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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31. 2024

TERMS OF ENDEARMENT

<애정의 조건> 제임스 L. 브룩스 | 사랑의 언어

[Terms of Endearment 1983] PHOTOSHOP MOVIE IMAGE RETOUCHING by CHRIS


'애정(愛情)', 미묘한 단어다. 오랫동안 한 이부자리에서 부대끼면 철없던 날의 뜨겁던 사랑도 식고, 좋고 싫음이 엉켜진 정(情)으로 살아간다 하던데, 이 모든 단어를 담고 있는 애정은 과연 무엇일까? 정(情)은 많이 느낀다. 열망도 느끼고, 정욕도 느끼고, 흥분도 느낀다. 한데, 사랑은 뭔지 모르겠다. 어디서든 뭔가 빠져버리는 것. 이 빠진 도자기처럼 완벽하지 못한 것이 나라는 인간의 면모인가.

제임스 L 브룩스(James Lawrence Brooks)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빠른 화면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풍부한 감성은 아직도 여전하게 보인다. 영화 <브로드캐스 뉴스 Broadcast News>처럼 보다 보면 괜히 세상사 한 끝 털씩 건드리고 인생 다 산거 같아서 허무할 때도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As Good As It Gets>며 살아보라 건듯 지는 권유는 네모나게 홈줄이 그어진 보도블록도 유쾌히 밟게 만든다.

브룩스의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친구라는 둘레를 벗어나 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부터다. 나에게 타인은 보통사람, 인지된 사람, 관심 가는 사람,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 이렇게 감정의 농도가 인식의 리트머스지에 흡수되면서 애정의 색이 변다. 언제나 구박만 주고 무뚝뚝하게 내 것만 파대는 얼굴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말하던 그 사람은 감성이 풍부했다. 눈물도 한들지게 많았고 애정도 고집 센 아이 마냥 넘쳤다. 그를 따라 나도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한동안 빠지기도 했다. 그가 좋아하던 영화가 <애정의 조건 Terms of Endearment>이었다. 제목은 <애정의 조건>이지만 언제나 타이틀 앞에선 고민이 됐다. '사랑의 언어'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사랑을 받고 친밀하게 사랑하는 몸짓이 두 시간의 진동을 넘어 온몸으로 가득히 전달되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 언어가 항상 밝지만은 않았다. 욕설과 질투와 고함이 기억 속에서 고스란히 남았다.


나와 그, 우리에겐 ‘단절(斷絶)’이라는 문제가 고민이었다. 사람마다 달리 틀어 막힌 소통공간을 밝혀보자며 카메라를 들이대자고 했다. 내 역할은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그는 갈라진 틈새를 찍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불타버린 메마름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다가 금이 간 통로에 서로가 들어앉자고 했었. 하지만 어둠에 비친 갈라짐은 비슷했으나 이어질 모양새가 달랐다. 막아줄 수 없는 그늘이 있었다.


그는 원래 책을 읽지 않았다. 나도 따라 읽지 않았다. 걷기만 걸었다. 그러다 멈춰버렸다. 누워버렸다. 그는 갑자기 책을 읽었다. 내가 심술 내는 게 자기가 게을러서 그런 것 같다며 책도 읽고 그림도 보고 공부도 하고 영화도 찍겠다고 했다. 지켜봤는데 그가 흘리는 분주함 속에 서서히 관심은 사라졌다.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 사람이란 존재가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주위의 친구처럼 돌아가 버렸다.

같은 길을 밟으며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야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빗질하는 엄마의 손으로 곱다운 딸의 머리를 어루만져야 밑바닥에 묻은 애정이 생겨나는가. 울음을 참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며 고개 숙이는 사람에게 꼭 사랑한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림자와 같이 불분명한 세계에서 온갖 시름을 안아야 한 세상을 살았다고 만족하는 것일까.


장례식장이 그리 밝은 줄은 이 영화 마지막을 보고 알았다. 가을날 흩날리는 우수한 낙엽비처럼 딸이 죽고 난 뒤 정자(亭子) 위엔 그렇게 큰 아픔은 없었다. 감싸주는 친구도 있고 쓸리는 바람도 있었다. 한탄하는 읊조림은 있어도 꼬마 아이의 달음 치는 이야기에 기나긴 시선이 계속하여 멈추지 못했다. 슬펐던 죽음도 꿈같이 비추던 밝은 햇살도 그늘진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2004. 9. 20. MONDAY



사랑의 언어는 저마다 다른 모양새이다. 애정의 조건 또한 사람마다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 나는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무언가를 주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사람들은 다들 뭔가 남겨주고 싶어 했다. 받아도 부담 없던 선물은 음악이었다.  TAPE, CD, LP판, MP3에 담긴 음악들. 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더니, 음악 소리마저 지금은 소리 없이 바삭한 의성어(擬聲語)가 되었다. 오월의 마지막 밤이 흘러간다.



사랑받는 침묵
Endeared Silence


긴 속눈썹은

세차침묵하네


말없이 눈을 감고

어제를 떠올리네


닫은 문을 열고

그리던 손 내밀지만


떠나간 그댄

소리가 없네


Long eyelashes

Silently remain


Closing my eyes without a word

Recalling yesterday


Opening the closed door

Extending the hand as before


But you, who have left

Are silent




오월의 마지막 밤
The last night of May


눈가를 스치는 바람의 선율,

달콤한 오월의 장미는

주름진 입가를 감싼다.


우리 까맣게 이별하던 밤, 

부서지는 하얀 가로등은

다홍색 표정들을 비추었지.


애타는, 검고 붉은 목소리는

머나먼 파도처럼 지워져 간다.

그녀는 말없이 앞만을 바라보고 있다.


The wind's melody brushing past my eyes,

The sweet May roses

Embrace the wrinkled corners of my mouth.


On the night we parted in darkness,

the shattering white streetlight 

Illuminating crimson expressions.


Longing, black and red voices

Fade away like distant waves.

She gazes silently a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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