그저 바람에 휩싸여 사각사각 소리를 내듯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놀던 때가 생각나면 재미있게 웃었고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혼자서 골몰할 시절을 뒤돌아보며 외골수로 빠질 때에는 가슴을 안고 괴롭게 신음했다. <매미>


 해질 무렵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한 가족의 이사.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저물어가는 생명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창백하고 여윈 여자가 쓴 狂女란 껍질은 젊음으로 대변되는 여름 한철을 보내기 위해 머리에 인 거지의 쌀가마니처럼 지친 걸음을 누르고 짙은 가부키 화장처럼 세숫물에 지워질 메아리가 된다. 광풍의 이유는 말할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미치는 것은 주위의 모든 신경을 돋우면서 괴력을 발휘해 자신을 가둔 틀을 벗어나려고 반복적으로 탈출을 꾀하는 것이다. 무엇이 안 된 일이라 말할까! 안갯속에 싸인 인간의 꿈은 건강했던 태동의 이전 순간으로 돌아가려 발버둥 치고 있다. 들리지 않는 몸짓이라 보는 이도 몸부림치는 이도 다 괴롭다. 불안한 흔들림은 찌는 여름조차 눈을 시리게 만든다.




십삼야 (十三夜)


 격자문에 끼인 것은 바람뿐이랴. 냉정한 남편을 떠나 온 부인과 어긋난 운명에 선 두 연인의 갈림도, 버림받을지 모르는 아이와 딸을 출가시키고 오매불망 가슴 졸이는 친정부모의 속 또한 가볍게 터진 재치기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밤과 완두콩을 씹으며 기울어가는 달을 보고 있으면 지난날이 내 바람만큼 둥글게 흐르지 않았음에 슬퍼지고,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 함에 슬그머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말릴 수 없다. 쌓이고 쌓였던 일을 하룻밤에 다 털어놓는다고 해서 잘못을 되돌릴 수 없다. 인력거에 실린 것은 세월의 풍파도 인생의 회한도 아닌, 모두를 떨군 십삼야의 늦은 귀가였다. 담배가게 집 아들과 가난한 명문의 여식이 갈 길은 동으로 남으로 갈라져 있다. 부유한 사모의 정은 뿌옇고 아릿한 연상을 지우지 못한다. 수양버들이 너울거리는 달빛은 엿보는 괴로움 위로 떨어졌다.




키재기


 유녀들의 이빨을 물들인 검은 물은 유곽을 빙 그렇게 둘러싸고 있다. 밤마다 흘러나온 소리와 색은 묵음이고 어둡다. 삯바느질장이, 건달, 잡부, 무허가 변호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노는데 여념이 없다. 북 치는 소리, 샤미센 음색이 끊이지 않는 유곽 안에서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들. 해질녘에 문방구 집으로 모인 아이들은 서툰 변명을 내뱉으면 금세 귓불이 빨개지는 동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정 주던 붙임성 있는 그 모습은, 하나 둘 괴로운 한밤중의 화로가 되어 기다림을 지운다. 어른들이 흔히 하듯이 크고 작은 패싸움에 밀려서 멍이 든 유년의 강은 퍼렇기보단 검다. 희롱하는 쥐 울음 흉내를 내고 잡것의 말이 섞인 유곽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퍼뜨리는 소녀가 단골을 잡아서 돈을 많이 벌겠다며 뜬구름 같은 공상을 하는 것은 참으로 철이 없는 것임에도, 호되게 말을 할 者 없다. 세상물정에 밝은 스님은 눈이 멀었다. 아침엔 염불, 저녁엔 돈 계산 하느라 주판을 쥔 부모를 보며 심술궂은 겁쟁이가 된 소년의 떨떠름한 심사를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 매년 봄꽃이 흐드러질 때쯤 하여 공양불이 밝아온다. 공중으로 쏘아 올린 화로탄은 닛포리 화장터에서 사시사철 오르는 사람 태운 연기와 닮아있다. 질퍽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미끄러진 게다 끈이 끊어졌다. 무정하게 구는 소년과 살그머니 바라본 소녀의 심장은 둘 다 콩닥거렸지만 끝내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칠 개월, 십 개월, 일 년 전으로 거슬러가는 기대도 순진한 아이들을 훌쩍 건너뛰었다. 소녀는 언니처럼 머리를 틀었고, 한 소년은 스님 수행을 하였다. 그렇게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렸다.




이 아이 (제 아이는 말이죠)


 고슴도치가 자기 자식을 예뻐하는 것은 닮은 꼴이기 때문이런가. 남편과 나는 한 때, 사랑했지만 살면서 애정의 대화를 멈추었다. 아내는 문고리처럼 남편의 문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름이 되었다. 제멋대로 살고 싶어! 잘못된 결합은 초저녁부터 부인을 환상으로 내몰고 남편을 홍등가로 내몬다. 몰인정하고 표독한 부부란 관계, 그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이는 바람개비가 되어 소원한 공간을 파고든다. 사람은 일생의 처신을 자신이 아닌 거울을 통해 배우게 된다. 나의 눈은 바깥에 있다.




해질 무렵 무라사키


 부처님 남편은 재미가 없다. 심상치 않은 외도편지에 서둘러 둘러댄 변명을 무조건 믿어주는 그, 돈도 잘 벌고 마음씨도 곱다. 나는 악녀에 가까운 짓거리를 하는 거겠지. 그에게 반해서 결혼을 했는데 한 순간 신뢰를 저버리고 천 통의 편지에 이끌려 외간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겨울바람이 몸으로 스민다. 아니야. 나는 매력적인 사람을 사귀고 싶어. 미련한 남편, 아무리 착해도 그렇게 답답하고 곰 같은 인간과 평생 지낼 수 없어. 진짜 남편은 그가 아니라고 마음이 말해주고 있어. 침착해. 방황은 그만두는 거야. 사랑을 따르고 말 테니까. 내 마음에 부는 바람 지워지지 않는다.





[二篇] 나 때문에 - 미오는 죽을 겁니다 절 찾지 마세요



섣달그믐


 고약한 주인에게 걸린 비참한 하녀신세, 칼바람이 스치는 십 이월, 물지게를 나르다가 나자빠진 미네의 정강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물지게통을 망가뜨렸다고 크게 호통치는 까다로운 마님, 심부름을 시킬 때에도 시간과 거리를 잰다. 부모를 잃고, 피붙이라곤 큰아버지밖에 없는 미네는 교겐을 구경하기로 한 십오일, 모처럼 외출을 허락받는다. 서글픈 살림 간을 사이 두고 몸져누운 핏줄의 모습은 여덟 살 아들을 조개 파는 생활전선으로 밀어낼 만큼 때 묻은 소맷부리처럼 해져 있다. 월급가불이라도 해서 가난을 메울 수 있다면! 그러나 돈 많은 댁의 사람들은 눈썹도 꿈적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이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불량배 같은 자식을 떨궈낼 걱정뿐이랄까? 사모는 나가고 아이들은 놀고 집안의 탕아가 잠자고 있는 동안, 벼루 상자를 들춰 돈을 꺼내간 미네, 연말결산이 벌어지는 안방에서 도살할 도둑은 누가 될지 떠나간 신발은 罪도 가출시킨다. 끝장난 無情 뒤에는 전복되는 안도감이 도사리고 있다. 전화위복,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런가. 도둑질이라는 복선의 개입이, 각박한 세상에 얄팍한 지방처럼 껴 있는 것이 조금은 이색적이다.




갈림길


 키 작은 우산기술자 기치와 바느질 솜씨가 좋은 요코. 혈육도 아니고 미래를 약속한 정분도 없다. 친 오누이처럼 서로에게 기댔던 관계를 무너뜨리는 이유는 무엇이던가? 이들을 갈라놓은 원인은? 갈림길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있다. 자신 있게 디디던, 망설이며 나가던, 나눈 온정은 미약해지고 헤어짐을 감지한 눈시울만 뜨거워진다. 부둥켜안은 등과 가슴, 어찌하여 청량한 달밤에 시려올까.




나 때문에


 집 안에 갇히면, 세상모르는 철부지가 되기 마련이다. 뻔질나게 바람 펴도 매끄럽게 핑계를 대는 남편을 이겨낼 수 없다. 잠이 오지 않아서 화로 속에 넣어둔 숯을 이리저리 굴린다. 애완고양이를 찾다가 옆 집 서생에게 기웃거리는 호기심은 겉옷 한 벌을 만들어주는 씀씀이로 바뀐다. 예쁘장한 얼굴은 집 나간 어미를 닮았고 버림받은 모습은 사랑의 반격으로 돈에 눈이 뒤집힌 아비를 닮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혹사당하기 싫어 여자는 한숨을 쉬었을까? 남자의 정은 여전하였는데, 잔업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은, 배고픈 아이의 우유 값만 덜렁 놓인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이런, 나쁜 계집! 버림받은 사람들은 마음이 항상 부족하게 텅 비어있다. 턱이 빠질 정도로 재미있다는 얘기도 모두 슬프게만 들리고 자신만 모르게 널리 퍼져있는 불륜의 씨앗은 신경발작으로 고열에 들뜨게 만든다. 소문들. 발작방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는 모함으로 부풀려지고 너 하나만은 버림받지 말길 바라면서  악착같이 모았던 돈은 결국 튼튼한 방패가 되지 못했다. 집밖으로 떠밀린 신세를 보아하니 사람은 하나만으로 살기 어려운 듯 보인다. 사랑이든 돈이든 명예든 간에. 또 다른 애증은 어떤 아픔인가.




흐린 강


살아있는 느낌도 없다. 불안해 견딜 수 없고 어떻게 할 방도도 없다. 이대로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흐린 강, 리키의 독백>


 술집에서 제일 인기가 있고, 시건방지게 보이는 여자가 누구에게든 마음을 줄 수 없다고 다짐했다. 서로 좋아하든 일방적으로 사랑 받든 간에 찌든 가난과 천한 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취객들의 상냥한 돈 세례는 사람들의 착각을 부른다. 가정이 있는 멀쩡한 집안을 파탄내고 유곽에 떠도는 돈이란 모두 긁어모으는데, 어쩐지 입가에 서린 우울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이다. 승냥이의 입술은 붉지만, 굶주린 신음을 잊지 못한다. 난 말이죠, 사랑만으로 당신과 살 수 없어요. 돈으로도 나를 살 수 없어요. 그냥 나는 나이고 싶어요. 출세할 생각도 없고 시집가 팔자를 고쳐볼 생각도 없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꿈쩍하지 않은 척 살아왔지만 숨겨진 내 비늘을 벗기면 약간의 자극에도 툭 끊어지는 거미줄처럼 무너지겠죠. 홀로, 공터에 떨어진 잎사귀를 밟는 이 느낌! 죽음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습격과 같았다. 내 목덜미의 생채기가 당신에게는 농담으로 보였겠지만.





 동지 冬至 20241221


 동지엔 팥죽인데? 동지엔 만두라고! 동지엔 호박이지.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팥죽에 숨어있던 동글 머리 새알심을 나이만큼 세어가며 먹던 날들이 동동거리며 떠오른다. 찹쌀 경단에 체하지 말라고 톡 쏘는 동치미 국물을 곁들여 먹으라던 배려심은 흘러갔다. 바람 부는 외국의 거리에서 옷깃을 여미며 걸어가니 길게 산발하여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이 창살처럼 시야를 가렸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오늘을 기점으로 밝은 날들은 길어질 것이다. 신년에 대한 작은 새날의 기대는 속마음을 담은 독백처럼 당신의 눈물 속에 의 한숨 속에 하늘의 별 속에 땅의 먼지 속에 총총히 사라진다. 그녀의 어제와 의 내일과 우리의 오늘이 여기에 놓여 있다. 간간히 글로 적 꿈같던 밤길의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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