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 Solaris>보다 더 많은 ‘상념’이 자의식을 지배하는 《나스미야 NASMIYA》, 세 아이의 엄마로, 남편의 유일한 여자인 줄 알고 살아가던 마흔두 살의 여인. 어느 날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새 아내를 들인 중년의 남자, 그리고 열아홉의 생기발랄한 젊음을 지닌 화가 지망생 어린 부인. 이들 세 명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깊은 우울증이 흐른다.
네 명의 아내를 합법화하는 이슬람 율법상 새 아내와 헌 부인, 그리고 그들을 조율하는 남편. 이들의 모습은 희미하게나마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이슬람 사회에선 별다른 관심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끌고 온 남편, 그리고 싱싱한 새 여자. 그들이 침실의 밀어가 들리는 거리에서 사랑을 만지고 눈앞에서 애정을 나누고 있을 때 헐어버린 한 명은 투명한 가로등 되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될까? 한 집안에 동거하게 된 세 명의 기묘한 관계. 상처 난 한 여인의 심장에는 고뇌를 묘사했던 수많은 상념이란 단어만큼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우리가 영원하리라고 바라는 관계가 있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해져 왔고 그리 믿어온 부부(夫婦). 계약상의 관계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되어버렸다. 열렬한 연애 없이 결혼하는 것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속담을 무시하는 처사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소한 싸움도 강렬하게 먹어야겠지. 자칫 상대의 실수로 이혼한 경력은 화려함이 지배하는 현실의 그물에서 해가 되진 않는다. 잠시 이국적인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날아가볼까. 일반 가정의 한 남자가 되어보자. 사랑을 즐기고 사랑이란 감정에 행동하는 중년의 남자가 된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해 왔다. 우아하고 지적이며 자상하고 정결하고 헌신적인 여자. 그녀는 낮에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밤에는 뜨겁게 나를 달군다. 지칠 줄 모르던 사랑을 통해 우린 자식을 낳았다. 한 손에 들 수도 없는 세 명. 그녀와 함께 한, 십 오육 년의 세월. 한 잔의 재스민 차처럼 따스했다. 너무나 평화로웠다. 가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구수하고 따뜻한 온기의 저녁이 테이블에 놓여 있고 그녀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눈감곤 했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아꼈다.
해가 부서지던 어느 날이었다. 한 여자를 보았다.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삶. 총명하고 활기차며 유쾌한 이름. 눈을 반짝이며 뚫어지게 응시하는 진지함이란! 처음 보는 순간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짙은 매력이 가슴을 휩쓸었다. 그녀는 다른 이름이다. 상큼하고 시원한 사과의 향기. 반평생을 같이 하고 사랑해 왔던 조숙한 아내와 달리, 심장에 새로운 불꽃을 피우며 생의 정열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보면 스무 살 혈기가 다시 솟고 부드러움 몸을 따라가며 감정의 전율이 밀려온다. 나의 머리와 눈썹을, 코를, 귀를, 입술을, 목을, 배를, 다리를 샅샅이 그리는 그녀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소름 끼치는 행복을 느끼며 그녀를 새 아내로 맞았다.
두 여인이 이제 내 품에 안겼다. 나는 행복의 트라이앵글을 친다. 다리 양 옆에 화합을 도모하는 감정의 북을 울린다. 애정의 정점이 흐르는 곳에서 두 여자와 조금은 벅찬 사랑을 해볼까 한다. 인생의 의미가 되어버린 이 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나는 자부한다. 똑같이 이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헌 신발은 더 이상 허물어지지 말라고 잘 닦아서 잠시만 신발장 속에 넣어두고 새 신발은 자주 땅을 밟아줘야 길이 드니 매일같이 신경을 써서 발을 집어넣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새로운 물건을 사면 잠시 정신을 빼앗기는 건 정해 놓은 이치인데 이전의 아내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새 아내의 교태 어린 애정에 반응하는 나를 보고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고 바깥으로만 맴돈다. 곡선을 그리던 몸도 점점 해쓱해지더니 나뭇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눈은 퀭한 상태로 방황한다. 그러길 수개월. 결국 일 보러 간 사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일까? 그녀가 없으니 갑자기 인생이 어둡다. 착한 철부지 아내의 위로도 들어오지 않고 나만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그대는 왜 떠난 것인가!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는 한 여인의 고독과 슬픔, 사랑의 고통을 적어나갔다. 그 속에는 그녀를 둘러싼 남편과 새 아내의 심리도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언제인가 글을 읽으면서 여자의 타는 속처럼 내 허파도 헐떡거리고 답답해서 얼마나 담배를 피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합법적으로 관계를 늘리는 가운데서도 혹처럼 붙은 한 사람의 위치는 지렛대에 놓인 것처럼 불편하다. 적절한 균형을 깨는 것은 작은 이유로 시작되는 한 순간임을 알았는데 이들 세 명의 관계에 있어서 결론이 어떻든 간에, 타자로서의 이해는 별개 문제로 보인다. 성조가 없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엔 중첩되는 상념이 많았고 종교적 갈등과 변해가는 사회상, 인간이라면 소유하게 되는 미묘한 심리적인 변화와 세대 간의 격차까지 잘게 녹아있었다.
이 소설을 읽은 지는 꽤 됐는데, 집에 오는 길에 담배를 심각하게 빠는 여자를 지나치다 심기가 불편했던 소설 속 여자가 생각났다. 한 군주의 사랑에서 소외된 외딴 방의 침묵. 여인이 하릴없이 심히 피워대던 궐련은 냄새에 민감한 나의 위장 속에 잡지 못할 연기를 가득하게 뿜어내곤 했었다. 회색 미로처럼 풀리지 않는 감정의 소화 불량이라 말해볼까? 변해버린 현실의 위치라는 건, 창자를 들어내는 존재의 가려움인 것인가. 내가 여자의 남편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잠시 상상해 봤다. 언제나 상상 이상을 하지만 결론까지 가기엔 너무 멀다. 답답함을 더는 도구인 상상력. 오늘은 모두 털고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안의 두 여자. 그녀들의 비밀한 이야기를.
2005. 2. 15. TUESDAY
상상력이 지나치고 행동력이 약하면 모든 것은 공(空)이다. 비밀한 이야기는 항아리 속에 꼭꼭 묻어두었다. 어렸을 때 비밀이란 항아리 속에 낱낱이 풀어두었다가 빈틈없이 밀봉해 두면 하나의 이야기로 쌓인다고 들었다. 시간이 지나 보니 말은 엮지 않으면 삭아버릴 짚풀이요, 형태를 구성하여 만들면 현실에서 사용할 거적때기나 망태기, 짚신이 됨을 알았다. 마음을 다듬는 시간을 생각이 정리가 되는 시간까지로 정했는데, 나의 정리라는 단어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들에게 여전히 모호하고 공포스러운 어감인가 보다. 이토록 정리가 절실한 세상에서 스스로 정리해 보겠다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