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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25. 2024

RASHOMON EFFECT

구로사와 아키라 《羅生門 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あくたがわりゅうのすけ's 羅生門, KUROSAWA AKIRA, 1950] MOVIE POSTER


<羅生門 라쇼몽> 그대의 정분과 회한을 그물진 진실의 꿈길에 놓아라.


이상하게 일본 영화는 입맛을 자극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재밌다고 보더만 난 영 별로다. 규격화된 다다미 판에 집어넣은 깔끔함, 기계적인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의 동작, 정형화된 일률적인 형상, 일정하게 눈을 반복적으로 자극하는 색채, 무음처럼 들리는 음악, 틀 속에 갇힌 한 폭의 족자를 보는 듯한 배경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치가 않다. 

특히 제일 거슬리는 부분은 웃음이다. 필름 속 사람들의 웃음이 속을 버그적거린다. 사람들 슬피 목놓아 우는 모습에 많은 것을 보지만 웃는 모습이 화통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찌꺼기도 날려버리는 환진 주름을 좋아하는 나로선 화상자국처럼 불에 덴 듯 불거져 웃는 그들의 근육을 보면 해파래 구더기만 진득한 물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그래선가. 확실히 일본産 중에는 만화가 제일이다.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물건도 별론데 만화는 현실의 쪽 방에 갇힌 그들의 상상력을 들판이건 하늘이건 척 펼쳐놓은 것 같아서 제일 낫다. 웃음 선도 안 보이는 게 꽤 볼만하다. 공포스러운 그네들의 의식을 다룬 옛 글도 가끔은 보긴 하는데 괴기스럽고 찝찝할 때가 많다. 가부키(かぶき) 인형의 두터운 백분에 가려진 비날진 웃음도 섬뜩하다. 

다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웃음도 사라진 무표정이 화면을 메운 영화 몇 편은 좋아한다. 특히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くろさわあきら)의 <라쇼몽 羅生門>은 대학 때 보고 흥미로워서 이후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The seven samurais>까지 찾아보게 만들었다. 회색 빛 숲길에 뿌려진 시탈린 꽃말이 점점이 흩날리는 느낌인데 무덤덤함 속에서 여러모로 상상을 자극한다. 형식적인 틀에 묶인 그네들의 인간적 감성이 와닿지 않는 나에게 건조하게 다가온 아키라의 꿈 이야기는 틀진 망 속에 갇힌 상대적인 진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한다. 


비가 추적하게 내린다. 
어느 외진 숲길에 누군가가 죽었다. 
차갑게 그를 살해한 것은 누구일까. 

분명 그의 죽음! 여러 사람이 본 건 맞다. 
혼령이 되어 속을 터는 사람도 있고 
가까이에 함께 있었던 사람도 있고 
지나가다가 마주친 사람도 있고 
멀리 관조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의 이야기가 맞을까. 
가려진 진실은 무얼까. 
보았던 자는 누굴까. 
흔들진 비가 알까. 


하늘의 숲은 가려있다. 나무 사이로 해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곳에서의 해는 빗살무늬다. 구멍 뚫린 나무 해는 구멍의 모양이다. 세모진 모양도 네모진 모양도 이지러진 모양도 된다. 손가락을 둥글게 모으고 그 사이로 하늘을 보면 하늘도 둥근 모양이다. 눈을 대는 곳이 자리한 형태와 위치가 형체를 바꾸고 물건을 바꾸고 해도 바꾼다. 가끔 더 무성한 나뭇잎이 빛도 막아버린 공간으로 가면 그 해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한 어둠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로도, 냄새로도, 촉감으로도 맛으로도 기분으로도 느껴지는 세상은 자극적인 반사가 탐미하니까. 


그물에 놓인 生. 

고기를 낚는 어부가 될 것인가. 

빈 낚싯대를 던지는 강태공이 될 것인가. 

누구의 선택이든 뭐 어떠하리.

건져낸 시들린 물건 아래 網의 門으로 흐르는 물. 

그물진 형태로 쏟아지지만 또한 한데 모인다. 

여러 개로 갈라지지만 갈라진 흔적은 없다. 

하나의 흐름에 놓여있을 뿐이다. 

그것의 이름은 
없음이다. 




《羅生門, 芥川龍之介 あくたがわりゅうのすけ》 
살인자 : MURDERER


저녁 무렵, 성곽 아래 기울어진 문에 한 사나이가 서 있다. 황폐한 거리엔 지진이나 회오리바람, 기근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 바람도 비켜가는 이 꺼림칙한 문엔 시체들을 떠메고 간 사람들의 발자국만 남아 있다. 상서로운 까마귀 떼도 없다.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 비는 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숨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다락으로 치닫는 사닥다리에 올리는 발.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자 누런 불빛이 볼을 비춘다. 


소문처럼 뒹굴어대는 송장. 후각을 앗아가는 썩은 시체들의 냄새. 그 사이로 붉은빛에 흐릿한 그림자가 버석댄다. 호기심을 뚫고 자줏빛 원숭이 모양새의 웅크린 노파에게 시선이 멈춘다. 관솔불을 들고 긴 머리 여인의 얼굴을 살피는 마른 손.


머리칼이 굵어지는 공포가 올라온다. 노파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의 이를 잡아주듯 긴 머리칼을 뽑는다. 한 올씩 뽑히는 검은 두려움은 악에 받친 증오로 치솟는다. 


비 오는 밤, 시체들이 즐비한 문 위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칼을 뽑는 행위라니, 노파를 향한 분노는 훔치려는 기색도 무너뜨린다. 칼을 뽑아 노파에게 들이미는 살기는 벙어리 같은 눈을 보자 만족감이 깃든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난... 가발을 만들려고."


평범한 대답에 실망해 버린 증오는 차가운 모멸감으로 되살아난다.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칼을 움켜쥔 채 두꺼비처럼 노파는 더듬거린다. 


"이놈들.. 모두.. 다 당해도 싸. 내가 이렇게 하는 것.. 이해해 줄 거야. 안 그러면 굶어 죽겠는 걸."


사는 것과 옳은 것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고 사나이는 비웃는다. 벼락 치듯이 노파의 옷을 벗기곤 노파를 송장들 사이로 거칠게 차 버린다. 빼앗은 자줏빛 옷을 옆구리에 끼고 남자는 땅바닥으로 뛰어내린다. 


주섬히 벌거벗은 몸을 일으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신음을 내며 타고 있는 불빛에 의지해 기어가는 노파는 짧은 머리카락을 거꾸로 하며 다락 아래를 살핀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 
사나이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羅生門, 芥川龍之介  Akutagawa Ryunosuke


원숭이 같은 몰골로 시체를 긁어 담는 사람이 있다. 
껍질을 끌고 가는 것일까. 
피를 빗물에 발라대는 것일까. 
방관하는 자들은 시체가 된 것일까. 
눈 뜨고 있는 자들 중엔 실성치 않은 그 누가 있는가.


2004. 9. 18. SATURDAY




라쇼몽 효과 (RASHOMON EFFECT) 
사건의 진실에 대한 해석

사람들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열세 살, 동갑내기 세 명의 소년들과 한 명의 소녀가 있다. 이들은 방파제 근처 150미터 떨어진 공원을 지나가다가 나무에 목을 매단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긴 비명이 흩어진 뒤 경찰이 오고, 이들은 각자 목격한 사건에 대해 진술을 하게 된다. 그럼 이 네 명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까?


굳이 거창한 사건을 말하지 않아도 화자를 포함하여 네 명의 사람이 회의실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일상의 사람들과 일적인 토론 중에서도 자주 발견하게 되는 사실인데, 분명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 이야기를 나머지 사람이 듣는다. 모두들 메모를 하며 각 쟁점이 되는 사항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간이 이주일 정도 흘러서 당시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엉뚱하게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서로 다르고, 주제와 상관없이 들었던 내용 또한 다르다. 그리고 상대가 기억한 내용에 대한 오류와 차이에 대해 지적을 하면, 갑자기 논리와 별개로 자신이 시간을 할애하여 기억한 사실을 타인이 지적한다는 점에 불쾌한 감정이 솟아오르고, 각자 놓친 부분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역으로 왜 그런 사실을 한참 시간이 지나서 꺼내는지에 대한 불편한 감정적 논의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영화 <라쇼몽 羅生門>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단편, 《라쇼몽 羅生門》과 《덤불 속 藪の中 In a Grove》이라는 두 작품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하나로 합쳐 새로운 시각으로 각색하여 만든 창작물이다. <라쇼몽>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을 통해 형성한 기억이 각자 살아온 시간적인 경험과 육체적인 체험을 통해 다양하게 체득되고 변형됨을 지적한다. 류노스케의 덤불 속 藪の中》은 "숲 속에서"라는 의미로, 여러 인물이 동일한 사건을 각자의 시각에서 다르게 진술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독자가 판단하게 만드는 서술기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라쇼몽>의 영화 제목은 단편 《라쇼몽 羅生門》에서 차용했지만, 여러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은 덤불 》의 전체적인 이야기구조를 따른다. <라쇼몽>이 추구하는 작품의 본질은 인간이 갖고 있는 주관성과 진실의 모호함을 탐구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애의 악성(惡性), 즉 오류에 대한 고찰이나 실수에 대한 인정보다는 이기적인 생존 방식으로 자기 합리화에 몰두한다는 것을 순차적으로 사건 당사자인 인물들의 대화와 행위를 교차하여 관찰자가 어긋난 모습이 발생된 원인과 문제점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눈깔사탕 하나가 있다. 달고 맛있다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 달아서 지겹고 물린다는 또 하나의 명제가 있다. 당 성분 때문에 이빨이 썩고 양치가 필요하다는 다른 명제가 있다. 맛과 별개로 당의 축적이 당뇨에는 좋지 않다는 또 다른 명제도 있다. 사탕이라는 하나의 존재적 진실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맛을 느끼고 적용하는 방식과 해석하는 논리는 모두 다르다. 하나의 물체에 대해 평가가 다른 이유는 체험을 통한 생의 기억 때문이다. 기억의 주관성은 각자의 삶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라쇼몽>은 각 개인들이 한 사건을 두고 각자의 해석의 차이를 통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는지 낱낱이 해부한다. 감독이 과거로 반복하여 카메라를 회전하는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을 통해 반복적인 영상으로 관객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은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타인과 다름에 대한 인정이 없는 전체주의적이고 경직된 사회구조와 다양성을 거부하는 일률화된 통합주의적인 사고는 각국의 전쟁이나 사회적 분열만이 아니라 개인 간의 다툼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관련한 사실을 접했을 때 그 기억에 강렬하게 몰입된다. 과거의 순간에 매몰되면 그 당시의 감각이나 심리 상태 등이 그대로 재현되면서 기억은 왜곡되며, 이에 따라 진실도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감정적인 논의는 따로 하고, 시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여 한 발짝 벗어나 대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무만이 아니라 내가 위치한 숲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시네마테크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기막힌 예술을 찾아 헤매던 청춘들이 있었다. 모자란 시간 때문에 완전한 창작보다는 모든 것이 재해석되는 현실 앞에서 순수하게 태어나는 콘텐츠의 시대는 종말을 맞은 것인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을 연다. 라쇼몽을 보고 말 못 하는 벙어리의 진실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 해석의 가면은 사실이 먼저인가, 진실이 먼저인가, 아니면 증거가 먼저인가를 묻게 한다. 일대종사의 영화가 세상을 토로하는 의미로 꽉 찬 감독이 있다면 한 번쯤은 열렬히 행적을 뒤따라가 만나볼 의향이 있다.

2013. 6. 10.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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