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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06. 2024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고독(孤獨)의 종식

[Cien años de soledad |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2024. 6. 1. PHOTOGRAPHY by CHRIS


초등학교 때 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 | 백년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1967》을 읽으면서 정말 이상한 소설이라고 중얼거렸다. 어렸을 땐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의 소설은 필수로 읽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서 씨앗이 되어 말라죽거나 나무에 묶여 죽거나 수의를 짜고서 죽거나 손목을 자르고 죽거나 쌍둥이를 몸속에 넣은 채 중독으로 죽거나 출산을 하다가 과다출혈로 죽거나 이래저래 고독하게 희석되고 괴이하게 뒤틀린 죽음들을 보면서 유토피아가 무너진 욕망의 사회에서 인생의 종결은 고독한 죽음인지 생각했다. 당시 어린 나에게 고독은 삶의 얇은 피막 같은 단어였을 뿐, 정확한 개념도 인식되지도 않을 시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인간의 고독과 역겨운 피의 사랑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묻게 했다. 내부의 몽환적인 기억만이 가물한 상태에서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다시 읽어보았다. 볼펜을 입에 물고 세 번을 연달아 읽어도 문장이 지루하고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까맣게 테러를 해 논 흔적이 보인다. 불만이 가득 묻어있는, 무작위로 그어놓은 선들을 만지며 한참을 웃었다. 보통 책은 깨끗하게 읽고 아끼는 편인데, 잘 나가다가 막장에 검은 볼펜으로 테러를 감행했다는 것은 이 소설이 어린 나의 가슴에 얼마나 돌덩이 같은 답답함을 안겨주었는지의 증명이다.

                                                               



Uno | Inicio

세상을 떠돌던 집시 연금술사 멜키아데스가 염화 제2수은(Mercury(II) chloride)의 플라스크가 깨지고 퍼져나간 지독한 악마의 냄새란 그저 유황질이라고 변명해 봐도, 우르술라가 가지고 있던 나그네의 기억은 코를 찌르던 지독한 죽음의 냄새와 연결되었다. 가짜 이빨을 끼우고 늙은이에서 젊음을 자랑하는 미소를 지으면 시간을 거스른 마법사의 신비에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이내 마술적 태도에 심약한 공포감을 느낀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가계에 내려진 고독의 저주는 진취적인 기품을 바탕으로 마콘도를 부지런한 마을로 개척시킨다. 원죄(原罪)의 습기와 침묵의 낙원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악몽의 세계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엔디아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도 걱정할 건 없어.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되니까."


악마의 땅으로부터의 탈출! 모험적 태도를 가진 아르카디오가 발견했던 것은 섬으로 고립된 마콘도였고, 반도가 될 수도 없게 썩어버릴 몽상의 지도였다. 탈출을 꿈꾸는 남자와 달리, 그의 아내 우르술라는 태어난 고장에서 죽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주문(呪文)을 외우며 현재에 놓인 남자의 시간을 송두리째 뽑아 기억의 세계로 초대한다. 저주의 씨앗을 밸 수 없다는 육체의 침묵처럼 정조대를 찬 바지를 입고 있던 우르슬라에게 창끝을 겨누는 남편의 욕정 어린 결심이 이뤄지던 날, 우르슬라는 아이를 배고 14개월 뒤 멀쩡한 사내아이를 낳는다. 세 번째 임신을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젊은 호세의 건장한 몸뚱이를 만난다. 친근한 남자는 근접한 여자의 체취에 고독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창자 속을 휘감는 불안과 가혹한 정적과 무서운 고독 속에서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범한 그는 고독을 열망하고 세상의 증오심에 불타는 인내를 갖게 된다.


"신은 존재한다! 데우스 엑시스티트! Deus Exsistit!"


한 가정, 한 마을, 한 도시를 세운 사람의 잊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선 물건의 이름들이나 감정을 세세하기 상기하기 위한 메모들을 사물 곳곳에 붙여야 한다. 기억장치의 반복되는 복습과 회전식 사전은 건망증만이 아니라 죽음의 망각을 통찰하게 한다. 어제의 불면과 내일의 흥분이 흐른다. 레베카, 아마란타, 피에트로, 레메디오스, 프루덴시오, 다시 멜키아데스에게로 이어지면서 반복되는 유전의 얽힘은 시간을 재는 기계를 고장내고 만다. 레베카와 호세 아르카디오, 뜰의 흙과 벽의 석회를 먹고 몸을 섞는 남매의 열정은 자연의 법도도 무시하고 전갈에 가볍게 발을 물리며 자유파의 전쟁을 일으킨다. 자유주의자가 아닌 돼지백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붙은 작은 돼지꼬리일까, '부랄깐 수탉이야기'일까? 



Dos | Desarrollo

겨울이 마무리되고 봄이 시작되는 시기, 지구의 반대편, 브라질의 뜨거운 태양 아래 광란의 카니발이 열리는 리우카니발(Carnival of Brazi, Carnaval do Rio de Janeirol)에 몰린 사람들을 볼 때면 무료티켓을 받아 여행을 가더라도 저곳만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례에서 받은 기억을 참회하는 금욕기간인 사순절(Tempus Quadragesima) 전에 열리는, 정욕이 녹진하게 흐르는 열기에 휩쓸리면 분명, 이름도 모르는 가면을 쓴 사람과 곱게는 사흘 밤낮 육체의 괴성을 지르는 호텔 안의 침대에서, 거칠게는 텐트나 야외 숲 속에서 가면의 얼굴들을 바꿔가며 바닥에서 뒹굴다가 자유의 축제가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32회의 반란과 패배. 각각 19명의 여자에게서 17명의 아들을 낳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가계는 하룻밤새에 후계가 차례로 죽어가는 변고를 겪는다. 14회의 암살과 73회의 복병, 1회의 총살형의 저주까지 벗어났던 대령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영혼을 담아낸 사진이었다.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정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으면서도 종신연금도 사양하고, 마콘도의 작업장에서 금세공품을 판 돈으로 여생을 보내던 그는 일생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콘도의 한줄기 거리(Street)만 남겼다. 그는 아르카디오에게 마을을 발전시켜 달라고 당부하고 혁명파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지만, 이를 곡해한 아르카디오는 독재적이고 잔인한 지배자가 되어, 결국 우르슬라에게 욕을 얻어먹고 쫓기게 된다. 원죄를 인식한 듯이 나무껍질처럼 굳어버린 그를 이어 마을의 지배자가 된 우르술라는 무의식의 연못에 잠긴 남자를 돌보기 시작하고 피에트로의 자살과 아르카디오의 폭행과 총살, 밤나무 아래 멈춰버린 사람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아들을 면회한다. 그러나 죽음이란 오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징조와 더불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알림도 없이 비밀스럽게 문을 연다.



Tres | Clímax

알루미늄 같은 새벽빛이 사라지고 한 남자의 의식에서 흐른 핏줄기가 오른쪽 귀에서 흘러 광장으로 거리로 스며든다. 할머니까지 정당하게 하룻밤의 신부로 삼기 위해 총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와 아들, 형수와 시숙, 고모와 조카, 오빠와 누이 간에 벌어지는 근친상간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가계(家系)가 잔뿌리처럼 퍼져있는 고립된 땅에서 한 가족의 살을 베고 피를 흘리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피가 뒤섞인 근친의 말로(末路)는 닮아있다. 백년 동안의 토지소유권과 불법적인 권리침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란 무엇인가? 바로 죽음만이 좋은 친구이다. 불사신적인 힘, 고귀한 패배가 스스로의 가슴에 치료의 머큐룸을 바르고 총을 당기게 했을 때 권력이 사라진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백치미가 흐르는 아름다운 여인은 미치광이 카니발의 여왕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미적이라면 그 아름다움조차 파리떼나 쥐떼에겐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한 줌 먹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미인은 악의나 질투심에 멀어져 소녀시대의 소박미 넘치는 기쁨에 잠겨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몸을 옥죄는 패티코트보단 죽음을 통과하는 삼베옷을 입으며 애간장을 녹이는 체취를 발산해야 한다. 죽음의 향기를 내뿜는 여자의 체취는 사내들의 기묘한 황홀함과 길 잃은 욕망을 자극하고 구출할 수 없는 죽음을 초대한다. 피비린내 나는 카니발에서 하늘의 여왕으로 성장한 세계 최고의 미녀는 기억의 새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빛과 바람의 성질에 휩싸여 천국으로 올라가 영원히 모습을 감춘다.



Cuatro | Desenlace

과거에서도 현대에서도 자기만의 동굴에 틀어박힌 남자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작업에 열중하곤 한다. 도대체 자의식의 껍질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몇 온스의 금 세공품인가? 황폐한 시간의 흐름이 불어오면 5시에 미사를 드리던 자유당과 7시에 미사를 드리던 보수당이 투쟁하던 마콘도는 폐허가 된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탐험하고 바나나농장이 번영하던 토지는 습지로 변해 지평선 너머 고요한 바다만이 보인다.


일대, 이대, 삼대, 사대까지 살아남아 눈이 먼 우르술라와 싱싱한 젊음의 고손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조차도 고독의 한 장을 마무리해야 하는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기 어렵다. 백 세를 넘어 백 열다섯 살에서 백 스무 살까지 살았던 여인의 가계는 이리저리 피가 섞이면서 점차 기형적인 짐승의 모양을 갖춰간다. 백 년 동안 흘러내린 도도한 흐름은 한 여인의 고독과 침묵의 일생을 노스트라다무스의 <백년사>와 요괴학과 맞바꾸었다. 고독에는 거미줄이 쌓였고, 식인의 습성을 가진 붉은 개미들만이 사라져 가는 고독들을 해치우려 집요하게 집 안으로 침입해 온다. 돼지꼬리를 단 아이를 낳는 불운이 어찌 그녀들의 문제이겠는가? 환멸과 광기를 부르는 하찮은 모험과 전쟁을 일으킨 총과 죽음을 초래하는 수탉들의 닭싸움 속에서 껍질 안으로 파고드는 남자들은 수많은 아우렐리아노와 아르카디오와 우르술라 가계의 여인들과의 접촉 속에서 하나 둘 고독을 종식시킨다.


<이 집안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이고, 마지막 인간은 개미에게 뜯어 먹힌다.>


멜키아데스가 백 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양피지에 적어놓은 한 집안의 역사는 존재의 수태가 남긴 전갈과 누렁나방의 음산한 비밀이 담겨있었다. 우수행(偶數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사적으로 사용한 암호로, 기수행(奇數行)은 스파르타 군대가 사용한 암호로 적힌 글을 읽으며 혈통의 미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집안의 영원한 고독을 불러오기 위함임을 깨닫는 마지막 남자 아우렐리아노는 죽음과 태생의 영원의 비밀을 읽는 순간 신기루 마을은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며 백년의 고독을 운명으로 떠안은 가문은 과거와 미래를 불문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저주의 상징인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우렐리아노가 어둠의 개미굴 속으로 붉은 개미떼에 끌려들어 가면서 한 가계의 종말이자 불행의 씨앗이 반복되던 고독은 지루한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개미가 몰려들어 살을 파먹는 것은 세상과 이별할 때 대지에 놓인 우리의 육체가 이 땅에서 해체되는 과정과 같다. 이미지 답사차 오래전에 들렀던 경기도 고양시의 중남미 문화원에서 토속적인 색채와 붉은 흙이 가득 채워진 공간을 거닐었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했다. 시야를 가리는 희뿌옇고 습기 찬 연기가 자욱한 이국적인 마을에서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이슬을 훔쳐냈다. 갑자기 삶과 죽음이 마술적으로 섞인 듯한 적갈색의 몽환이 밀려들었다. 원형의 돌더미를 돌면서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렸다. 고독의 종말이란 피를 나눈 사람들이 반복하던 전쟁의 종결일까? 살면서 잃어버렸던 사실은 무엇일까?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추구하는 심연의 정신은 의식의 바닥과 가까워질 때 불안의 시점에서 같은 얼굴로 맞닿아 있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내밀한 언어까지도 한 겹 둘러싸인 고치처럼 그 모호함조차 닮아있다.


고립된 섬에선 어떤 의식의 결합도 가능하다.


나는 나의 남자가 나의 아버지이거나 나의 오빠이거나 나의 남동생이거나 나의 아들이거나 나의 손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내 남자의 아버지이거나 내 남자의 형이거나 내 남자의 남동생이거나 내 남자의 아들이거나 내 남자의 손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상대가 나와 같은 생각이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여자가 나의 어머니이거나 나의 누나이거나 나의 여동생이거나 나의 딸이거나 나의 손녀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내 여자의 어머니이거나 내 여자의 누나이거나 내 여자의 여동생이거나 내 여자의 딸이거나 내 여자의 손녀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 대대손손 뿌리내린 근친들이 만들어가는 변질된 물질세계에 대한 환상은 사라져야 한다. 사랑이 아닌 욕망에 의지하여 대대손손 이어지는 근친들이 만들어가는 세습적인 가치와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나는 온전한 '나'여야 한다. 나의 모습으로서 완전한 개별의 '너'와 하나로 결합되어야 저주의 결과나 변형의 오해 없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인간 속에 자리 잡은 욕망의 근원과 자본주의의 폐단,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을 마술적으로 어우르는 《백년 동안의 고독》은 시간이 흐른 오늘에서야 고독을 종결할 수 있는 열쇠를 내밀며 화해의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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