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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26. 2024

IL NOME DELLA ROSA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만화경(萬物鏡) 세상. 그 암흑의 도시

[IL NOME DELLA ROSA] 2024. 5. 13.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세상의 만물은 서(書), 화(畵), 경(鏡)이다. 세상의 거울이 존재하려면 세상의 형태가 필요하다. 앎이란 것은 단순히 알아야 하는 것이나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게 아니다.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은 생각거리가 풍부하다. 푸코의 진자 Foucault Pendulum는 장미를 증류수에 걸러 담은 정제된 향수병 같았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How To Travel With A Salmon: and Other Essays》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습관이나 장치들을 작가 나름대로 쉽게 정리한 글도 나쁘지 않다.

 
비가 온다. 이렇게 비가 가슴을 때리면서 어둠도 어둡지 않게 만들어버리면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냥 머리를 쓰며 놀아야 한다. 수도원의 공간 속에 인간의 육욕, 죄악, 살인, 탐욕, 허영을 담아놓고 
우리에게 진실을 찾아내라고 요구한 에코의 귀울림을 들으면서 말이다. 


에코가 말하던 수도원을 한번 들여다본다. 어둡고 조용하고 성스러운 도시가 있다. 이 가리어진 베일을 들추면 수도원은 세상의 축소판이고 거울이다. 만화경 같은 거울이기에 더러움은 
실재의 촉감으로 손가락 위에 묻어나지 않지만 그 안의 추한 모습은 다 보인다. 수도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속과 같은 소도시(小都市)로 우뚝 서 있다. 세상 사람들을 구도하고 심성을 정화하기 위한 목적은 갇힌 공간 안에서는 변질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세속을 떠나 구도를 실천하는 자들은 아무런 유혹이나 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약간의 틈새만 남기고 밀폐된 공간은 무균무때의 상태로만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갇힌 공간 안에서 물질은 더 잘 썩는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담고 있듯 수도원의 협소함은 세상의 광포함을 포용하고 있다. 하나의 역사가 변용된 독특함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정복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언어의 이해도 교육을 다루고 있는 기관에 의해 조종된다. 
지식이 상부의 조직을 파괴하거나 위협할 땐 대중들도 모르는 사이 이미 조작이 시작된다. 지식이 우둔한 자를 밝히는 데 이용되지 않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데 이용되었던 카프카(Franz Kafka)성 Das Schloss | 처럼, 미궁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미혹됨은 세상 현실에서 겁먹고 방황하는 인간의 형상이 된다. 지적이고 영악한 인물은 우매하고 아둔한 인간을 능히 조롱할 수 있고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지식의 탑은 언제든지 괴물의 입 속처럼 고약하고 냄새나는 아궁이 안의 성으로 침잠(沈潛)되어 간다. 

움베르토 에코는 경험주의(Empiricism)를 밀고 있다. 관찰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 개인적인 지식의 폭을 증대시키고 그로 인해 다양한 사고가 가능할 수 있음을 윌리엄 수도사(William of Baskerville)란 인물로 대변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속 티끌의 움직임부터 미세한 고통도 스스로가 되짚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만의 삶의 지침을 마련해서 각별한 지식을 통해 무질서하지만 나름대로 진실하고 온당한 점을 찾아내고 단순한 자들의 기대를 반영하는 기본적인 필요를 수렴한다. 새로운 실재의 궁극점을 알기 위해 현상의 보편적 사슬을 찾아야 하듯이, 만물의 질서를 부여하는 보편성에 따라서 나와 다른 사물 사이의 모든 관계는 변한다. 관계란 내 마음의 실재와 실재적 현상 사이의 관련을 감지하는 방편이다. 하지만 야만에서 생겨나는 것은 우연한 작용 이외에는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고문을 당하거나 위협을 당하면 자기가 하지 않은 것이나 알지 못하는 일, 또한 자기가 하려던 짓이나 한 적이 없는 것까지 실토하는 게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자의 강압에 의해 고백조로 뱉어낸 말은 과연 진실일까. 

말이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고 그 빈약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면 전인적인 인류의 마음을 헤아리는 수도원의 하나님, 신이란 존재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진리에 도달하여 그것이 가공이건 현실이건 간에 정점의 환희를 경험하고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면 주변의 여러 가지 도구들인 말, 금전, 생명, 인권, 죽음까지도 걷어내야 할 기름일까? 에코의 정신은 무의식적으로 현상의 커튼을 치운 걸까? 아니면 기호학자답게 자신의 언어와 말주변으로 인간 내면 속 심성의 세계까지 도달한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眞理)를 비웃게 하고 진리(眞理)가 웃게 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 아래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편안하게 하늘을 보는 방법이다. 악마는 냉혹하다. 악(惡)은 영혼의 교만이며 미소를 모르는 신앙이며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조소하는 방법을 가르쳐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신의 존재는 전적으로 무(無)의 존재로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규정을 지어 구속하기 시작하면 참된 의식도 왜곡된 거울의 방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은 중세의 역사를 담아낸 일종의 신학서이며 역사서이며 인간 관찰기이다. 열망하던 마음속 응어리의 이물감이 느껴진다. 현세에서의 정신적인 방황에 휩싸여 인간 속에서 유대감을 잃어버린 고독한 존재는 경직된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책 속의 인물, 요르게(Jorge da Burgos:호르헤 드 부르고스)는 독선적인 판단으로 다양하게 검증하고 사고할 수 있는 만인의 즐거움을 죄악이라 판단했다. 그는 한 편의 서책,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시학 詩學, Poetics 속에 담긴 웃음의 요지를 변설(辯舌)을 통해 인간을 현혹시키는 자의 말장난으로 보고 세상에 내놓길 거부했다. 빛을 차압당한 인간이 내적 방황을 경험하며 더욱 신을 느낄 수 있었음에도 내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한 것이다. 


제2의 그리스도, 가짜의 유혹은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인위적인 틀에 사람들의 손발을 잘라 균일하게 맞추려는 사람들과 한 가지 외부적 산물이 진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모두가 가짜들이다. 타인의 마음을 해부하고 고찰할 힘이 필요하다. 철학, 논리, 수사, 숫자, 암호, 과학, 문학, 기호, 추리, 역사, 사상을 하나의 사건 속에 용해시킨 에코의 지식은 놀랍다. 세상에 놓인
 중첩된 사실이 어둔 베일 위로 드러나는 묘미를 느끼게 하는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잠시 머릿속 장미 공원의 육중한 쇠 문짝을 열었다 닫는다.


2004. 9. 15. WED.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가 연출한 영화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은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숀 코너리(Sean Connery)가 윌리엄 수도사로 분한 <장미의 이름>은 한국말 더빙이긴 했지만 등장한 배우들의 연기도 몰입감이 있었고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추리극은 탐정소설 못지않게 진지하고 재미있었다. 오늘날 서양문화의 바탕은 기독교사상이 기본이기 때문에, 영화적 색채와 정신세계도 성경과 영어의 근원인 라틴어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긴 하다. 성경으로 짜깁기된 기술적인 세계관의 면모가 언젠가부터 지겹다고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를 이루는 초창기 의식의 세계 절반은 서양문화가 차지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이나 감상조차 적어두지 않으면 다른 색실이 되어 하나로 뭉쳐있는 세계들은 내가 표현을 시작했을 때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궁금하다. 어릴 때는 지적인 형태에 몰두했다. 나만의 의식이 자리 잡으면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타인과의 차이점을 용인하며 설득적이고 다양한 사고로써 타인을 새롭게 자리에 있도록 만드는 인물에 관심이 갔다. 다만 이것은 나의 기대와 이상일뿐, 현실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주 평범했고 감정이 풍부했으며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삶을 살았다. 나는 아직도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사물을 보는 와중에서도 세상에 이미 기술된 방식이 아니라 다른 각도로 시각을 틀어서 대상의 뒷면과 내면까지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던 세상의 만물이 세계에 놓인 다각적인 형태를 해석하는 기호학(Semiotics)의 방식이며,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수많은 사물을 비추고 지워내는 만화경 같은 삶의 과정이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인간, 사물, 공간, 행위에 대한 기능이나 본성, 법칙과 관계 같은 표현은 사물의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를 통해 인간 사이의 소통을 이뤄낸다. 글을 읽으면 단순히 감정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글 속의 의미는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을 뒤집고 새로운 생각을 불러오며, 낯선 심상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경험과 관찰에 따라 단어에서 불러일으키는 심상은 타자와 차별을 가지게 되며, 기표(記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로 이루어진 기호들은 언어의 구조주의적인 사유와 맞닿아있다. 


살면서 읽고, 보고, 쓰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사실의 총체들이 한 인간을 이룬다. 재미있는 점은 설령 내가 경험한 사실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장을 쓰고 말했던 순간은 인간의 내부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문장을 쓰고 감상을 적었던 적이 있다. 그랬다가 우연히 수십 년 전에 동일한 주제에 대해 적었던 글을 발견했는데, 오늘 내가 말한 글과 거의 유사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인간의 경험은 축적되며, 경험자가 인지하던 못하던 기억도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의 기호 또한 말이 갖는 감각적 측면인 기표와 개념적 관념인 기의가 합쳐진 하나의 말의 형상임을 지각하게 되었다. 문득 책장을 둘러봤는데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은 없다. 책은 읽은 것 같은데, 책을 어디에 두었을까? 빌려서 봤나? 정신 차리게 비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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