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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28. 2024

IF THESE WALLS COULD TALK

THE WALL: 짧은 아픔 긴 고뇌, 낙태권과 생명존중의 사회적 인식론

낙태권에 관한 세계적인 논란의 쟁점과 시사점 The Global Controversy over Abortion Rights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는 <로 대(對) 웨이드 판결 Roe v. Wade, 410 U.S. 113, 1973년>을 뒤집고, 낙태권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1973년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가 미국 헌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고 명시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은 임신 첫 3개월 동안 낙태권을 완전히 보장받았다. 이후 3개월 동안은 제한적으로 임신중단이 가능했으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임신중단이 금지됐다. 코로나기간 가장 극렬했던 인권에 대한 논란인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의 위헌 조치로 인해서 미국 전역에선 가임이 불가피했던 성폭행을 당한 여인조차 정부의 낙태허가를 받는데 긴 시일이 소요되어 낙태를 하기 어려워졌고, 피임에 실패한 가난한 사람들은 중남미로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에 대한 반발로 2024년 3월 4일 프랑스에서는 낙태권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기한다. 미국의 기독교 보수주의 연합이 장악한 연방대법원의 공화당적인 판결논리는 낙태권을 인정한 판례인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고, 이는 프랑스의 헌법정신을 흔들며 인간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낙태권까지 확대하여 낙태권을 헌법에 수록하도록 추동하는 작용을 한 것이다. 미국의 낙태권 위헌에 대한 결정 이후, 유럽연합은 2022년 7월 낙태할 권리를 유럽연합(EU) 시민의 자유·권리를 명시한 조약인 <EU 기본권 헌장>에 포함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현재, 각 나라마다 규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스웨덴, 덴마크 등의 유럽연합 국가들은 치료적 낙태와 낙태의 가능 조건과 기간에 대해 3개월에서 최장 5개월 사이로 차등을 두고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3년부터 낙태를 불법으로 보았다가 2021년 1월 1일 법정 명령을 통해 낙태권을 인정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형사상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국회로 하여금 2020년 말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나라 재판부는 여성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임신 22주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인간 형성의 시점을 어디에서 보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논란은 항상 있어 왔다. 현재 미국의 앨라배마주(State of Alabama)는 냉동 배아도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난임 치료의 일종인 체외 인공수정(IVF, In Vitro Fertilization)도 가로막히게 됐다. 생명의 본질을 존중한다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세포를 가지고 복제나 합성하는 실험을 포함하여 생명연장의 시술을 실행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논리를 보면 모순적이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생명 존중'에 대한 관점은 오랫동안 시대 권력을 장악한 제도권의 남성이 결정해 왔다. 한마디로 인류의 미래를 정자만 제공했을 뿐, 아이도 배지 않는 남자가 결정한다는 것인데, 그 논리는 심히 배반적인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낙태권에 대한 세계적인 논란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제도적 관점이 얽혀있는 문제이다. 먼저 윤리도덕적으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 관점(Pro-Choice)에서 살펴보면, 인간의 신체자율성, 성평등, 생식권에 따라 여성이 자신이 배태한 몸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도덕적 윤리의 관점(Pro-Right)으로 살펴보면, 종교적, 철학적으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긋난 판단이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윤리적 신념을 펼친다.


사회정치적으로 낙태에 대한 인간의 선택과 윤리적 태도는 문화적 사상과 종교적 교리, 교육적인 환경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건강과 안전의 문제에서도 욕구 넘치게 과잉생산된 인간 존재는 생명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이라면 가임된 여성이 생명을 탈락시키는 불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생명의 형성에는 남녀 공동의 책임이 요구된다. 피임과 성교육이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제도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일방론에서 벗어나, 각 사회가 추구하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 범위와 성 역할에 대한 숙고가 가능해야 낙태여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토론과 그에 대한 진행여부도 재정립될 수 있다.   


<더 월 The Wall : If these walls could talk>을 보았던 대학 시절엔 이성적인 접촉도 많았고, 생명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영화에 대해 잊었는데, 벽처럼 가로막힌 방 안에서 홀로 있었던 2004년, 나는 이 영화를 떠올렸다. 나를 가로막은 현실의 벽을 깨고 저 멀리 날고 싶었다.  




The Wall,  If these walls could talk | 짧은 아픔, 긴 고뇌
[THE WALL : If these walls could talk] TV FILM MOVIE POSTER

"자궁을 빌려드립니다"

"인도 대리모의 실태"


도구적인 여성의 자궁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면 3개의 단편적인 내용이 한 집안에 거주한 여인들의 삶을 통해 펼쳐지는 영화 <더 월 The Wall : If these walls could talk>이 떠오르곤 한다. 케이블용(用)인 만큼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묘미는 없지만 대학 때 접한 이 영화는 그다지 많은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론을 내리도록 내버려 둔 점이 마음에 들었던 영화다. 지금은 계속되는 문답의 이야기만이 남아 있다.

아이와 생명에 관한 토론은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만의 책임인가에 대한 질문에 봉착하게 만든다. 아이를 없앨 산모의 권리는 1/3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건 무엇에 근거하여 산출해 낸 숫자인가" 묻고 싶어질 정도이다. 결과론적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신체를 갖고 있는 이상, 여성의 몸은 생명의 도구론적인 통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가 생명에 대한 고찰이 없는 현실적 욕망과 해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의 기원에 최고의 존중을 가한다면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사회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성장을 유도할 여건과 환경이 이 각박한 사회엔 갖추어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배었으면 인륜과 천륜의 도리를 위해 그대로 낳는 것이 정석인지, 미혼모로 살아가면 사회적인 수치심과 편견을 이겨나갈 강인한 정신력은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 생활비는 누가 벌며 아이는 누가 키우는지 등등, 공공의 재산으로 불리기에는 생명은 개인적 생활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영화를 떠난 현실에선 낙태를 결심한 여인들은 중절수술 후 피의 범벅에서 고통스러워한다. 겉으로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피의 기억은 그리 평탄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생명을 느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억의 해리는 그다지 쉽지는 않은 벌이다.


요즘 '베이비 바스켓'으로 인한 사회의 공분이 가득하다. 과연 여성만이 살인의 혐의를 쓰고 죄를 응징받아야 마땅한지, 새로 태어날 생명을 버린 어리석은 인간의 실수라고 질책을 퍼부어야 할지 묘연해진다. 아이를 수태한 당사자가 책임을 물고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등한 인간사의 원리라고 말하긴 어렵다. 임신을 보조한 남성은 죄의 경중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점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가슴 아픈 외면의 벽일 것이다.


차가운 수술 기구로 몸을 후비는 고통을 느끼며 울적하게 자신을 뜯는 소리를 들었던 여인만큼 진절머리 나는 기억을 가진 이는 드물 것이다. 갈가리 찢긴 조각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지워지기 힘든 고통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하지만 산재한 사실로서의 현상은 도덕을 넘어 아직까지도 무엇이 가장 최선일지를 의문으로 남겨놓고 있다.


The Wall of Abortion. 자궁 속에 만들어낸 아이도 벽이고 그 아이를 안고 있던 사람도 벽이고 그 아이를 지우려는 눈물도 벽이다. <If these walls could talk>, 영화 2편도 나왔었는데 보진 않았다.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세상의 벽은 높기도 높고 종류도 다양하다. 얼룩이 될 슬픔과 함께 언제나 끝없는 이야기만을 남겨놓는다.


자궁 속에 만들어낸 아이도 벽이고

그 아이를 품고 있던 사람도 벽이고

그 아이를 지우려는 눈물도 벽이다.

2004. 10. 31. SUNDAY




생명존재의 사회적인 인식론과 재정립의 필요성
Social Epistemology of the Existence of Life


유교(儒敎, Confucianism)의 십삼경(十三經) 중 시경 詩經》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父兮生我, 母兮鞠我)"라는 말이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근본사상이 된 주자(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명심보감 明心寶鑑사자소학 四字小學에도 이와 유사한 문장이 언급된다. "아버지 씨 뿌리시고, 어머니 날 낳으시고"라면 납득할 수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무리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생명을 어머니가 낳고 아버지가 기를 순 있어도 아버지는 씨앗을 뱉어냈을 뿐, 그것을 몸속에다 심고서 낳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과거부터 현대까지의 고정된 성역할의 사회에선 대부분의 인류는 모태가 낳고 모성이 길러 왔다. 생태의 원리를 살펴봐도 열매를 맺기 위해선 물론 씨도 중요하지만, 밭이 부실하면 씨는 말라버리고 수태가 불가능하며 건강한 성장이 불가능하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생명에 대한 권리장전은 유전자를 계승할 혈연적 숫자를 자신의 권역에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힘의 논리에 근거한 주장일 뿐, 생명존중에 근거한 사상은 아니었다. 아무리 배에다가 돌을 단 쿠션을 넣고 임신체험을 한다고 해서 남자들이 생명을 품고 지속시키는 고통과 세상 밖으로 돌출시키는 산고를 깨우치기 어렵다. 청교도주의적인 관념과 유교적인 통념과 가부장적인 사상은 결과론적인 한 면만 보게 한다.



근본적인 생명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낳았건 간에, 어떻게 생명이 주어졌건 간에, 생명에 대한 관념을 소유욕이나 유전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 땅에 주어진 생명이라면 그 근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본 가치가 소중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남녀가 결합한다면 그것이 결혼이든, 동거이든, 호기심이건, 장난이건, 정욕이건, 겁탈이건 간에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 생명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생명이 잉태될 때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여 보호받지 못하고 비난받는 사회에서 생명에 대한 올바른 가치 인식은 불가능하다. 만약 결혼한 부부사이의 아이만 정상으로 인정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이단으로 처단받을 것이고 삭제해도 무방한 논리로 전락하게 된다.


현대의 인구는 너무 많다. 이미 지구는 포화상태이다. 양육에 몰두하는 진화된 사회에서는 출산을 권장해도 인구가 줄고, 아프리카와 인도는 억제해도 인구가 증가한다. 성을 나눈 생명체가 세상에 주어지면 공동으로 양육하는 터전을 만드는 것에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낙태에 대한 권리주장이나 필요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고, 생명생산의 도구로서의 여성이나 혈연계승의 의무에 몰입된 남성보다는 둘 다 공존하는 사회의 양육자로서 생명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돌봄의 방식도 돌출될 수 있다.



이상적인 생명의 접근론이나 존재론(Ontology)을 거론하면, 남녀끼리 역할에 대해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체력의 우월함과 책임론에 매몰되어 성적인 우월주의에 빠진 남자들은 여자는 군대도 가지 않는데 요구가 많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핵 미사일 한방이면 모두 날아가버릴 최첨단 기술사회의 현대전쟁에서 육체로 들이대는 각개전투나 피를 부르는 싸움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타인과의 육체적 접촉 없이 TV나 컴퓨터를 대리애인 삼아 솔로의 삶을 유지하는 방구석 인간들이 많은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가 주어진 인간에겐 각 성(性)만이 할 수 있는 육체적인 힘과 기능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여성이 아이를 품거나 낳으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일정기간 동안 새로운 생명에 대한 돌봄과 의무가 집중되어서 남성들이 군대에 가는 제약 이상으로 육체만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단절을 불러온다. 만약 남녀 둘 사이에 합의된 생명을 위한 진행이 시작되었다면 그에 대한 주체와 객체 사이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공동체 사이에 생명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충분한 의견이 수렴되는 장(場)이 존재해야 한다.



생명 존재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론(Epistemology)은 한 사회가 생명이라는 개념을 집단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가치 있게 여기는지에 대한 관점이다.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포괄하는 집단적인 인식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 종교, 철학적인 전통관을 분석하여 생명이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구성하고 편견을 가르는지 탐구한다. 집단적인 생명존재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의 생명철학 또한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문화는 생명의 시작과 종말에 관해 시대에 따라 다른 윤리적 접근을 시도해 왔다. 생명에 대한 가치와 출생, 죽음, 생명연장까지 인류의 숙제는 생사의 고리에 따라 계속되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과 편안한 사후를 꿈꾸는 인간들은 영적인 것에 몰두한다. 현세가 불안한 시대의 영혼들은 생명의 고귀함과 도덕적인 영생까지 고려하여 종교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삶의 의미와 인격의 형태, 인간과 동물, 인공지능의 차이점까지 윤리와 실존에 대한 물음이 가득한 철학적 자세도 존재한다. 생물학적 발전과 세포의 유기적 결합에 의한 생태계의 복합논리로 이해를 다변화한 과학적 발견 또한 현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식론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법적인 제도와 법률정책은 이런 통합적인 사회인식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경계선을 마련하며, 사회적 기준이 진화하고 문화적으로 변화할수록 그에 따라 집단적인 틀을 재정의한다.  



여성스러운 외관과 달리 나의 기본 의식은 파괴적이고 남성스럽지만, 논리의 합리성으로 따져봐도 과거로부터 현대로 이어온 생명윤리에 대한 시각은 남녀의 균형점을 상실했다. 생명논리의 수사를 실행하는 자들의 인식은 틀에 박힌 듯이 일방적이며 비논리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보수적인 사상 또한 기존의 틀을 잡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겠지만 타자를 배척하고 양측의 조절점을 상실한 일방향적인 사상은 무조건 변질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균형적인 사회로 개선되는 데는 길이 멀어 보인다. 개인적인 방향에서라도 생명 존재에 대한 인식의 관점을 고찰하고 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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