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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27. 2024

ANOTHER BRICK IN THE WALL

THE WALL : PINK FLOYD | 현실의 벽과 심리적인 벽

[THE WALL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II] 2004. 9. 4. PHOTOSHOP COLLAGES by CHRIS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II


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됐지만 학교 밖 세상은 다를 줄 았았는데 아직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더 답답한 것 같다. 삶을 극도로 비관적으로 보거나 회의적으로 보는 건 아닌데 부딪히는 게 많을수록 주변을 둘러싼 갖가지 현실이 단단한 무형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진취적인 사람이나 혁명적인 사람들은 도끼나 망치를 들고 우르르 달려가서 한방에 부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큰소리 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벽이 점점 높고 두꺼워질수록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그게 벽인지 아닌지, 마지막 선인지 처음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결국 갇힌 공간이 자신을 감싸안는 보호막이라 생각하며 편안하게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벽이라, 굳이 거창하게 절대적인 권력 집단을 들먹이며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욕을 둘러싼 살육, 남을 밟고 서려는 성취감,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이기심, 끝없는 자기도취를 위해 남을 제어하는 행동들 또한 벽이나 다름없다. 나도 무심코 이런 일을 저지를 때도 있지만 벽돌이 키를 쌓을 때쯤 부수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계속 날 벽돌로 짓누르는 그 사람들을 보면 저 그림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다. 이제 그만 날 놔 달라고.

처음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벽, <더 월: THE WALL>을 어디서 만났을까. 또 생각이 안 난다. 언제나 하루에 비디오 일곱 여덟 편씩 쌓아놓고 보던 버릇이 있어서 이제는 영상이 아주 뒤죽박죽 되어 있다. 그래도 기억나는 건 한 10년 전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보면서 처음엔 [Another Brick in the Wall]이란 노래가 나올 때만 아주 잘 깨어있었다는 점이다. 음산하면서 흡입력 있는 비트를 서두로 천진한 아이들과 냉소적인 핑크의 목소리가 그대로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읊조리는 주술과도 같았다. 항상 그 노래가 나오면 눈을 떴다가 또 잤던 것 같다.


핑크(Pink Pinkerton)의 기억 안에 많은 것이 얽혀 있어서 그 세계가 너무 복잡해 보였다. 끝까지 보는 데 실패해서 한 10번은 계속 틀면서 자버렸었다. 그렇게 한 번은 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몽롱한 눈 가에 꽃들이 얽혀서 강간과도 비슷하게 격렬한 섹스를 하는 걸 보고 잠이 확 달아났었다. 항상 꽃을 새침하고 예쁘게만 그려대는 다른 미디어와 달라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폭력적이고 과격한 장면들 속에 전쟁이나 폭력, 획일적인 교육의 참상, 집단 따돌림을 일삼는 아이들, 소외를 부추기는 선생들, 통제된 권력에 복종하는 예술가들, 망치를 들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인신구속을 통해 세상을 단순화시키려는 사회무리들. 집 앞 놀이터에서부터 학교, 사회, 정부와 대중 매체까지 모두가 징그럽게 웃음 지으면서 편안하게 잠든 사람들에게 "너의 세계는 평안하다"라고 말했던 모습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앨런 파커(Alan Parker) 감독의 영화 <The Wall>은 화려한 락스타 핑크의 자전적인 독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과도한 공연에서 오는 신체적 무력감과 마약을 통해 악상을 떠올려야 하는 절박한 심정과 대중의 환호가 안겨주는 심리적인 위축감, 광대처럼 흔들어대는 존재의 무의미성이 기괴하게 머리를 조여왔다. 괴물처럼 분장해 대는 얼굴 뒤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괴감이 영화 내내 화면 전반에 뭉쳐져 있었다.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The Wall>은 한 개인의 절규이자 사회를 조망하는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느낌의 영화다. 어느 쪽으로 볼지는 물론 선택의 자유이다. 어쨌든 벽이라는 것을 난 이렇게 본다. 벽돌을 쌓는 것은 개개인의 사람들이고, 또한 벽돌이 바로 그 개인이며, 벽 앞에서 서 있는 한 개인이 권력 앞에서 벽을 만들었다고 탓하기엔 이미 벽이 오래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 높이 가로막게 되어 숨을 조이는 것도 모르게 될 때 마지막 끝에 올려진 벽돌이 되는 존재는 무심한 권력들 앞에서 잠을 자버리는 바로 당신이라고.



[THE WALL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II] PHOTOSHOP IMAGE COLLAGES by CHRIS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II

We don’t need no education.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Hey,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All in all you’re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2004. 9. 4. SATURDAY




관음(觀淫)의 사회와 거짓된 세상

진짜같이 보이지만 진짜는 아닌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포맷을 보면 단단하고 깨질 수 없는 투명한 벽 안에 사람들을 넣어놓고 행동을 관찰하는 잔인한 실험과 흡사하다. 패리스 힐튼처럼 백만장자건, 시녀로 분한 킴 카다시안이건,  평생의 짝을 찾는 이유이건, 이혼을 빙자하여 화해를 조정하건, 아이의 문제를 상담하건 간에 타인을 깔아뭉개고, 전라의 생활로 관음을 충족시키고, 뒤틀린 가족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진짜 상담을 하는지 자랑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각본이 존재한다고 인식되는 영화와 달리,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말로만 사실적 모양새는 근사한데 아무런 영양가 없는 음식 모형처럼 급조한 가짜의 진열 같다.


벽을 연상하면 스튜디오에서 남에게 보이는 삶을 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던 남자가 가상의 벽을 넘어 진실을 찾아가는 영화,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1998>가 생각난다. 세상과 분리된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각자 주어진 역할에 따라 인성이 변하고 심리가 조종당했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1971>도 떠오른다. 인간들의 관음은 자극을 추구할수록 뒤틀려간다. 상자 속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실재의 상황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적인 태도는 현실에서 연구자의 통제를 벗어난 객체들의 난립으로 종결된다. 내부의 평정과 정연한 질서는 사라지고 생존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내부적인 불안과 격정적인 흥분, 파괴적인 본성이 돌출되면서 초초함과 신경질만 남는다. 《루시퍼 이펙트, Understanding How Good People Turn Evil》의 환영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관음이 필요한 인간의 삶에서도 폐허의 먼지를 손가락에 끼우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의식의 흐름: 모호하고 배설적인 서술 태도

일을 하면서 주도적인 입장에 있다 보니 주변에 신상을 공개하는 편이다. 나는 타인에게 공개되는 삶은 흥미가 없다. 일상에서 명함도 보는 사람에게 주지만 정작 통화에 성공하는 사람은 용건이 있는 부류이다. 서로 필요한 사항 이외에 할 말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야기 진행이 안된다. 의견이 일치해서 공동 프로젝트를 한다면 대화는 풍부하고 길어지겠지만, 일반적인 잡담의 과정에선 앞으로의 전개가 더디다.


자신의 일상사에 대해 보여주는 자질구레함만큼 어리석고 공격당하기 쉬운 노출도 따로 없다. 나도 나를 보여주고 적긴 하지만 내부의 변화하는 의식에 대한 논의는 상대와 토론이 되기엔 한 개인이 놓인 외부상황이 미지수인 상태에서 전체적인 그림에 대한 추측도 어렵고, 서로의 의식을 공개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의식의 거리를 가지는 화자(Speaker)와 독자(Reader)는 화자는 말하는 역할에, 독자는 읽는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에 대한 서술은 겉면만 훑는 사람들과의 자잘한 충돌에선 그 모호함과 복잡함으로 인해 충돌까지 가는 일이 없어서 속내를 드러내는 부끄러움과 배설의 시원함을 교환할 수 있다면 일상생활에 별 영향이 없다. 



심리적인 벽과 자발적 표현의 관계

벽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심리적인 장벽이다. 마음의 장벽이 쌓이면 어떤 공격이나 이해조차도 불가능하다. 나는 타인과의 만남에서 벽을 쌓지 않는다. 다만, 타인들이 나를 철벽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벽이 있는지 조차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벽을 만들어 놓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상대와 공감의 벽을 쌓기를 원한다. 한마디로 인지된 상대끼리 벽을 쌓기로 양자의 합의가 선행되어야 하고, 같이 수고하지 않으면 둘 사이의 안정적인 벽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선택 요건도 주어지지 않은 상대로서는 공감의 시점과 합의의 조건면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진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저 넓은 우주에 대해 막연함을 느끼는 이유는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투명한 철벽이란 그런 원리이다. 다만, 가시적인 벽과 달리 심리적인 벽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무협지나 병법서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전략은 진법(陳法) 만들기였다. 사물이 놓이는 방식을 뜻하는 '진법'은 물리적인 법칙과 특정 배열방식에 따라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배치하여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심리적인 특수 효과를 일으키는 병법술을 가리킨다. 기술력이나 병력이 모자랄 때 유용하며, 적은 수의 인원으로 대량의 인원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작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책을 읽으면서 상대가 접근하기 어려운 가상의 장막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상상하다 보니 현재까지 진법을 잘 치고 있는 듯하다. 삶에서 유용한 진법을 거두지 않은 이유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인들과 내부의 내밀한 의식까지 나누면서 밑바닥을 유영하는 단계는 가보지 못했다. 


의식의 심연을 관조하는 형태는 심리적인 강자에겐 이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약자에겐 위험하다. 상대이건 자신이건 내면의 바다가 깊으면 그 속에서 숨 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의식의 부표지점을 정하고 각자 일정 수면까지 자신을 꺼내고 끌어올리는 '표현(表現, Expression)'이 존재하는 이유는 서로의 생존을 위함일 수 있다. 자발적인 표현 속에서는 안전하게 타인을 관찰할 수 있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도 존재한다. 표면 위로 드러나는 현실은 개인적 의식의 자발적인 노출이기에, 공개적인 비밀의 서늘함과 진실의 적나라함이 서려있다. 진정한 표현을 실행한다면 헛된 기대감이나 쓸데없는 부끄러움도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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