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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24. 2024

THE LITTLE PRINCE ANOTHER LOVE

FOX: IF YOU WANT A FRIEND, TAME ME | 길들임

[TAMING, The Love of a Tamed Fox] 2004. 8. 20.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내 삶은 너무 단조로워.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삶에 햇빛이 비치는 것 같을 거야.

난 빵을 먹지 않아.
밀밭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
넌 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
네가 나를 길들이면 얼마나 멋질까.
금빛의 곡물은 널 떠올리게 할 거야.
그리고,
바람에 밀밭 스치는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날 길들여줘.

<어린 왕자를 사랑한 여우가>


심장은 쇠로 만들어져 눈물 흘릴 일도 없었던 장난꾸러기 꼬마에겐 《어린 왕자》는 꽃을 두고 별을 떠났던 소년이 다시 꽃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재미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랑하던 왕자를 보며 하품만 흘리던 꼬마는 손가락처럼 가늘던 뱀이 제일 좋았다. 황금 팔찌처럼 손목을 휘감으며  소년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별로 되돌려 보낸 멋진 마법사 같아서.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바라보던 유리병 속의 소녀에겐 《어린 왕자》는 훵그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어린 왕자를 만나 웃는 별 하나 가지는 이야기였다. 꽃을 위한 거라며 양의 입마개 그려 달라던 어린 왕자가 얄미웠던 소녀는 어린 왕자의 꽃을 위해 마지못해 연필을 쥐어든 비행사가 더 좋았다. 검댕이 연장보단 흑탄 연필을 끄적여 그린 모자가 코끼리 속에 갇힌 보아뱀을 그렸던 여섯 살의 꿈을 다시 찾게 하는 듯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우연히 책 귀퉁이를 서성이며 설렘을 달래던 철부지 그녀에겐 《어린 왕자》는 네 개의 가시를 자랑하던 꽃에게 길들여져 있었음을 알았던 왕자의 사랑이야기였다. 꽃의 성가신 투정과 자랑에 지쳐 돌아섰던 어린 왕자가 안타까웠던 그녀는 들판을 메운 장미를 보며 자신의 꽃이 보고 싶다던 어린 왕자를 다시 좋아했다. 물 주고, 유리덮개를 씌우고, 바람막이를 세웠던 무심한 일들이 일상의 바오밥 나무와 달랐던 꽃을 더 그리워하게 만든다고 위안하는 듯해서. 



하나. 둘.. 셋... 만남이 끝나고 불 꺼진 창에서 오로지 할 일이란 잠 밖에 없었던 여자에겐 《어린 왕자》는 산 등성이에 엎드려 황금 보리밭 터럭을 세고 있던 슬픈 여우의 하릴없는 이야기였다. 꽃 찾아 자기 별로 떠난 어린 왕자에게 부질없이 길들여진 야생의 여우가 가슴 아팠던 여자는 갈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보리밭에서 금빛 머리칼을 상상하는 여우를 좋아했다. 사냥꾼의 낯선 발자국도 귀 막아 버린 채 하루를 동굴 밖에서 지내는 그 모습이,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연신 머리만 쓸어 올리며 또각또각 시계만 바라보는 자기와 너무 닮아서.



 .....................


보기 싫고 듣기 싫고 믿기 싫고 느끼기 싫은 일들이 홍수 되어 밀려든 어느 날의 너에겐 《어린 왕자》는 자신을 한 자락씩 놓아버리고 망가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너의 이야기가 되었나 보다. 숫자에, 관습에, 오만에, 망각에, 권위에, 기록에, 현실에 하루를 치이는 자신이 답답했던 너는 벗어나고 싶은 것에 익숙해지고 갈 곳이란 부서져버린 집구석 밖에 없는 너를 아직은 좋아하나 보다. 내버리기엔 안타까운 미움으로 골수까지 달라붙는 너 길들여진 모습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매일 밤낮, 너를 서있게 하는 땅이 되고 숨 쉬게 하는 공기가 되어 버렸으니까.


내 삶과 어린 왕자.
언제나 다른 모습이지만 다른 느낌이지만 다른 현실이지만
이젠 《어린 왕자》 껍데기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한다.
이런!
또 내 이야기니까.


2004. 8. 20. FRIDAY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는 불어 원본과 한국어, 영어로 번역된 책과 함께 카세트테이프까지 세트로 갖춰 반복해서 듣고 자던 북 홀릭 리스트(Book Holic List)였다. 언어는 학습과 기억에 의지한다. 언어만 된다면 다른 나라 사람과 자유롭게 소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하고 기회가 되면 프랑스로 가려고 했다. 프랑스어도 알리앙스 프랑세즈(L'Alliance français de Séoul)에서 중급 이상해서 간단히 책도 읽고 대화도 됐는데, 사용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어서 언어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문장도 유추해야 겨우 알까 말까다. 언어도 관심 있게 자주 사용해 주고, 그 사용감에 길들여져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언어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사랑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감정적인 길들임과 습관적인 익숙함에 대해 고민했었다. 나는 무심한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면 연민이 생기곤 했다. 전화를 하면 용건은 간단히 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겐 내가 세웠던 모든 규칙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전화를 끊고선 어느덧 흘러가버린 시간을 보면서, 서로에 대한 필요성과 필요가 낳은 생활의 익숙함과 서로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짐의 연관은 과연 어떤 수식인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곤 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과정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만든다. 사랑에도 호응이 있다면 그건 서로를 빛나게 만들 것이다. 사랑에 책임 없는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잊는다. 시간이 소요된 길들임에 얼마나 공들였냐에 따라, 그 과정이 비틀려있거나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하면 의미를 부여한 순간을 자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나 좌절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주는 다양한 경험들은 사랑한 경험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낫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이미 수십 년간 자연스럽게 삶의 막을 형성하고 있다. 길들임이 필요할 만큼 삶의 의미를 가지는 존재가 있다면 기다릴 가치가 있다.


지금쯤 내 삶에서 《어린 왕자》는 어떤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까? 오늘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내 삶과 어린 왕자를 다시 그려봐야겠다.






The Little Prince and His Flower

The stars are beautiful because of a flower that cannot be seen.

The house, the stars, the desert—what gives them their beauty is something that is invisible.

You know my flower.

I'm responsible for her.

She is so weak!

She is so naive!

She has four thorns, of no use at all, to protect herself against all the world.


I love a boy who has been tamed by one rose.

He has sheltered her behind a screen.

He has killed the caterpillars for her.

He has listened to her when she grumbled, or boasted, or even sometimes when she said nothing.

Because she is his rose.

It must have been love for him.

2004. 8. 20.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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