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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0. 2024

BERTRAND RUSSELL THE GOOD LIFE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What have I lived for?] 2024. 6. 6. PHOTOSHOP EDITED. PHOTOGRAPHY by CHRIS



"좋은 삶이란 사랑에서 영감을 받거나 지식에서 인도된 것이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BERTRAND RUSSELL SELLECTED ESSAYS, Bertrand Russell》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1970)의 왕성한 사고와 집필의 열정은 지능을 최대치로 사용하는 천재들의 영역처럼 보인다. 철학, 수학, 과학, 역사, 교육,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40권 넘는 책을 출간했다니,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그의 능력과 열정은 놀랍다.


현실사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셀은 스스로의 기질을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적이라고 평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에는 평화주의자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핵 무장 반대자로서 사회변혁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은 첫째 절대적 지식의 탐구, 둘째 인간 삶에 대한 관심으로 주제가 양분되어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의 공저,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 현대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학교 이후로 수학에서 관심이 멀어진 나로선 요원하게 느껴진다. 다만, 《철학이란 무엇인가 The Problems of Philosophy》, 《서양철학사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노벨문학상을 받은 《권위와 개인 Authority and the Individual》처럼 철학이나 사회 과학적인 주제는 접근이 쉬워 보인다. 실제로 그의 글은 어렵지 않고 용어 또한 난해하기보다 편안하고 쉽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BERTRAND RUSSELL SELLECTED ESSAYS》 제목부터가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생애를 지배한 열정이 세 가지였다고 말했다. 첫째, 사랑에 대한 갈망. 둘째, 지식의 탐구. 셋째,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사랑과 지식이 그를 천상으로 이끌었다면 고통에 찬 사람들의 비명이 그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는 노인과 버려진 아이들, 고독과 빈곤과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이 완화되기를 소망하며, 그는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나는 이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이런 삶을 다시 한번 살 것이다”


80세의 대수학자이자 철학자가 생일에 즈음하여 자신의 살아왔던 시간을 뒤돌아보는 이야기는 사랑의 열락에서 외로움의 방어를 발견하고,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싶었던 열망 꽃피우며, 빛의 언어와 숫자의 질서와 피타고라스의 힘을 알고 싶었던 순수의 시대를 보여주었다. 굶주림과 고문, 고독과 빈곤, 타인의 짐이 되어버리는 늙음의 쇠락은 사회악에 대해 지적할 뿐 손댈 수 없음에 지적인 탄식만 내뱉게 하지만, 그런 성찰조차 없다면 우리에겐 어떤 해답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겠는가.




 I. On Myself 자전적 성찰


공동체의 불행은 각자의 인간이 불행을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버트런드 러셀은 무지의 습관과 어리석은 신념과 열정에 집착하는 게으른 열망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라고 외치는 것은 상통한 이야기이다. 추상과 구체적인 형상의 방향성은 반대로 교차하고 있다. 순수한 이론에서 실용적인 사회철학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과제는 꼭 무엇인가를 이룬 사상가들만이 해야 할 작업은 아니다.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은 각자 선택했던 모습이 연결해 준 그림이다.


러셀의 인생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전후로 극적으로 갈라진다. 애국심과 학살의 기록, 각국의 정치적 선전은 불가지론을 가진 그의 신적인 도덕성을 자극하고 1918년 전쟁에 대한  반전집회에서의 연설, 감옥에서의 4개월의 생활, 고립 속에 엄청난 독서,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etical Philosophy》의 집필이 시작되는 결과를 낳는다. 러셀은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는 바로 늙지 않는 방법이라고 했다.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다. 스스로 삶을 관리하는 건강한 태도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지적이고 자립적인 습관을 간직하고 강물처럼 죽음을 바라보는 의식으로 두려움 없는 삶을 가진 가계의 흔적은 그가 축복받은 고귀한 집안의 자제임을 상기하게 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 하찮은 가계의 존재라 할지라도, 백작가의 후손이 아니거나 재벌집 자제가 아니어도 성취를 이룬 타인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은 나부터 그런 집안을 일구면 된다는 신호로 바꿔 읽을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 인생에서 가능했던 것을 이루고 만족하게 죽고 싶다는 소망은 근면한 인간의 뿌리를 만드는 방식을 보여준다.


"개별적인 인간존재는 강물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미약하다가 좁은 강둑을 따라 흐르게 되고, 때가 되면 열정적으로 바위들을 지나 폭포 위로 돌진한다. 강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제방이 멀어지면 강물은 더욱 빠르게 흐르며, 마침내 눈에 띄는 휴식도 없이 바다와 합쳐지고 나면 아무런 고통 없이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잃어버린다. 나이가 들었을 때 자기 삶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II. On Happiness 행복


마주치는 얼굴마다 자국이 있다

나약함의 자국이, 고민의 자국이


I wander thro' each charter'd street,

Near where the charter'd Thames does flow,

And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London, William Blake》


현대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에 동의한다. 동물에게도 행복이라는 감정이 있을까? 나는 타인의 표정을 읽긴 하지만, 그들에게서 행복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마주치는 인간들의 나약함과 고통이 읽힐 때 동일한 소화불량에 걸린 듯이 긴장의 혈압이 높아지고 잊힌 체기가 위장을 조여 온다. 획일적인 속도의 쾌락을 보내는 연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의 저녁식사는 음주와 열락으로 가는 출입구를 크게 벌린다.


수학을 더 알고 싶은 열망 때문에 혐오하던 사춘기 시절의 자살의 유혹을 억눌렀다는 러셀의 고백은 웃음을 머금게 했다. 청교도적인 죄에 대한 반성과 집착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결점에도 무관심한 그의 입장은 나의 건조한 감정 상태와 비슷해 보이긴 한다. 세상사와 다양한 학문, 외부세계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은 사실적인 현실의 고통을 안겨주긴 하지만, 습관적인 죄책감이나 자기혐오에 휩싸인 자에게는 권태감을 극복할 예방주사가 될 것이고, 타인의 찬양하는 습관에 젖어 자아도취에 물든 자에게는 허영의 뿌리를 잘라내는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며, 타인을 밟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자에게는 정상적인 자기만족을 박탈당하는 내적인 파멸에서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가슴의 행복과 머리의 행복 중에서 지금 나에겐 가슴의 행복은 머리의 행복에서 넘어오지 못한 상태이다.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필수적인 것에 반해,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 중에서 과학자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러셀은 감정적으로 단순하며 식사나 결혼생활에서 즐거움을 찾는 과학자들은 동료 이외의 다른 이에게 직업적으로 대접받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지만, 예술가들은 최대치의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경멸받는 것과 야비해지는 것 사이의 갈등에 처한다고 했다. '예술가보다 과학자가 행복하다'는 명제는 생각해 볼 만했다. 감정을 제거한 예술가는 어떨까? 혹은 과학적 사고를 가진 예술가는 좀 더 행복의 문턱에 가까이 가게 되지 않을까? 감정의 복잡함이 강물 속 거품이라고 했을 때 강물이 흘러서 도달해야 할 바다가 있고 잔잔히 가든 세차게 가든 갈수만 있다면 생의 목표는 달성한 것이 아닌가?


인생의 목표를 삼는 직업적인 성취의 측면에서 러셀은 러시아와 일본, 중국을 예로 들면서 서구의 젊은이들보다 동구권이나 아시아 사람들이 더 행복에 도달하기 쉬운 위치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글을 쓴 1950년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행복을 느끼는 감도가 전 세계에서 제일 낮은 나라 중 하나이다. 안락함과 무력함이 주는 냉소주의의 시선은 무조건 살아야만 하는 당위의 사회에서 자신을 일깨울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서구화가 된 젊은 친구들의 바쁨이 과거의 젊은이들과 바쁨의 속도가 다르듯이, 모든 이에게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지 않으며, 그 시간의 질 또한 같은 무게감은 아니다.


사람들은 작가들이 그리고 써 내려가는 우울함의 속도와 절망적인 얼굴에 함께 비탄하곤 한다. 그러나 표현이 된 감정과 생각은 실제의 삶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행복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폭넓고도 진정한 관심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것밖에 내 안의 호기심과 즐거움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무엇에 빠져드는 도락과 취미들은 인생을 주무르기에는 가치에 대한 회의와 퇴보를 안겨줄 수도 있다.


행복을 추구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를 돼지의 철학이라고 비난하고 행복을 절제하고 공격했던 스토아학파에 대해 버트런트 러셀의 날카로운 지적은 재미있었다. 행복을 가치 없고 타락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지성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타 종교의 억압 및 기독교인들의 처형, 세네카의 고리대금업 및 네로 황제의 만행을 사주하고 재산을 축적한 모순적인 철학적 태도를 언급하는 러셀은 경직된 사고가 일으키는 추악한 거짓말을 가려듣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동시에 그는 고대를 뛰어넘어, 이천 년 뒤 독일의 전체주의 이론을 탄생시킨 토마스 칼라일을 위시하여 독일 철학자들의 고립되고 멸시적인 시선을 수면 밖으로 꺼낸다. 고귀한 명분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실제로 타인을 부러워하는 심리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와 같은 잔인하고 파괴적인 이론을 만들어낸다는 가설은 흥미로웠다.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마른 빵과 약간의 치즈로 행복을 추구한 에피쿠로스의 소박함을 찬양하는 러셀의 논조를 들으면서 평화의 시대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벼운 동조와 함께, 개인적인 삶의 규칙과 행복을 같은 선에 놓아야 한다는 충고를 메모해 봤다. 가진 자의 놓음이 어려울까? 가지지 못한 자의 획득이 어려울까? 어떤 대상에 대해 쥐고 놓음, 이 둘 다 가볍게 보면 어렵지 않지만, 그 상태에 고착해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힘을 빼는 것조차 힘들다.

 

자발적인 개성과 노력이 들어가는 작가들과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진정한 행복은 보수가 존재하지 않는 진리의 탐구와 미적인 추구와 지적인 열망에 대한 지속적인 진행일 것이다. 본능을 거슬리지 않는 바람직한 목표를 향한 활동은 자기 생산성과 합치되는 상태이다. 영화관에 가거나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창조적 충동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소박하고 단순한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기쁘게 삶을 맞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번역서여서 그런지, 좋은 삶과 훌륭한 삶은 다른 말로 들린다. 'The Good Life'는 훌륭한 삶이라기보다 좋은 삶에 대한 성찰이다. 좋은 삶은 행복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다양한 감정을 포함하는 근원적인 삶의 기준인 사랑은 순수와 자비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III. On Religion 종교


보통 무신론자들은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 많이 보인다고 한다. 나는 다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일신론이든 불가지론리든 간에 내면이 믿는 방향대로 세상이 보인다고 믿는 입장이라 신격은 쉽게 발설하기 어려운 주제가 되었다. 기독교 세상에 놓여있던 러셀은 기독교인이라면 두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교리적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Christian)이라면 그리스도(Christ)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독교인이라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는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선하고 현명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만큼 믿지 않는다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칭할 권리가 없다는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핬다. 정말 그렇다. 말로만 그리스도와 신을 불러댔지, 그만큼의 신성이 있는 자는 보지 못했다. 모두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복과 믿음을 위해 신을 믿는다. 신의 사랑은 자기 사랑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내놓지 않으면 반쪽인 것이며 그만큼 웃긴 모습은 없는데, 잘 지적한 점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 사회를 분석한 점은 새겨볼 만하다.


"인간의 약속인 숫자와 자연의 법칙은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지시하는 명령이다. 원자들의 법칙은 자유롭고 원자운동의 통계적 평균에 불과하며 현상을 설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앞의 인간은 행동을 결정할 때 선택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신의 존재 이유가 제1원인론이든, 자연법칙이든, 목적론적이든, 도덕적이든, 불의의 보상이든, 그리스도적인 특성이든, 이미 놓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생물이고, 환경이 생물에 적응하지는 않는다. 적응의 기본계획은 신의 논리와 연결되지 않는다. 신이 선하다면 옳고 그름은 신의 명령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종교가 생긴 근원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며, 안전함에 대한 기대과 같은 든든한 존재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과학은 하늘의 동맹군을 기다리기보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를 탐험하고 이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 수 있다. 좋은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선 세계를 직시하고 두려움 없는 세계관과 자유로운 지성을 길러야 한다."


진리에 무관심한 사람들 가운데서, 종교는 도덕률을 대체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신성불가침의 원리는 공산주의나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나 동일한 원리주의의 오류에 빠진 형태를 보여준다. 불가지론자(不可知論, agnosticism)로서 신학적 명제의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며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신중함은 극렬한 믿음보다는 합리성과 관용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종교적 '권위'에는 관대하고 '신의 법칙'에는 절대성보다 상대적인 현상을 보는 불가지론은 보복적인 징벌로서의 '죄'를 신뢰하지 않으며, 영혼이나 육체는 상징적인 담론의 의미로 인식한다. 관찰자의 눈에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성과 마음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가지는 이성적인 신념에 대한 생각들은 과학적인 사고로 둘러싸인 철학자의 인식을 엿보게 한다.




IV. On Studies 학문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인해 철학의 길에 접어든 러셀처럼 나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알고 싶었다. 외부세계가 꿈일지도 모른다는 데카르트적인 철학적 의심과 종교적인 불가지론은 러셀을 부재한 시간과 공간을 확인하고 물질의 환영을 체험하며 정신의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으로 인도한다. 글쓰기에 대한 충고 또한 새겨들을만하다. 처음 책은 박식한 소수를 위해 전문용어로 써 봐야 그다음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언어로 정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글쓰기에 멀어진 나로선 첫 글은 한 번쯤 어렵게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의 세대는 지혜가 부족하기에 철학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은 우주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감정적인 측면에서 인생의 목적을 올바로 평가하는데 도움을 준다. 역사와 지질학은 '지금'에서, 천문학은 '여기'에서 지적인 해방을 불러온다는 이야기는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한다. 내가 서 있는 시간의 ‘지금’은 과거를 살피면서 내일로 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위치적인 ‘여기’는 지각을 넓혀 우주의 근원에 대한 열의와 현재의 권위나 권력에 놓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불러온다. 마음속에 그려진 다른 세계에 대한 그림들을 살펴보며, 윤리적으로도 '지금 여기'의 독단론(Dogmatism)과 폭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에 절대 공감한다. 광신적 독단론은 철학에서 지적인 해독제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불행 속에서도 광적인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고 절제된 인내심을 키울 수 있으며, 재앙들에 대한 당혹스러운 절망과 압도적인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지식의 균형감과 지혜의 무게감은 '지금 여기'의 폭정으로부터 사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내 안의 날카로운 감각을 잃지 않도록 계속적인 관찰을 잊지 말아야 한다.       




V. On Politics 정치


정치적으로 중요한 욕망들에 대한 러셀의 이야기는 노벨상을 수상하는 수락연설로 마감되어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언급하며, 분쟁과 갈등의 해결을 위해선 남한과 북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각자 인생에서 원하는 바와 불만은 무엇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과 충동을 촉발하는 인간의 행위는 소유욕, 경쟁심, 허영심, 권력욕으로 욕망이 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동력인 재화에 대한 소유욕은 생존의 공포와 필수품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된다. 소유보다 더 강렬한 경쟁심과 막대한 힘을 지닌 허영심과 만족을 모르는 권력욕은 공포와 증오 속에서 극적인 모습을 갖춘다. 정치에 할애된 이야기는 단락이 적어서 가볍게 훑는 정도였다. 말은 사실을 진술하고 감정을 촉발한다. 정치에 대한 감각은 스스로 군중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물이 흐르는 법칙과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선 자연스럽게 모양새를 갖춘다. 정치라는 것은 인간의 소유에서 발생된 경쟁과 허영을 다스리는 하나의 권력이자 정보이며 지식이며 지혜이다. 정치적인 힘을 오도하고 오용하는 군중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도 정치에 대한 올바른 관심과 그 운용에 대한 냉철한 관점과 균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어느 신학자의 악몽
Dr. Thaddeus's Nightmare

저명한 신학자 테디어스 박사는 꿈에서 창조자의 걸작, 인간의 몸으로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철저한 조사로 인한 입장 장애에 부딪힌 그는 천 개의 눈과 한 개의 입을 가진 천국 도서관장에게 '지구'란 곳의 '인간'을 설명한다. 인간-지구-태양-태양계-은하수에서 설명이 막힌 그는 12면체의 사서에게서 수억 개의 은하 중 은하수의 은하를 찾기 위해 오천명의 8면체의 직원을 부르는 수고를 불러일으킨다. 박사는 하나의 은하수에 있는 별 하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천체들의 집단인 태양계와 그 천체들이 공전하는 별을 '태양'이라고 말하며, 태양의 추적을 부탁한다. 몇 년 뒤 지친 기색의 특별조사직원은 의뢰받은 '행성'에 기생동물들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보고한다. 천상계의 인간에 대한 평가를 들으며 신에 대한 믿음이 깨진 테디어스 박사는 절망스럽게 외치고 만다.


"인간이 3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수에 속한 대수롭지 않은 별 하나의 둘레를 도는 작은 천체 위에 사는 하찮은 극미 동물이라니,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으며 더 이상 창조주를 숭배할 수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신학자는 중얼거렸다.


"잠든 사이에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사탄의 힘은 참으로 무섭도다."  

On Religion, 《BERTRAND RUSSELL SELLECTED ESSAYS, Bertrand Russell》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인간 혹은 다소 교만하게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일컫는 종은 지구라는 행성에 있는 동물 종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동시에 가장 짜증스러운 존재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야기 중에서 삽입되어 있던 《어느 신학자의 악몽》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인간의 본심을 건드리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가볍고 어리석은 것인지 창조주에 대해 만나보지 않은 우리는 알 수 없다. 스스로를 대단하거나 미천하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내 안의 신성이 있기 위해선 스스로를 인생의 도처에서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지성과 감성을 사용하여야 한다. 러셀은 우리 인간이 지구상의 동물과 다른 점이란 ‘언어’에 있다고 지적한다. 음성언어는 동물적 울음에서 발달했고, 문자언어는 정보를 담은 그림들이 양식화하여 문자로 정착되었다. 언어는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간사에 막대한 가치점을 가진다. 인간을 진보하게 하고 사유하게 한 것은 언어가 가진 고유성이다. 6천 년간의 조직화된 전쟁으로 형성된 우리의 세계는 고대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빛과 사랑과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우리의 바람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어느 지혜로운 선인의 목소리는 인간종의 보존가치는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희망차고 밝은 러셀의 유쾌한 철학에세이 한 소절을 들으면서 시원한 지혜의 바람을 맞아본다. 언어로 풀이하는 인간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탐구를 향한 흥미로움과 존재의 사실에 대한 짜증을 동시에 수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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